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오페라 성악가 일화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정준극 2011. 2. 1. 20:53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엔리코 카루소

 

'카루소는 왜 그렇게도 위대한가?' 아마 이 질문은 누구나 가질수 있는 가장 평범한 질문인 것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오페라와 연관하여 설명하자면 로시니가 말한대로 '음성' 때문이다. 로시니는 어떤 오페라 성악가든지 첫번째도 음성, 두번째도 음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음성이 힘이 있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루소는 그런 요구조건을 충족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훌륭한 음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카루소만이 가장 훌륭한 음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 카루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서는 찾아볼수 없는 매력적이 음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점이 그렇게도 매력적이라는 말인가? 테너라고 하면 바로 이런 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카루소가 유명해진데에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시대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카루소가 활동하던 시기는 바야흐로 축음기가 세차게 보급되고 있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카루소의 음성을 극장에 가지 않고서도 안방에서 들을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당시는 오페라가 사회생활과 문화의 척도가 되다시피하던 시대였다. 오페라는 모든 문화예술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장르였다. 그리고 베르디, 푸치니와 같은 위대한 작곡가들이 무수한 걸작들을 쏟아 내었던 시대였다. 그 모든 것이 협력하여 카루소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카루소의 음악활동에 대하여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에 대한 다만 몇가지 에피소드만을 소개코자 한다.

 

레오카발로의 팔리아치 중에서 카니오 역을 맡은 카루소. 인생은 어차피 광대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푸치니가 키루소를 직접 오디션하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푸치니의 대표작인 '라 보엠'은 처음부터 순식간에 대성공을 거둔 작품은 아니다. 1896년 이탈리아의 토리노(튜린)에서의 초연은 비록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라는 거장이 지휘를 맡았지만 끔찍할 정도의 실패였다. 출연진에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출연진이었다. 하지만 두번째, 세번째 공연으로부터 '라 보엠'의 진면목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여 대중들로부터 대인기를 차지하게 되었다. 만일 푸치니가 초연의 실패에 낙심하여 악보를 책상설합 속에 넣어 두었다면 아마 푸치니의 '라 보엠'은 얼마후 나온 레온카발로의 '라 보엠'의 그늘에 가려서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푸치니의 '라 보엠'이 초연의 실패를 딛고서 재기할 즈음에 젊은 카루소가 등장하였다. 청년 카루소는 이탈리아 지방의 이름없는 극장에서 여러번 오페라에 출연한바 있다. 그러다가 루카(Lucca)에서 멀지 않은 리보르노(Livorno)의 골도니 극장에서 '라 보엠'의 로돌포를 캐스팅하는데 응모하였다. 루카는 푸치니의 고향 마을이다. 리보르노는 푸치니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곳에서 '라 보엠'을 공연한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었다. 오디션에는 푸치니의 악보 출판가인 줄리오 리코르디(Giulio Ricordi)가 참석했다. 로돌포로서 카루소가 선택되었다. 하지만 리코르디는 이 무명의 젊은 테너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았다. 경험이 없다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한가지 방법이 있었다. 푸치니의 앞에서 직접 노래를 불러보고 푸치니의 오케이를 받으면 최종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카루소는 푸치니의 앞에서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nina)을 부르게 되었다. 노래를 듣고난 푸치니는 '누가 이 사람을 나에게 보냈는가? 하나님인가?'라고 소리쳤다. 리보르노의 '라 보엠'은 대성공이었다. 이후 나폴리의 산 카를로, 로마의 코스탄치, 밀라노의 라 스칼라가 카루소를 서로 초빙하기 위해 난리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카루소는 최고의 테너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리보르노의 골도니(Goldoni) 극장. 카루소가 '라 보엠'의 로돌포를 맡아 유명해지기 시작한 곳이다.

