디바·디보의 세계/오페라 성악가 일화

그라마폰 시대의 디바들

정준극 2010. 11. 2. 14:08

그라마폰 시대의 디바들

 

제니 린드가 뛰어난 소프라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전설에 불과하다. 제니 린드의 음성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지 들을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넬리 멜바의 음성은 영원히 죽지 않았다. 멜바의 노래는 언제라도 들을수 있다. 그라마폰의 등장은 오페라계에 일대 혁신을 불러 일으켰다. 비록 무대에서의 연기와 감정은 볼수 없지만 음성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라마폰 시대의 첫 문은 아마도 마리아 말리브란이 열었을 것이다. 그의 뒤를 따라 너도나도 음성을 남기고자 했다. 표도르 샬리아핀의 그 웅장한 음성을 들을수 있는 것도 그라마폰 덕분이다. 1948년에는 LP가 등장했고 1955년부터는 스테레오가 나왔다. 그리고 현재는 CD가 나와 있다. 기술의 발달과 함께 소리를 가꾸는 기술도 확대되었다. 그래서 기계노래와 실제노래가 완전히 다른 경우도 생겼다. CD를 듣다가 무대에서의 노래를 듣고 실망한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CD 보다는 무대에서의 노래에 더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친밀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라마폰 시대를 개척하였던 성악가들의 일화를 찾아보자.

 

오텔로의 점심

오텔로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오텔로의 이미지를 창조했던 테너 프란체스코 타마뇨(Francesco Tamagno)는 단돈 한 푼이라도 아끼는 구두쇠로 유명했다. 어느날 작곡가 겸 지휘자인 루이지 만치넬리(Luigi Mancinelli)가 이탈리아 출신의 성악가들을 초청하여 어떤 이탈리아 식당에서 오찬을 함께 하였다. 타마뇨도 참석했다. 타마뇨는 만치넬리가 송아지 스테이크를 먹지 않고 그대로 남기는 것을 보고 그걸 어찌 하려는지 물어보았다. 만치넬리는 대수롭지 않게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겠지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타마뇨는 웨이터를 불러 신문지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타마뇨는 신문지에 스테이크 남은 것을 둘둘 말아 포장하면서 '우리 집 강아지가 송아지 스테이크를 아주 사모한답니다'라고 설명했다. 저녁때 만치넬리가 갑자기 무슨 용무가 있어서  타마뇨의 호텔 방을 찾아갔더니 타마뇨는 마침 딸과 함께 신문지를 펼쳐놓고 송아지 스테이크를 저녁으로 먹고 있었다.

 

오텔로 초연에서의 테너 프란체스코 타마뇨. 이 그림은 라 스칼라 박물관에 영구전시되어 있다.  

 

공격적인 엘자

엠마 임스(Emma Eames: 1865-1952)는 성격이 냉정하고 조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카이로에서 아이다를 공연할 때에는 아이다가 나일강에서 스케이트를 지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어느날 메트에서 로엔그린의 엘자를 맡아 공연할 때였다. 엠마는 오르트루트 백작부인의 역을 맡은 어떤 메조소프라노가 어찌나 당당한지 은근히 질투심이 생겨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침 엘자가 오르트루트에게 항의하는 장면이었다. 엘자인 엠마는 느닷없이 오르트루트의 뺨을 보기좋게 철썩 쳤다. 사람들은 저것도 연기의 일환이려니 하면서 '아 참 연기 잘한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지나갔다. 하지만 어떤 신문기자는 엠마가 일부러 그랬던 것을 파악하고 공연이 끝나자 메조소프라노를 찾아가 '아까 엠마 임스가 뺨을 철석 때렸는데 어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메조소프라노는 이미 엠마를 용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차가운 엠마에게도 그런 뜨거움이 있는지는 처음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쿨 하다는 평을 받은 엠마 임스 

 

