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오페라 성악가 일화

넬리 멜바(Nellie Melba)

정준극 2010. 11. 3. 06:15

넬리 멜바(Nellie Melba)에 대한 일화 

 

오스트레일리아의 넬리 멜바(Dame Nellie Melba: 1861-1931)는 오페라의 황금시대를 장식한 가장 위대한 디바이다. 위대한 성악가였지만 그만큼 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재빠른 위트, 거침없는 표현, 예기치 못한 언행...특히 라이발이나 남성 성악가, 또는 지휘자에 대한 한마디들은 과연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촌철살인적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멜바를 높이 숭상했고 동료 음악가들도 멜바를 존경하였다. 평론가들이 멜바에 대하여 단 한마디라도 비평의 소리를 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사항이었다. 그들은 모두 멜바를 찬양했다. 멜바의 위대함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 있다. 푸치니의 말이었다. 푸치니는 멜바에게 '당신은 멜바-푸치니를 노래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푸치니를 노래합니다.'라고 말했다. 열이면 열의 성악가들은 원래의 작품을 자기에게 맞게, 자기의 취향대로, 자기의 해석대로 노래를 부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멜바는 푸치니의 작품이면 푸치니로서 노래를 불렀다. 멜바는 어느때 구노의 파우스트를 공연하게 되었다. 지휘자인 오이겐 고쎈스(Eugen Goosens)가 공연 전에 멜바의 분장실에 들려 멜바에게 보통 템포보다 다르게 부르는 대목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멜바는 '선생님, 저는 구노가 쓴 그대로만 노래를 부릅니다. 선생님도 그렇게 지휘해 주실줄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멜바는 '노래의 여왕'(Song of Queen)이었다.

 

멜바의 음성은 어떠했는가? 메리 가든이 한 말을 생각하면 짐작할수 있다. 메리 가든은 '라 보엠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이 C는 마치 하늘의 별처럼 다가와서 영원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멜바의 성격은 어떠했는가? 퉁명스럽고 무뚝뚝했다. 자만심에 넘쳐있었고 굽힐줄 몰랐다. 한마디로 거만하고 자신만만했다. 어째서 그랬을까? 멜바는 그렇게 해야 정상에 오를수 있고 정상에 오른 자리를 유지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멜바는 정상의 사람들과 이름을 나란히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멜바는 멜바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정상이라는 것을 인정할수 없었다. 아델리나 패티가 레코드를 취입할 때에는 스튜디오에 가지 않고 스태프들을 자기 집에 오도록 하여 편안한 분위기에서 취입을 했다. 멜바도 스태프들을 자기 집에 오도록 하여 취입했다. 다만, 패티는 피아노만 있으면 되었지만 멜바는 50명에 이르는 오케스트라가 있어야 했다. 그 점이 달랐다. 그리고 멜바는 자기의 레코드를 판매하도록 할지, 그렇지 않으면 취소할지를 결정했다. 아무튼 그러한 특별한 성격때문에 적도 많았다.

 

멜바는 뉴욕의 메트, 오스카 햄머슈타인의 맨하탄 오페라 극장, 미국 전역, 베를린, 페터스부르크, 파리, 고향인 호주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멜바의 공식적인 오페라극장은 코벤트 가든이었다. 어느때 존 매코맥(John McCormack)과 함께 코벤트 가든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게 되었다. 리허설을 하는 중에 멜바는 매코맥에게 '아니지요, 그렇게 부르면 안됩니다. 장(Jean de Reszke)은 이렇게 불렀어요'라고 한마디를 했다. 그러자 매코맥은 '나는요, 장이 아닙니다. 매코맥입니다'라면서 '나는 내 스타일로 부릅니다'라고 주장했다. 하여튼 공연이 끝났다. 커튼 콜의 시간이었다. 매코맥이 멜바와 함께 나란히 무대 앞에 나서서 박수갈채에 화답하려고 하자 멜바는 매코맥에게 '이 극장에서는 어느 누구도 나와 함께 나란히 서서 인사를 하지 못합니다'라고 단호하게 통보했다. 이것이 멜바였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

 

마르케시가 스타를 발견하다

멜바는 호주에서 성악공부를 마쳤지만 더욱 연마하기 위해 파리로 가서 당대의 성악교사인 마틸드 마르케시(Mathilde Marchesi)에게서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 마르케시는 멜바를 만나자마자 더 이상 가다듬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단 한번의 소리를 듣고난 마르케시는 건너방에 있는 남편에게 소리쳤다. '여보, 살바토레! 스타를 발견했어요. 아시겠어요?'라고 소리쳤다. 정확하게는 Salvatore, n'est-ce pas, j'ai enfin une etoile 였다. 그러면서 마르케시는 '암스트롱 부인! 내가 해 줄수 있는 것은 무언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게 만드는 것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멜바는 21세 때에 챨스 암스트롱이라는 귀족지주와 결혼한바 있다.