 

교황과 카루소

어느 때 카루소의 코치이며 최초의 열렬한 팬인 빈센토 롬바르디는 지휘자 레오폴도 무뇨네(Leopoldo Mugnone)에게 카루소가 대성하여 세계 최고의 유명한 테너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롬바르디는 '지금은 무명에 가깝지만 머지 않아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테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무뇨네는 가당치도 않은 말이라는 듯 '내가 교황이 되면 그렇게 될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대꾸했다. 지휘자 무뇨네가 교황이 된다는 것은 꿈에라도 있을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대응해 주었던 것이다. 얼마후 카루소는 마스카니의 이리스(Iris)에서 오사카(Osaka)로서 로마 데뷔를 하였다. 대단한 공연이었다. 카루소의 음성은 열정에 넘쳐 있었으며 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빛을 발하였다. 카루소로서는 하이 B 플랫은 별것도 아니었다. 오사카의 아리아에는 하이 A 와 하이 G가 주름을 잡듯 들어 있었지만 그건 불편한 것도 아니었다. 카루소는 오사카로서 상당한 출연료를 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갈채와 신문의 찬사를 받았다. 그런데 바로 무뇨네가 이리스를 지휘하였다. 공연이 끝난후 롬바르디는 무뇨네를 찾아가 그의 발 아래 엎드려 꿇어 앉아서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무뇨네가 놀라서 '아니, 왜 이러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롬바르디는 '아니, 이제 당신은 교황이 되었사오니 소생이 인사를 올림은 당연한 일이 올시다'라고 말했다.

 

오폴도 무뇨네가 지휘하는 모습을 그린 삽화. 무뇨네는 1890년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초연을 지휘했으며 1900년에는 푸치니의 '토스카'의 초연을 지휘한 유명한 베리스모 오페라의 지휘자 겸 작곡가였다.

 

카루소가 베이스를 노래하다

카루소는 1913년 메트(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필라델피아 공연에서 '라 보엠'의 로돌포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콜리네 역을 맡은 스페인 출신의 베이스 안드레아스 데 세구롤라(Andreas de Segurola)가 무대에서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도무지 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세구롤라는 마치 개가 짓듯 억지로 소리를 내며 겨우 4막까지 오게 되었다. 문제는 4막에 나오는 유명한 '외투의 아리아'(Vecchia zimmara)였다. 그 때쯤하여 세구롤라는 옆사람과 말도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목소리가 쇠약해 있었다. 카루소는 동료인 세구롤라의 눈빛에서 극도의 공포감을 읽자 세구롤라에게 다가가서 짐짓 그를 껴안으며 무대의 배경을 향하도록 몸을 돌이킨후 세구롤라의 아리아를 대신 불렀다. 테너가 베이스를 노래했던 것이다. 청중들은 세구롤라가 아리아를 부르는줄 알았다. 이 사실은 아무도 몰랐고 지휘자만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외투의 아리아'는 짧은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카루소의 음성은 놀랄만큼 아름답고 장엄했었다. 세구롤라는 카루소의 기지에 넘친 도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지냈다. 카루소의 또 다른 베이스-바리톤 노래를 듣고 싶으면 카루소가 취입한 Over There(오버 데어)를 구해서 들어보면 된다. '오버 데어'는 1차 대전중 미군의 군가이다.

 

스페인 출신의 베이스 안드레아스 데 세구롤라


엔리코 카루소는 48세라는 짧다면 짧은 생애를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무대를 잊지 못하였다. 그의 이같은 열정은 무대를 사랑하는 많은 후배들에게 커다란 귀감이 되었다. 엔리코 카루소는 1921년 8월 2일 나폴리의 베스비오 호텔(현재의 그랜드 베스비우스 호텔)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러가지 질병이 복합되어서 더 이상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엔리코 카루소를 위한 영결미사는 나폴리의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San Francesco di Paola)교회에서 거행되었으며 인근의 산타 마리아 델 피안토(S Maria Del Pianto)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델 피안토 공동묘지의 카루소 묘소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는 음악인들의 성지가 되어 있다.

