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수도원/순례교회

[참고자로] 구르크(Gurk)의 성헴마(St Hemma)

정준극 2010. 11. 20. 18:22

[참고자로] 구르크(Gurk)의 성헴마(St Hemma)

 

구르크의 헴마

 

오스트리아 또는 슬로베니아 일부 지역의 가톨릭 신자로서 성헴마(또는 성엠마)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말이 안된다. 반드시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오스트리아의 카린티아 사람으로서 성헴마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곤란한 일이다. 성헴마는 오스트리아 카린티아주 구르크(Gurk) 출신의 성녀로서 구르크 대성당을 완성하여 봉헌했으며 구르크수도원을 비롯한 두세곳의 수도원을 설립하였고 나아가 인근에 20여개 교회의 건설을 지원한 대단한 여인이다. 성헴마는 평소 자선활동에 힘을 많이 써왔다.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앞장 섰으며 겸손과 봉사를 모토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온 동리 사람들의 모범이 된 훌륭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겸손하였다. 얼마나 겸손했는가 하면 수녀로서 일생을 살기로 결심하고 재산을 털어서 수녀원을 설립하였지만 수녀원장은 커녕 경리과장도 맡지 않고 오직 평수녀로서만 근검하게 생활했던 것을 보면 잘 알수 있다. 아무튼 그런 저런 이유로 성헴마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성녀 중의 하나로서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 특히 성헴마는 지체 높은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모든 부귀와 영화를 초개같이 버리고 오로지 주님의 제단을 위해서만 헌신봉사하였으므로 더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헴마의 아버지는 바벤버그의 하인리히2세(가톨릭에서는 성엔리꼬라고 부름)와 친척간이었다. 하인리히 2세는 야소미어고트(Jasomirgott)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신앙심이 돈독한 군주였다. 헴마는 오늘날 카린티아(캐른텐)의 구르크 일대와 슬로베니아 북부지방인 프리자흐 등의 영주인 빌헬름과 결혼하였다. 빌헬름은 카린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여러 곳에 많은 영지를 소유한 권세있는 귀족이었다. 헴마는 남편 빌헬름이 세상을 떠나고 또한 두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유산을 물려 받게 되었다. 헴마는 그 재산으로 교회를 세우고 수도원을 세웠으며 자선활동을 하였다. 카린티아 지방, 특히 헴마가 태어난 구르크 지역에 헴마를 기념하는 여러 장소가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구르크는 그라츠의 서쪽, 슬로베니아의 류블리아나로부터는 북쪽에 있는 도시이다. 구르크에는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미사때에는 독일어와 슬로베니아어를 함께 사용한다.

 

헴마가 설립한 구르크 대성당. 라파엘 돈너가 제작한 피에타 조각이 있다.

 

헴마 폰 그루크(Hemma von Gurk: 구르크의 헴마)라고 불리는 성헴마는 995년 또는 1000년에 카린티아의 구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성헴마는 카린티아주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 헴마는 비엔나의 하인리히2세(야소미어고트) 궁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늘날 비엔나의 암 호프(Am Hof)에 있는 바벤버그 궁전이다. 성헴마는 두 아들을 낳을 때 기도하는 중에 순산하였으며 한때는 눈병에 걸려 소경이 될 뻔 했지만 기도에 힘써 나음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성헴마는 특히 임산부와 눈병환자의 수호성인으로서 그에게 기구하면 출산할 때에 순산하며 눈병이 있는 사람은 낫게 된다고 한다. 성헴마는 가난한 자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자기의 재산을 아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성헴마는 1045년 구르크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구르크대성당에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그러한 헴마가 성녀로 시성된 것은 교황 비오11세에 의해서였다. 1938년 1월 5일이었다. 헴마가 세상을 떠난지 8백년만의 일이었다. 성헴마의 공경축일은 6월 27일이다. 성헴마의 생일은 6월 29일인데 그날은 성베드로와 성바오로의 축일이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6월 27일로 축일을 정했던 것 같다. 1988년은 성헴마에 대한 성녀 시성 50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그 해의 6월 25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손수 구르크를 방문하여 성헴마의 영묘를 참배하고 미사를 드렸다. 이날 미사에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독일 등지에서 7만여명의 순례자들이 참석하였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성헴마를 존경하고 있는지는 말 안해도 알수 있는 일이다. 성헴마를 그린 성화에는 헴마가 한 손에 두개의 성탑이 있는 교회를 들고 있으며 다른 한 손에는 문서 또는 장미를 잡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헴마가 들고 있는 교회는 구르크 대성당을 의미하며 문서는 그의 신앙고백을 기록한 것이고 장미는 성모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을 뜻한다.

 

성헴마와 남편 빌헬름, 구르크 대성당을 그린 성화. 헴마는 한손으로 구르크 대성당을 받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책을 쥐고 있다.

 

헴마와 결혼한 빌헬름은 당시 구르크, 프리자흐(Friesach), 잔탈(Sanntal)의 영주였다. 구르크와 프리자흐는 현재 오스트리아의 카린티아주에 속한 지역이며 잔탈은 슬로베니아의 지역이다. 빌헬름은 바벤버그의 콘라트2세의 충성된 가신이었다. 빌헬름은 카린티아, 오베르 슈타이어마르크, 운터 슈타이어마르크, 현재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나 등에 상당히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헴마는 남편 빌헬름이 세상을 떠나자 모든 영지를 물려 받아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중의 하나가 되었다. 헴마는 수도원을 두개를 설립코자 했다. 첫번째는 엔스탈(Ennstal)에 설립하는 것으로 잘츠부르크 대주교와는 이미 합의를 보았다. 아드몬트 수도원이다. 하지만 실제로 아드몬트 수도원이 오픈된 것은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합의한 때로부터 30년 후였고 그것도 잘츠부르크 대주교 단독의 명의로였다. 그래서 헴마는 스스로 수도원을 세우기로 했다.