 

멜바의 스승인 마틸드 마르케시

 

시카고의 '로미오와 줄리엣'

1896년 시카고에서 멜바가 장 드 레츠케와 함께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할 때의 일이다. 발코니 장면이 시작되어 로미오가 두 손을 발코니로 향하여 들고 Ah! leve-toi, soleil!이라는 아리아를 감명 깊게 부르는 중에 어떤 이상한 사람이 갑자기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와 '팔을 내려 놓아라, 로미오! 내가 한마디 해야겠다!'고 소리쳤다. 드 레츠케는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었다. 객석에서 놀람과 함께 소란해지자 그 괴한은 '당신들 생각에 내가 미쳤다고 보지요?'라고 비교적 온순하게 말을 했다. 그는 자기가 YMCA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온 메시아라고 주장했다. 드 레츠케는 물론 그가 메시아라는 것을 의심했다. 그래서 스태프들에게 즉시 막을 내리라고 지시한후 그 괴한을 꼼짝 못하게 붙잡도록 했다. 얼마후 막이 다시 오르고 드 레츠케는 발코니 장면의 아리아를 침착하게 다시 불렀다. 사람들은 그런 드 레츠케의 행동에 대하여 감탄하였다. 하지만 줄리엣은 침착하지 못했다. 멜바는 이상한 사람이 무대 위로 올라오자 겁이 나서 발코니의 창문을 얼른 닫고 숨어서 비명만 질렀다. 로미오가 아리아를 부르는 중에도 간간히 비명을 지르며 창문을 열어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로미오는 화가 치밀었다. '멜바, 제발 좀 조용히 해요. 어서 창문을 열고 나와요!'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 소리에 기가 죽었는지 멜바가 창문을 열고 겨우 모습을 보였다. 드 레츠케는 멜바에게 '아무 일도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줄리엣'이라고 소리쳤다. 그후 '로미오와 줄리엣'은 평온하게 진행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괴한은 피스톨을 가지고 드 레츠케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였으나 드 레츠케가 칼을 뽑아 들어 괴한을 벽쪽으로 몰아갔기 때문에 무난히 체포할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그후 오래동안 시카고 음악계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용감한 드 레츠케!

 

로미오 역의 장 드 레츠케. 소년 로미오가 무슨 콧수염이냐고 하겠지만 드 레츠케는 원래부터 콧수염을 길러서 도저히 깍을수 없다고 하여 그대로 로미오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아무렴 모습보다는 소리가 먼저이다.

 

미미가 뮤제타를 부르다

멜바가 코벤트 가든에서 미미를 부를 때 뮤제타는 신인이나 다름없는 젊은 프리치 셰프(Fritzi Scheff)였다. 셰프도 멜바만큼 한 성질 하는 여자였다. 이날 청중들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셰프가 위대한 멜바와 함께 등장하자 야유를 보냈다. 1막의 클라이막스는 '뮤제타 왈츠'이다. 푸치니는 뮤제타의 아리아 후반에서 미미, 알친도로, 마르첼로가 함께 노래를 부르도록 하다가 마지막 파트에서는 뮤제타 혼자서 저 유명한 하이 B를 부르도록 해놓았다. 그런데 그날 따라 셰프의 소리가 플랫이 되곤 했다. 멜바는 자기도 모르게 셰프가 단독으로 불러야 하는 하이 B 부분을 함께 불러 셰프의 플랫을 감싸주었다. 청중들은 멜바의 기가막힌 음성만을 기억하고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무대 뒤로 들어온 셰프는 자기의 몫을 멜바가 가로챘다고 생각하여 멜바에게 대들어 얼굴을 긁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제풀에 화를 풀지 못하고 쓰러졌다. 잠시후 정신을 차린 셰프는 더 이상 공연하지 않겠다고 하며 무조건 집으로 갔다. '라 보엠'공연은 사정상 중단될수 밖에 없었다. 대신, 멜바가 무대에 나와서 루치아의 '광란의 장면'을 불렀다. 청중들은 멜바의 디바 정신에 오히려 열광하였다. 그로부터 코벤트 가든은 '멜바 가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프리치 셰프는 미국으로 가서 오페레타에만 전념하였다. 특히 빅터 허버트(Victor Herbert)의 '마드모아젤 모디스트'(Mlle. Modiste)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콤프로마리아 노르디카