대단한 연설과 대단한 통역

1921년 러시아의 위대한 베이스 샬리아핀이 미국을 방문했다. 1차 대전후 처음으로 러시아 음악가가 미국을 방문하는 것이어서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더구나 유명한 샬리아핀이 아니던가! 뉴욕의 엘리스 아일랜드는 환영나온 사람들과 신문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마침내 샬리아핀이 배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샬리아핀에게 한 말씀 해 달라고 소리쳤다. 샬리아핀은 영어를 할줄 몰랐다. 샬리아핀은 단상 위에 올라가서 특별한 연설을 했다. 실은 연설이 아니라 제스추어를 쓰고 춤을 추며 판토마임을 하고 중얼거리거나 속삭였으며 이리저리 모션을 취하였고 어떤 때는 포효하는 듯이 혼자서 소리를 질렀다. 멀리서 보면 정말 대단한 연설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샬리아핀은 미국 사람들에게 러시아의 극심한 기아상황을 설명코자 했다. 러시아에서는 샬리아핀의 삼촌도, 샬리아핀의 부모도, 샬리아핀이 다니는 성당의 신부님도, 이웃에 사는 샤샤도, 러시아의 하늘에 있는 하나님도 모두 배고프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어린 시절에도 배가 고팠고 지금도 고프며 앞으로도 고플 것이라는 내용도 추가로 전달코자 했다. 굵은 인상에 몸짓조차 큰 샬리아핀의 제스추어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샬리아핀이 제스추어를 끝내자 사람들은 매니저 후록(Hurok)에게 샬리아핀이 도대체 저렇게 오래동안 힘들여서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 후록은 '미국은 위대한 나라라고 말했습니다'라고 간단히 말하고 총총히 자리를 떴다.

 

표도르 샬리아핀 

 

스코티의 레슨

안토니오 스코티(Antonio Scotti: 1866-1936)는 오페라 역사상 가장 오래동안 무대생활을 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바리톤이었다. 무려 44년을 활동했다. 그중 33년은 메트에서 보낸 기간이었다. 그는 은퇴하면서 다른 사람들 처럼 스튜디오를 열고 성악지망생들에게 레슨을 하지 않았다. 스코티는 '성악가들은 은퇴하고 난 후에 스튜디오를 열어 레슨을 하여 돈을 버는데 나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고 말해다. 스코티는 '나는 태어날때부터 성악가로 태어났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없기 때문에 가르칠 것도 없다'라고 설명했다. 

 

안토니오 스코티

 

토스카니니의 찬사

로테 레만(Lotte Lehmann)은 토스카니니가 지나칠 정도로 완벽주의자라는 얘기를 듣고 그와 함께 공연하는 것을 피해왔다. 토스카니니는 무대의 성악가들에게 한번도 잘했다는 소리를 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레만과 토스카니니 두 사람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휘델리오였다. 평론가들은 '레만만큼 레오노레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부른 사람은 없었으며 토스카니니만큼 휘델리오를 완벽하게 해석하여 지휘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최고 수준의 음악제로 만들었다. 그로부터 두 사람은 서로 크게 존경하였다. 따지고 보면 지휘자로서 토스카니니는 성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만일 어떤 성악가가 제대로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 단테조차 사용하지 못했던 단어들을 사용하여 모멸차게 비판했다. 그리고는 '그대는 음악을 할 권리가 없다'고 소리쳤다. 그때문에 얼마나 많은 성악가들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레만의 경우는 달랐다. 레만이 휘델리오의 리허설을 할 때에 토스카니니가 갑자기 오케스트라를 중단시켰다. 솔직히 말해서 무대 위의 사람들은 토스카니니가 또 무슨 비난의 말을 퍼부을까라고 생각하여 벌써부터 걱정에 휩싸여 있었다. 레만도 '이번에는 토스카니니가 뭐라고 야단을 칠까?'라면서 은근히 걱정을 했다. 레만은 토스카니니에게 Mein Gott! Was kommt jetzt(아이구, 이번에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토스카니니는 레만을 향하여 '당신은 정말 완벽한 예술가올시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레만은 거의 정신을 잃고 쓰러질뻔 했다.

