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수도원/순례교회

마리아첼 순례지 - 슈티리아주

정준극 2010. 11. 14. 17:48

마리아첼(Mariazell) 순례지 - 슈티리아(Styria)주

오스트리아 제일의 순례지

 

마리아첼 순례교회.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온다. 마리아첼은 스키와 같은 겨울 스포츠로서 유명하다.

 

마리아첼은 글자그대로라면 성모 마리아를 모신 작은 방이라는 뜻이지만 슈티리아주의 작은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마이라첼은 오스트리아의 겨울 스포츠 장소로서 유명하다. 그러나 실상은 순례교회와 수도원 등으로 더 유명하다. 마리아첼 마을은 그라츠에서 북쪽으로 143km 떨어진 곳의 잘차(Salza) 계곡에 있으며 슈티리안 알프스와 함께 그림과 같은 경치를 자랑한다. 게다가 인근에는 아름다운 에어라우프제(Erlaufsee)가 있어서 더욱 그림처럼 아름답다. 마리아첼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순례지일 뿐만 아니라 동유럽 지역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순례지로 알려진 장소이다. 그래서 해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특히 린덴나무에 새겨진 성모상이 기적을 행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린덴 성모상은 1157년에 이곳으로 가져와 작은 목조예배처에 안치하였던 것으로 지금은 순례교회 안의 채플에 화려한 장식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마리아첼 순례교회는 헝거리왕 루이1세가 1644년 그 자리에 있던 작은 목조 예배처를 확장하여 건립한 것이다. 원래의 예배처는 1363년 터키의 침공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건설했다.

  

마리아첼 순례교회의 성모상

 

오늘날의 마리아첼이 자리 잡고 있는 지역은 기원전에 켈트족들이 정착하였다가 1세기때에 로마제국이 소금을 운반하기 위해 길을 놓는 바람에 점차 외부와 연결되기 시작한 곳이다. 그후 주후 600년경에는 슬라브족들이 들어와 통치하다가 11세기부터 오스트마르크(현재의 오스트리아) 군주가 다스리기 시작했다. 1025년 오스트리아의 군주인 콘라트2세는 자기의 처제인 베이트릭스에게 현재의 마리아첼이 속한 슈티리아 지방의 일부를 선물로 주었다. 그러자 교회와 주민들 사이에서 그럴수가 없다는 논쟁이 무려 1년이나 끌었다. 교황도 마리아첼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그 영토는 교회에 속해야 하며 개인의 소유가 되는 것은 반대한다고 내세웠다.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인 에버하르트는 교황의 편에 서서 1151년 마리아첼 인근 영토를 성람브레헤트(St Lambrecht) 수도원의 소유가 되도록 함이 가하다고 주장하여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다. 교황청이 마리아첼 일대를 교회의 관할로 한다는 칙서를 발행한 12월 21일(1157년)은 마리아첼의 설립일로 간주하여 축제를 벌이고 있다. 그러한 때에 마리아 성화가 등장했다.

  

마리아첼 바질리카(교회)의 고딕식 건물

 

1157년 어느날 수도사인 마누스(Magnus)라는 사람이 오늘날의 마리아첼 마을이 있는 첼러탈(Zellertal)에 오면서 린덴 나무로 만든 성모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첫 목조 예배처를 만들고 성모화를 보관하였다. 이때에 마리아첼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작은 수도사의 예배처에 성모화를 두었다는 의미에서 였다. 그때쯤해서 성모화에 기구를 드리면 병을 고치고 복을 받는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집에서 별로 할일도 없었던 순례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예배처가 너무 좁아서 곤란했다. 새로 고딕 양식의 교회를 지었으니 그때가 1380년쯤 되던 해였다. 기껏 교회를 세워놓았더니 1420년에 터키군이 침공하여 교회를 불태웠다. 잿더미가 된 교회는 약 2백년이나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644년에 베네딕트 수도회에 속한 성람브레헤트 수도원의 원장인 피에린(Pierin)이라는 사람이 팔을 걷어 부치고 교회 재건에 나섰다. 그리하여 남는 것이 시간이어서 공사를 시작한지 130년 남짓 만인1780년에 마침내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교회를 완성하게 되었다.

 

마리아첼 바실리카

 

교회를 건축 중인 1679년에 레오폴드1세 황제가 공사현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시종 중의 한 사람이 마리아첼 마을에 가져오라는 선물은 가져오지 않고 엉뚱하게도 페스트를 가져왔다. 얼마가지 못해서 마을 사람 156명이 페스트로 목숨을 잃었다. 남은 사람들은 더 열심히 기도했다. 그 덕분인지 얼마후 페스트는 스스로 물러났다. 또 다른 시련도 있었다. 계몽 사상에 물들어 있는 요셉2세가 황제가 되면서 전국의 수도원 재정비 정책을 내세웠고 이에 따라 성람브레헤트 수도원은 문을 닫게 되었다. 수입면에 있어서도 무시할수 없었던 순례사업이 막대한 지장을 입었다. 마리아첼 교회와 수도원은 1800년대에 들어가서야 겨우 예전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1827년에는 마리아첼 역사상 가장 큰 화재가 발생했다. 교회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다. 교회와 주민들이 힘들게 재건을 하여 순례교회로서 명색을 이어갔으나 2차 대전중에 또 다시 피해를 입었다. 1945년에는 5천명에 이르는 소련 적군이 주둔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보나마다 적군들의 행패는 뻔했을 것이다. 한편, 1928년에는 마을에서 교회로 올라가는 케이블카(후니쿨라)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 최초의 후니쿨라였다.

 

마리아첼 바실리카의 은사의 예배처

 

1983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황공하게도 방문하였다. 온 마을이 축제분위기였다. 교황을 마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보수작업이 이루어졌다. 주차장도 그때 마련되었다. 1990년에는 동구 여러나라의 해방과 더불어 대대적인 순례가 이루어져 동구 각국에서 2만5천명의 순례자들이 찾아왔었다. 그리고 2004년에는 중앙유럽 가톨릭 데이가 설정되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무려 10만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마리아첼을 순례했다. 2007년은 마리아첼에 성모화의 영묘가 설치된지 85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친히 방문하여 강복했다.

 

산정에서 내려다본 마리아첼 바실리카

 

마리아첼 순례지에는 크라우스 형제교회(Bruder-Kraus-Kirche), 성브룬 카펠레(Hl Brunn Kapelle), 미하엘 카펠레(Michaelskapelle), 지그문트버그 카펠레(Sigmundsberg-Kapelle), 성세바스티안 교회(St Sebastian Kirche) 등 순례의 명소들이 산재하여 있다.

 

   

크라우스 형제 교회                     성브룬 카펠레                           미하엘 카펠레  

 

지그문트버그 카펠레                   성세바스티안 교회 

 

마리아첼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