어느날 멜바는 메트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마지막 리허설에 참석하고 있었다. 콤프로마리아는 미국 출신의 릴리안 노르디카(Lilian Nordica: 1857-1914)였다. 콤프로마리아는 말하자면 대역으로서 주역이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대신 출연하는 역할을 말한다. 멜바가 노르디카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노르디카를 잘 아는 사람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가 다가와서 '노르디카! 넌 뭐하러 드레스 리허설을 하니? 무대에 나갈 기회도 없을 텐데!'라면서 자못 멜바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다시 말하여 '멜바면 다냐? 혼자서 잘난체 하지 말라!'라는 의미가 담긴 가시돋힌 말이었다. 사실 노르디카는 멜바보다도 나이가 더 많았다. 그런 눈치도 모르고 노르디카는 멜바에게 '저도 언젠가는 이졸데를 부를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해명 비슷하게 말했다. 웬 여자의 간섭으로 기분이 상한 멜바는 '걱정 말아요! 그런 요청은 앞으로 받을 일이 없을 테니까요'라고 말했다.

 

릴리안 노르디카 

 

아프리카제국의 로우즈와 질문

남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큰 돈을 벌어 '아프리카 제국의 예언자'라고까지 불리는 세실 존 로우즈(Cecil John Rhodes: 11853-1902)가 어느날 멜바에게 '여사께서는 예술을 더 좋아하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박수를 더 좋아하십니까'라고 불현듯 질문하였다. 말하자면 인기와 명성 때문에 노래를 부르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멜바는 발끈 화를 내며 '어떻게 그런 무례한 질문을 할수 있습니까? 잘 아시면서!'라고 대꾸했다. 로우즈는 잠시 침묵하더니 생각을 다시 정리한듯 '제가 잘못 생각했군요. 우리가 모두 좋아하는 것은 파워지요. 안 그래요?'라고 말했다. 파워(Power)는 권력이란 뜻도 있지만 세상에서 명예를 얻고 성공하는 능력을 말한

다.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큰 돈을 벌어 '아프리카 제국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세실 존 로우즈 

 

인터뷰 사절

멜바는 신문기자와의 인터뷰를 극히 싫어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만해도 무슨 인터뷰를 하면 신문에는 엉뚱한 글이 실려 곤혹을 치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때, 멜바가 배를 타고 호주를 방문하는 길에 어떤 기자도 동승하였다. 그 기자는 멜바에게 만일 인터뷰에 응하여 주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기사를 쓰겠으니 그리 알라면서 일종의 협박을 하였다. 그 기자가 몇번이나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지 멜바는 '마음대로 하시오. 엉터리 기사를 쓰던지 말던지!'라고 소리쳤다. 멜바는 기자를 어떻게 다룰지를 알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멜바는 미국에서 기차를 타고 위치타로 가는 중에 중간 역에서 잠시 내려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만한 신문사의 기자라는 웬 여자가 나타나서 멜바에게 이것 저것 질문을 하며 기사꺼리를 찾았다. 멜바는 여기자가 질문을 할때마다 재주껏 모호하게 대답하여서 도무지 기사꺼리가 될만한 얘기를 제공하지 않았다. 마침내 여기자는 '여행하시지 않을 때는 주로 어디서 지내십니까?'라고 질문하였다. 말하자면 뉴욕의 호텔이냐 파리의 별장이냐 그렇지 않으면 런던의 주택이냐를 물었던 것이다. 멜바는 '어디긴 어디예요, 집에서 살지요.'라면서 얼른 기차를 탔다. 다음날 그 신문에는 멜바에 대한 아무런 기사도 실리지 않았다.