 

로테 레만 

 

타우버의 수난

오스트리아 린츠 출신의 테너 리하르트 타우버(Richard Tauber: 1891-1948)가 좋아하는 역할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중에서 헤롯의 시위대장인 나라보트(Narraboth)였다. 마지막 막에서 살로메를 사모하는 나라보트는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면 병사들이 나라보트의 시신을 메고 무대 뒤로 운반한다. 그때부터 타우버는 무대 뒤에서 오페라가 끝날 때까지 여유작작하게 담배를 피우며 휴식 시간을 갖는다. 타우버는 자기를 운반하고 무대 뒤로 나가는 헤롯의 병사들에게 '내 시체가 무겁지 않느냐? 자네들의 역할이 이게 뭔가? 고작 시체나 운반하니 말야!'라면서 놀리기를 좋아했다. 병사들은 나라보트의 시체를 무대 뒤로 운반하고 나서 다시 무대에 나와 막이 내려질 때까지 한 구석에서 창을 잡고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한다. 타우버로서 그런 병사들을 보고 우습고 한심하다면서 놀리는 것은 여간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날 밤, 네 명의 병사들은 타우버를 골탕먹이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나라보트가 자살하자 병사들은 타우버를 둘러메고 무대 뒤로 나가는 대신 누구나 잘 볼수 있는 무대에서도 가장 높은 장소에 내던져 뉘어 놓았다. 그래서 객석에서 누구든지 타우버가 누워있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타우버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로 병사들에게 가만두지 않겠다느니 하면서 협박하고 사정하였지만 평소에 놀림을 받았던 병사들은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타우버는 무대에서 막이 끝날 때까지 팔다리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진짜로 죽은 듯이 누워 있어야 했다.

 

리하르트 타우버 

 

어떤 우연

어떤 영국 여인이 2차 대전 막바지에 폴랜드 부대와 함께 전선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어느날 폴랜드부대는 독일 동북쪽 어떤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마침 농가가 있어서 그 집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농부의 아내는 영국여인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건 딱딱한 나무 의자였다. 영국여인이 방안을 둘러보니 푹신한 소파가 있었다. 영국여인은 대짜고짜로 소파에 털썩 누우면서 '난 여기서 자겠어요'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영국여인이 소파에 몸을 던지자 마자 무슨 그릇 깨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 농부의 아내가 기겁을 하면서 다가왔다. 소파를 덮은 천을 들쳐냈더니 거기에는 리하르트 타우버의 레코드가 여러장 있었다. 영국여인 때문에 모두 깨졌다. 농부의 아내는 나치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숨겨 왔던 타우버의 음반을 나치가 물러나자마자 듣고 싶어서 꺼내 놓은 것인데 저 영국여인이 깨트렸다고 하면서 못내 아쉬워했다. 그 영국여인은 타우버의 부인인 다이아나 네피어(Diana Napier)였다.

 

리하르트 타우버(리챠드 터버) 음반

 

레하르를 노래한 타우버

타우버는 오페라 하우스를 떠나 오페레타 무대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은 그가 경박한 오레레타로 간데 대하여 나무랬다. 타우버는 '나는 오페레타를 노래하지 않습니다. 나는 레하르를 노래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그의 음성과 음악성은 오페레타에서 더 빛을 발휘했다.

 

타우버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앙코르 폰셀레

미국의 소프라노인 로사 폰셀레(Rosa Ponselle: 1887-1981)는 미국 밖으로 나가서 무대에 선 일이 거의 없다. 고작 코벤트 가든에 한번, 그리고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마지오 뮤지칼레에서 한번 무대에 섰던 일이 있을 뿐이다. 플로렌스에서는 가스파레 스폰티니의 La Vestale(베스타 여사제)에서 줄리아의 역할을 맡았다. 폰셀레가 줄리아의 아리아를 끝내자 청중들은 모두 일어나서 난리도 아니게 앙코르를 요청했다. 지휘자 빗토리오 구이(Vittorio Gui)는 앙코르를 받은 예가 없다고 하면서 청중들의 함성을 일축했다. 폰셀레는 기왕이면 앙코르를 불러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잠시 살펴보니 지휘자의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때 어떤 부인이 지휘자에게 다가와서 '저렇게 완벽한 노래는 평생 다시는 들을수 없겠지요?'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지휘자는 폰셀레에게 사인을 주고 앙코르를 부르도록 했다.

 

로사 폰셀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