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메조소프라노

루이스 커크비 런(Louise Kirkby Lunn)

정준극 2010. 11. 5. 07:52

루이스 커크비 런(Louise Kirkby Lunn)

 

오페라의 황금시기에 활동했던 루이스 커크비 런(1873-1930)은 메조소프라노이지만 간혹 콘트랄토로 분류되는 영국의 위대한 성악가이다. 커크비 런은 고향인 만체스터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그후 런던의 왕립음악대학(Royal College of Music)에서 오페라 수업을 받았다. 오페라에 처음 모습을 보인 것은 1893년 드러리 레인극장에서 가진 왕립음악대학 오페라에서였다. 슈만의 제노베바(Genoveva)에서 마르가레트를 맡았다. 1년후 황태자극장(Prince of Wales Theater)에서 들리브의 Le roi l'a dit(왕께서 말씀하셨다)에서 몽꽁뚜르 후작부인을 맡아 일반에게 처음 모습을 선보였다. 커크비 런은 파리에 가서 당대의 성악교사인 자크 부이(Jacques Bouhy)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영국 출신의 메조소프라노 루이스 커크비 런 

 

1895년 커크비 런은 헨리 우드(Henry Wood)가 지휘한 프로메네이드 콘서트의 첫 시즌에 출연하였다. 코벤트 가든의 음악지배인인 오거스트 해리스는 커크비 런의 노래를 듣자마자 5년 계약을 맺었다. 이후 그는 코벤트 가든에서 수많은 역할들을 맡기 시작했다. 주로 단역이었다. 해리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5년 계약은 흐지부지 되었다. 커크비 런은 칼 로사 오페라단(Carl Rosa Opera Co)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본격적으로 오페라의 주역을 맡기 시작했다. 카르멘, 오르트루트(로엔그린), 미뇽 등이었다. 바그너의 오페라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898년 런던의 여왕홀(Queen's Hall)에서 '라인의 황금'의 라인처녀 역할을 맡고부터였다. 커크비 런은 칼 로사오페라단에 1899년까지 머물렀다. 이때에 W.J. Pearson과 결혼하였다.

 

루이스 커크비 런의 쿤드리

 

1900-14년은 커크비 런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였다. 초기에는 주로 여왕홀에서 여러분야에 걸친 연주활동을 했다. 유명한 소프라노인 릴리안 블라우벨트(Lillian Blauvelt)와 함께 공연한 것도 이때였다. 길버트-설리반의 뮤지컬 노래도 불렀다. 이 기간동안 커크비 런은 코벤트 가든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였다. 그런 중에도 1902-03, 06-08, 12-14년 시즌에는 메트에 특별출연하기도 했다. 커크비 런은 바그너에서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특히 프리카, 브랑게네, 에르다, 오르트루트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소프라노가 있으면 메조나 콘트랄토도 있어야 한다. 커크비 런은 그런 역할을 충분히 맡아 주었다. 그는 뉴욕에나 보스턴에서 바그너로서 명성을 떨쳤지만 사실상 그의 첫 미국 데뷔는 아이다에서 암네리스였다. 그는 오페라 아이다를 통하여 만난 체코 출신의 소프라노 에미 데스틴(Emmy Destin)과 오랜 우정을 다졌다. 커크비 런은 생-생의 델릴라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마스네의 '헬렌과 헤로디아드', 글룩의 '아르미데', 차이코브스키의 '유진 오네긴'의 영국 초연(코벤트 가든)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글룩의 오르페오를 처음 노래한 것은 1905년이었다. 그가 부른 Che faro?는 영국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아리아로 꼽히고 있다.

 

루이스 커크비 런의 델릴라

 

커크비 런는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럽 전역에서 오라토리오 연주자로서 유명했다. 멀리 부다페스트까지 가서 오라토리오를 연주했다. 1912년 호주 순회연주 때에는 메트 테너 존 매코맥(John McCormack)과 듀엣 음반을 취입했다. 커크비 런은 여러 음반을 취입하여 남겼지만 존 매코맥과의 취입은 가장 많은 인기를 끈 것이었다. 마지막 오페라 출연은 1922년 코벤트 가든에서 파르치팔의 쿤드리였다. 이후 그는 콘서트 또는 리사이틀에 간혹 모습을 보였다. 마리 브레마(Marie Brema)가 오르페오로서 데뷔하던 때였다. 커크비 런은 1930년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커크비 런는 4개국어를 능통하게 마스터했지만 재미있게도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에는 항상 만체스터 사투리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