 

루치아 역할의 멜바 

 

멜바가 동점을 만들다

멜바가 아직 무명 시절에 호주에서 어떤 오페라에 출연코자 오디션을 본 일이 있다. 심사위원은 오페라 흥행가인 러스콤 시어렐(Luscombe Searelle)이라는 사람이었다. 시어렐은 멜바에게 '소리는 좋은데 음악성이 없어서 곤란해. 공부를 더 해야 하겠어!'라고 말했다. 멜바는 오디션에 합격하지 못했다. 그후 멜바는 파리에 가서 유명한 성악교사인 마르케시, 작곡가인 구노 등과 함께 지내면서 그야말로 음성을 갈고 닦았다. 멜바는 정상의 성악가가 되었다. 하지만 호주의 그 오디션은 잊을수 없었다. 몇년후 멜바가 런던의 사보이 호텔의 로비에 있는데 우연히 시어렐의 모습을 보았다. 멜바는 얼른 달려가서 '저, 제 이름은 멜바인데요, 저는 선생님이 멜보른 오디션에서 음악성이 없다고 떨어트린 사람입니다. 그때 저보고 더 배우라고 말씀하셨지요'라고 말했다. 시어렐은 눈 앞의 바로 이 여자가 저 유명한 넬리 멜바인 것을 알아보고 크게 당황하였다. 말을 마친 멜바는 크게 웃으면서 보란 듯이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결국 멜바가 한 펀치 먹여서 시어렐과의 시합을 동점으로 만들었다.


시카고의 신문팔이 소년

어떤 추운 겨울, 멜바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 시카고 유니온 스테이션의 플랫폼에서 어떤 소년이 옷도 따듯하게 입지 못한채 신문을 팔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안스럽게 생각했다. 멜바는 소년에게 '여기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는거냐?'라고 물었다. 소년은 '신문이 다 팔릴 때까지요'라고 대답했다. 멜바는 '그래? 그럼 내가 이 신문을 다 사주지!'라고 말했다. 소년은 멜바를 한참 쳐다보더니 딱하다는 듯이 '그런데 아줌마는 그럴 돈이나 있어요?'라고 물었다. 멜바의 모습이 그토록 빈티나게 보였던가?

 

디바 설득하기

맨하탄에 새로운 극장을 오픈한 오스카 햄머슈타인은 멜바가 와서 노래를 부르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멜바는 머나먼 미국에 갈 형편이 못되었다. 코벤트 가든은 멜바를 꼭 붙잡고 있었으며 파리는 파리대로 언제든지 멜바가 오면 대환영이라며 구구절절이 멜바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었다. 멜바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어쩌다가 런던을 떠나 여행을 가는 것이라고는 고향인 호주에 가는 것 뿐이었다. 그러한 처지에 미국행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멜바는 이미 뉴욕을 방문하여 메트에서 여러번 공연을 한 일도 있었다. 햄머슈타인은 멜바를 초청하기 위해 수십번 전보를 보내고 편지도 보내며 어떤 때는 사람을 보내어 설득해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햄머슈타인은 출연료로 대폭 올려서 멜바를 초청한 작전을 세웠다. 그래서 어느날 파리에서 멜바를 직접 만나 하루 저녁 연주에 1천5백 프랑, 2천 프랑, 급기야 3천 프랑까지 주겠다고 제안했다. 3천 프랑이면 당시로서 대단한 액수였다. 더구나 햄머슈타인의 조건은 멜바가 라 트라비아타의 아리아를 한번 부르고 그 다음에는 내키지 않으면 안 불러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멜바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햄머슈타인은 주머니에서 1천 프랑짜리 지폐 한묶음을 꺼내어 멜바의 머리 위로 던진후 아무 말도 없이 인사를 하고 방을 나왔다. 멜바의 머리 위에서 지폐가 비오듯 떨어져 내렸다. 다음날 멜바는 햄머슈타인과 계약을 맺었다. 역시 돈 앞에는 장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오스카 햄머슈타인 

 