성헴마가 세운 구르크 대성당의피에타(Pieta). 라파엘 돈너의 작품이다. 다른 피에타와는 달리 천사가 성모를 위로하고 있다.

                        

1043년 구르크 대성당 옆에 세운 수녀원이 그것이었다. 주로 귀족 부인들 중에서 수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로 구성하였다. 헴마 자신도 평수녀가 되어 모든 신분을 버리고 검은 수녀복을 입은 수녀로 봉사했다. 헴마는 이어서 구르크 수도원에 소속되는 교회들을 건축하였다. 그리하여 아홉개의 교회를 건축하였으니 즉 구르크 대성당, 그라펜도르프 바이 프리자흐(Grafendorf bei Friesach), 리딩(Lieding)교회, 글뢰드니츠(Gloednitz)교회, 잔크트 라데군트 암 호엔펠트(Sankt Radegunnd am Hohenfeld)교회, 로렌첸버그 바이 미헬도르프(Lorenzenberg bei Micheldorf) 교회, 잔크트 게오르겐 암 봐인버그(Sankt Georgen am Weinberg) 교회, 잔크트 마르가레텐 바이 퇼러버그(Sankt Margarethen bei Tollerberg) 교회, 봐이젠버그 부근의 잔크트 람베르트 아우프 뎀 람프레헤츠코겔(Sankt Lambert auf dem Lamprechtskogel) 교회이다. 뿐만아니라 헴마가 재정지원하여 세운 교회도 여러 군데가 있다. 예를 들면 피스베그(Pisweg)교회, 슈트라쓰부르크의 잔크트 게오르겐 교회, 하르트의 크라쓰니츠(Krassnitz)교회와 잔크트 페터-파울 교회, 뷔팅(Wieting)교회 등이다. 기록에 의하면 카린티아에서 헴마가 재정지원한 교회는 모두 20곳이나 된다고 한다. 헴마가 교회 건축을 위해 전체적으로 지원한 금액은 놀랄만한 액수였다.

 

헴마의 남편인 빌헬름이 영주로 있었던 프리자흐. 성채와 교회

 

여기서 잠시 헴마의 남편 빌헬름과 두 아들이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언급코자 한다. 두 아들은 집안 소유의 광산에서 광부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를 말리러 갔다가 살해되었다. 실의에 빠진 아버지 빌헬름은 죽기 전에 로마로 성지순례나 갔다 오겠다고 하며 집을 떠났다. 빌헬름은 로마를 방문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심신이 지쳐서 니더외스터라이히주를 지날 때에 객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니더외스터라이히의 그래베른(Graebern: 묘지)이라는 이름의 마을은 빌헬름이 세상을 떠난 곳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으로 그의 묘소가 있다. 헴마가 구르크에 대성당과 수녀원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은 남편과 두 아들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낸 직후였다.  

 

구르크 대성당에 있는 성헴마 찬미화. 헴마를 신격화한 내용의 작품

 

구르크 대성당을 지을 때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어떤 건축장이가 헴마에게 임금이 적다고 불평하며 더 달라고 요청했다. 헴마는 성당 건축에 참여하는 모든 공사인부들에 대한 임금을 직접 지불했었다. 건축장이의 요청을 들은 헴마는 그를 오라고 하여 돈 주머니를 내어 주며 여기서 가지고 싶은 만큼 가져가라고 말했다. 건축장이는 전대 안에 있는 돈을 다 가지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수 없어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넉넉하다고 할 만큼의 돈을 꺼내어 가졌다. 그러자 건축장이가 손에 쥐었던 돈이 어느 틈엔가 사라졌다. 건축장이는 욕심을 부린 것을 크게 뉘우치고 더욱 열심히 교회 건축에 매진하였다고 한다. 이 얘기를 전해 들은 하인리히2세의 부인인 쿠니군데(Kunigunde)는 밤베르그 대성당을 지을 때에 헴마가 행한 대로 전대를 열어 놓고 건축장이들이 필요한만큼 임금을 가져가도록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밤베르그 대성당의 건축은 계획보다 일찍, 또한 예상된 경비로 완성할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헴마는 구르크 대성당을 지을 때에 건축자재들을 황소가 이끄는 수레에 싣고 옮기도록 했는데 이는 사무엘상 6장에 나오는 말씀을 따르고자 함이었다.

 

구르크 대성당과 뒤편의 수녀원

 

헴마는 1045년에 구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혹자는 1043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정확치는 않다. 헴마의 시신은 처음에는 구르크 대성당의 납골당에 안치되었으나 1287년 교회 내에 별도의 영묘를 마련하고 만인이 추모토록 하였다. 대리석 조각들이 깊은 인상을 주는 대단히 아름다우면서도 숙연함을 안겨주는 영묘이다. 1359년에는 교황이 주재하던 아비뇽에서 20명의 주교들이 구르크까지 와서 40일간 먹고 자면서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와 헴마를 위한 미사를 드렸다. 가톨릭 역사에서 교황청이 보낸 주교들이 이만한 규모로 개인을 위해 미사를 드린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어 교황청은 14세기에 헴마를 위한 찬미가들을 만들어 사용케 했으니 이 역시 대단한 사연이 아닐수 없다. 오늘날 각처에서 헴마의 영묘를 참배하기 위해 찾아오는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구르크 대성당에 있는 성헴마의 영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