 

1920년 9월 16일, 카루소는 빅터 레코드의 취입을 위해 뉴저지 주의 캠든(Camden)에 있는 트리니티교회에 모습을 들어내보였다. 마지막 레코드 취입이었다. 카루소는 로시니의 '작은 장엄 미사곡'(Petite Messe Solennelle)중에서 도미네 데우스(Domine Deus)와 십자가 고난(Crucifixus) 등을 녹음하였다. 카루소의 부인인 도로시는 카루소의 건강이 그해 가을부터 급격히 약화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카루소와 도로시는 북미 여러 도시들을 순회하는 공연을 위해 여행중이었다. 카루소는 기관지염으로 보이는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직전에는 대단히 악화되어 있어서 심지어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카루소의 주치의인 필립 호로비츠는 무대에 나서는 것을 삼가하라고 당부했다. 호로비츠는 카루소와 함께 여행하면서 카루소가 편두통 증세를 보이면 치료를 해주곤 하였다. 어느날 카루소가 가슴에 통증을 호소하자 주치의는 늑간 신경통으로 진단하고 이후로부터는 절대로 무대에 서지 말것을 말하였다. 카루소는 가름의 통증으로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였으며 움직이는 일도 힘들어 했다.

 

피아노 앞에서의 카루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루소는 계약을 맺은 대로 1920년 12월 11일 뉴욕의 브루클린음악원에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을 공연하였다. 1막이 겨우 끝나자 마자 카루소는 목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공연을 취소할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사건이 있은후 카루소는 메트에서 세 차례나 더 출연했지만 이미 예전과 같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의 마지막 출연은 192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알레비의 '유태여인'에서 엘레아자르(Eleazar)를 맡은 것이었다. 이날 유태여인 역은 호주 출신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인 에벌린 스카트니(Everlyn Scotney)였다. 스카트니는 과거에 여러번 카루소와 공연한바 있다. 카루소의 건강상태는 새해를 접어들어 더 심각해졌다. 의사들은 카루소가 화농성 늑막염과 폐축농증에 걸렸다고 진단했다. 카루소는 폐와 가슴에 모여 있는 액체를 뽑아내기 위해 몇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했고 계속되는 통증에 시달려야 했다. 카루소는 갈비뼈 중에서 한개를 제거받는 등 가장 어려운 수술을 받은 후에 요양을 위해 추운 뉴욕을 떠나 고향인 나폴리로 갔다.

 

알레비의 '유태여인'에서 엘레아자르 역을 맡은 카루소. 카루소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카루소는 나폴리에서 조금 회복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얼마후 나폴리의 어떤 의사가 카루소를 비위생적으로 치료하는 바람에 세균에 감염되어 카루소의 상태는 대단히 위독하게 되었다. 로마에 있는 유명한 의사 형제인 바스티아넬리는 카루소에게 부신(副腎)을 제거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하였다. 카루소는 로마로 가서 수술을 받기로 결심하고 집을 떠나 나폴리의 베수비오 호텔에서 하루를 묶게 되었다. 호텔에 투숙한 카루소는 너무나 통증이 심하여 응급의료팀을 불러야 했으며 모르핀을 맞고 겨우 잠에 들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영원히 잠이 들어 깨어나지 못할 줄을 몰랐다. 그때가 1921년 8월 1일이었다.

 

나폴리만을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는 베스비오 호텔(베스비우스 그랜드 호텔). 카루소가 서거한 장소이다.

 

카루소는 다음날인 8월 2일 아침 9시경에 호텔에서 숨을 거두었다. 급히 나폴리에 당도한 로마의 바스티아넬리 형제는 카루소의 사망 원인을 부신의 농양으로 인한 복막염이라고 진단했다. 카루소의 장례식은 나폴리의 왕실 전속의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수천명의 인사들이 참석한 장례식에는 이탈리아 국왕인 빅토르 엠마누엘2세가 직접 참석하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하였다. 카루소의 시신은 향유로 처리하여 유리관에 넣어 산타 마리아 델 피안토 공동묘지에 놓여져 8년동안 일반사람들이 카루소의 모습을 볼수 있게 하였다. 카루소의 미망인인 도로시는 1929년에 유리관을 영구히 밀봉하여 아름답게 장식한 석묘에 안치하였다.

 

나폴리의 델 피안토 공동묘지에 있는 엔리코 카루소의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