이베트의 반격

오를레앙공인 루이 필립은 혁명 이후 새로 들어선 왕정제에서 부르봉 왕조의 후계자라고 주장한 사람이다. 잘 아는대로 마리 앙뚜아네트의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국왕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여러명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오를레앙공인 루이 필립은 가장 그럴듯했다. 그런 루이 필립이 멜바와 상당기간동안 연인 관계에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이도 차이가 있었다. 멜바가 더 연상이었다. 멜바는 아직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오래전에 호주에서 결혼한 남편과는 별거 중이지만 그렇다고 이혼한 것은 아니었다. 멜바는 영국교회(성공회)였지만 루이 필립은 독실한 가톨릭이었다. 가톨릭으로서 유부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은 입방아 좋아하는 파리 사교계에서 심심찮은 화제꺼리였다. 얼마후 멜바의 남편이 정식으로 이혼소송을 내자 멜바와 루이 필립의 관계는 공공연한 스캔들로 회자되었다. 몇년후 멜바는 뉴욕에서 어떤 사람이 초청한 점심에 갔더니 캬바레 가수인 이베트 귈베르(Yvette Guilbert)도 초청을 받아 와 있었다. 멜바는 기분이 상했다. 멜바는 노골적으로 '저 여가수(Chanteuse)와 자리를 함께 하라구요?'라면서 조소를 보냈다. 캬바레에서 노래나 부르는 여자와 어떻게 자리를 함께 하느냐는 말투였다. 멜바는 그러면서 '이따가 디저트 먹을 때에 불러서 노래나 한마디 부르라고 하면 딱이겠네요'라고 빈정거렸다. 그러자 이베트 귈베르는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저야 사실 볼품없는 집안 출신이라서 이런 자리에 함께 하기가 어색하긴 합니다. 더구나 마담 멜바께서는 프랑스 왕족이 아니십니까?'라고 대꾸했다. 루이 필립과 멜바와의 스캔들을 꼬집는 말이었다. 이베트 귈베르는 비록 캬바레나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대단히 성실하고 교양있는 인물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렇지만 멜바가 너무 무시하자 한마디 반격을 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이베트 귈베르 기념카드 

 

오스트랄이 누군가?

평소 멜바는 상당히 점잖고 예의바른 여성이었다. 하지만 다른 소프라노들에게는 별로 예의바르지 않았다. 특히 호주 출신의 소프라노라면 무시의 대상이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멜바의 경력이 점점 내리막 길을 걷고 있을 때에 호주 출신의 젊은 플로렌스 오스트랄은 코벤트 가든에 등장하여 영웅적 드라마틱 소프라노로서 놀랄만한 찬사를 받고 있었다. 특히 브륀힐데는 또 하나의 스타의 탄생을 예견해준 것이었다. 멜바는 신인 오스트랄 때문에 기분이 나뻤다. 이름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따 와서 오스트랄이라고 붙인 것도 싫었다. 더구나 오스트랄이 바그너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것이 속이 상했다. 천하의 멜바도 바그너를 무척 사랑하지만 아직 도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멜바는 되도록이면 오스트랄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역시 젊은 여인과 함께 있게 되면 꿇리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갈라 콘서트에 출연하였는데 오스트랄도 출연하였다. 멜바는 라 보엠에소 '내 이름은 미미'를 불렀고 오스트랄은 아이다의 아리아를 불렀다. 멜바는 미미처럼 의상을 입었고 오스트랄은 흑인 아이다처럼 분장을 하였다. 다음날 아침 멜바는 코벤트 가든 지배인을 만나기 위해 극장에 들어섰다. 마침 오스트랄이 지배인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멜바는 그렇다고 되돌아서 갈수는 없었다. 멜바가 다가서자 지배인은 '마담, 마침 오시는 군요. 여기 있는 사람은 플로렌스 오스트랄입니다. 어제 저녁의 연주회에서 이미 만나셨겠지만...'이라면서 소개했다. 그러자 멜바는 '누구요? 오스트랄이라구요? 그게 누구죠?'라고 말했다. 지배인이 '아니, 어제 저녁에 함께 무대에 섰었는데요...'라고 말하자 '아, 그땐 흑인인줄 알았는데!'라고 말했다. 이처럼 멜바는 라이발에 대하여 관대하지 못했다. 그것이 멜바의 특징이기도 했다.

 

플로렌스 오스트랄 

 

멜바의 능력

어떤 호주의 유명 인사 부인이 자기 집에서 여러 부인들과 함께 멜바를 초청한 리셉션을 열었다. 그 부인은 사람들에게 '마담 멜바는 참으로 대단한 분이예요. 멜바는 나를 마치 내 집에 있는 것처럼 편하게 해 주었어요'라고 말했다. 멜바의 성격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였다.

 

멜바와 아버지

멜바의 아버지는 성격이 솔직하고 고집스럽기로 알아주는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23세의 젊은 나이에 단신으로 호주에 와서 건설업에 뛰어들어 정착한 인물이다. 멜바의 아버지인 데이빗 미첼(David Mitchell)은 멜바가 성공한 후에도 한번도 멜바의 연주회에 참석한 일이 없다. 그러다가 멜바가 고향순회공연을 하게 되자 억지로나마 연주회에 참석하였다. 멜바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어떠세요. 연주회 잘 보셨어요? 즐거웠어요?'라고 물어보았다. 미첼씨는 I dinna like yr hat(아이 디나 라이크 이르 햇)이라고 한마디 했다. '무슨 모자를 그런 것을 써느냐? 난 영 맘에 안든다!'는 말이었다. 역시 노래에는 관심이 없었다.

 

밴드마스터와 멜바

멜바는 멜보른에 있는 어떤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그곳 댄스밴드의 연주에 푹 빠졌다. 멜바는 자기 별장에서 파티를 열 때에 이 댄스밴드를 데려다가 연주토록 할 생각이 들었다. 며칠후 멜바는 계약을 하기 위해 밴드마스터를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둘 다 스코틀랜드에서 호주에 이민온 사람들의 후손인 것을 알고 고향사람을 만난듯 반가워했다. 그건 그렇고 멜바는 하루 저녁 파티에서 연주하면 사례비를 얼마나 주면 되느냐고 물었다. 밴드마스터는 엄청난 금액을 제시했다. 멜바는 어이가 없어서 '아니 이런 액수면 내가 풀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1주일 내내 연주하는 금액과 같은데 말이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밴드마스터는

'마담, 제가요. 멜보른에서 연주회를 갖는다면 소프라노 한 사람당 1 기니씩 출연료를 주고 50명을 언제라도 동원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제가 마담 멜바를 초청한다면 마담에게 1천 기니를 드리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멜바는 즉석에서 밴드마스터가 요구하는대로 출연료를 주기로 합의했다.

 

멜바가 앙코르를 부르다

어느때 멜바가 호주 순회공연을 할 때에 휴양지로 유명한 발라라트(Ballarat)에서 연주회를 가진 일이 있다. 이날따라 멜바는 최고의 음악을 선사해 주었다. 연주회가 끝나자 청중들은 '멜바! 멜바!'를 연호하며 그가 묵고 있는 호텔까지 행진하였고 호텔 밖에서 계속 '우린 멜바를 원합니다!'(We want Melba!)를 소리쳤다. 무슨 일인지 모르고 지나가던 행인들도 '우린 멜바를 원합니다'에 참가하여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하지만 멜바는 대체로 호텔 창문을 열고 발코니에 나와서 앙코르를 부르는 경우가 없었다. 마침 그날, 멜바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호주원주민 문제 대책회의가 열려 많은 기자들도 참석하였다. 하루의 회의를 마친 기자들은 술한잔으로 기분을 풀며 느긋하게 쉬고 있는데 밖에서 '우린 멜바를 원합니다'라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리자 그중 어떤 기자가 은근히 장난끼가 발동하였다. 그 기자는 마침 2층의 멜바 침실 옆방에 투숙하고 있었다. 그는 멋있는 나이트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큰 수건으로 터번을 두른후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길가에 있던 군중들은 발코니에 나타난 사람이 멜바인줄 알았다. 사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크게 '멜바'를 연호했다. 기자가 군중들을 향하여 조용히 해 달라는 의미로 두 손을 들어 제스추어를 취하자 군중들은 멜바가 무슨 얘기를 하고 노래를 부를줄 알고 일순 조용히 하였다. 기자는 짐짓 약간의 헛기침을 한후 노래 한곡조를 뽑았다. 간단히 말해서 돼지 멱따는 소리였다. 그리고는 '야, 이놈들아! 다들 집으로 돌아가라! 난 그놈의 잠 좀 자야겠다'라고 소리쳤다. 영어 원문을 소개하면 I wish all you buggers would go home and let me get some bloody sleep!이었다. 군중들은 어리둥절하여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넬리 멜바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