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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어텔의 성쇠

정준극 2010. 12. 22. 23:40

귀어텔(Gürtel)의 성쇠

 

귀어텔은 비엔나의 외곽순환도로이다. 독일어의 귀어텔은 허리띠(벨트)라는 뜻이다. 즉, 허리띠를 맨것처럼 비엔나의 중심부를 둥글게 매고 있는 거리라는 뜻이다. 서울의 남부순환도로나 동부간선도로 또는 워싱턴의 벨트 드라이브를 연상하면 귀어텔이 어떤 길인지 짐작할 것이다. 귀어텔 거리가 처음 조성되었을 때에는 길 양 옆으로 주거건물들(Wohnung)이 늘어서 있어서 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하지만 경제가 발전하자 너도나도 차를 사는 바람에 순환도로인 귀어텔은 자동차의 소음때문에 밤낮으로 고통을 겪는 악몽의 장소가 되었다. 더구나 2차 대전 후부터 귀어텔 거리는 어느덧 비엔나에서도 알아주는 매춘의 거리가 되었다. 밤이면 밤마다 수십명의 매춘부들이 제각기 옷차림을 자랑하며 거리를 나와 서성인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서성인다. 주로 자동차 고객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지만 그냥 걸어가는 행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호객행위도 서슴치 않고 있는 곳으로 전락했다. 그 귀어텔에 대한 이야기이다.

 

귀어르텔과 철도, 그리고 고가도로 위에 지은 현대식 건물

                                                           

비엔나의 도시계획은 간단하다. 가운데 중심지역은 역사적인 제1구 인네레 슈타트이다. 원래 시내 중심지역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성벽 안 만이 비엔나였다. 먼 옛날에는 슈테판성당도 애초에는 성벽 밖에 있었다. 도시가 차츰 팽창하자 성벽을 허물고 대로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링슈트라쎄(반지와 같이 둥근 도로)이다. 시카고의 루프(Loop)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도시는 더욱 팽창하여 밖으로, 밖으로 뻗어나갔다. 지금은 모두 비엔나시에 포함되는 지역이지만 옛날에는 비엔나의 교외였을 뿐이며 이를 포아슈태테(Vorstädte)라고 불렀다. 오늘날 제3구 란트슈트라쎄로부터 제9구 알저그룬트까지가 포아슈태테였다. 포아슈태테에도 링슈트라쎄와 같은 환상도로를 만들었다. 이것이 비너 귀어텔슈트라쎄(Wiener Gürtelstrasse)로서 보통 간단히 귀어텔이라고 부르는 거리이다. 귀어텔 밖으로는 또 다른 환상도로의 구역이 있다. 이를 포아오르트(Vorort), 즉 부속교외(Sub-suburbs)라고 부른다. 교외의 교외인 셈이다. 오늘날의 제10구 화보리텐으로부터 제19구 되블링까지가 이에 속한다. 귀어텔은 크게 서쪽 귀어텔과 남쪽 귀어텔로 구분한다. 서부 귀어텔은 서부역(베스트반호프)을 중심으로하며 남쪽 귀어텔은 남부역(쥐드반호프: 현재는 빈 하우프트반호프)을 중심으로 한다.

 

귀어텔의 탈리아슈트라쎄 근처의 브로텔


귀어텔은 역사적으로 링슈트라쎄와 같은 신분이었다. 링슈트라쎄가 비엔나의 중심지역을 감싸고 있는 성벽이었다면 귀어텔은 비엔나의 교외까지를 보호하는 요새성벽이 있던 곳이다. 말하자면 비엔나의 제2의 방어선이었다. 요새들은 17세기에 레오폴드1세 황제가 완성한 오래된 것이었다. 사실상 요새를 축성한 것은 세금 때문이기도 했다. 다른 지역으로부터 비엔나에 들어오려면 요새의 성문을 통과해야 했다. 당국은 비엔나에 장사를 하기 위해 출입하는 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걷기 위해 요새를 만들고 성문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근세에 들어와서 프란츠 요셉1세 황제가 비엔나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을 허물고 링슈트라쎄를 만들었고 이어 외곽의 요새들을 없애고 귀어텔 거리를 만들었다.

 

귀어텔의 오토 바그너 다리. 오토 바그너가 설계했다.

 

귀어텔은 비엔나 유겐트슈틸(Jugendstill)의 리더라고 하는 오토 바그너(Otto Wagner)가 설계했다. 다리를 만들고 지하도를 만들었으며 전차길을 만들었다. 귀어텔에 전차길이 놓인 것은 1894-98년이었다. 그로부터 귀어텔은 서서히 번잡해지기 시작했다. 1차 대전 이후에 귀어텔 거리에는 사회민주주의 정권이 대규모 주거단지를 건설하였다. 특히 귀어텔의 남쪽에는 1920년대 사회주의의 특성을 지닌 주거건물(보눙)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래서 귀어텔을 '프로레타리아의 링슈트라쎄'라고 불렀다. 링슈트라쎄 주변의 건물들이 귀족들을 위한 것이고 귀어텔 주변의 건물들은 서민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빈정대는 표현이었다. 오늘날에는 지하철 6호선(U6)이 귀어텔의 지하를 달리고 있다.

 

마리아힐르퍼 귀어텔의 밤

 

귀어텔이라고 하면 우선 홍등가, 적선지역, 거리의 매춘부들을 연상하는 거리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나무들이 많고 공원이 많은 쾌적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주거지역으로서 인기를 끌었다. 학교들도 많이 들어섰다. 그러던 것이 1950년대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비엔나의 중산 가정은 모두 자동차를 살만큼 갑자기 생활이 나아졌다. 그러자 6차선의 귀어텔은 자동차의 홍수를 이루었다. 하루종일 자동차 소리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귀어텔은 오스트리아에서 최악의 자동차도로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지하철도 다니게 되었다. 지하철 역이 생기면 자연히 불량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귀어텔에 사는 것은 더이상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귀어텔은 비엔나 최대의 홍등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동구로부터 몰래 들어온 창녀들이 값싼 방을 구하다 보니 귀어텔로 모여들게 되었다는 얘기다. 오늘날 귀어텔 거리에는 양쪽으로 섹스 샵, 스트립 클럽, 러브 여관들이 줄을 잇다 시피 늘어서 있다. 당초 당국은 교통량이 증가하자 고가의 고속도로를 건설코자 했다. 하지만 허구헌날 정치싸움으로 날을 지새는 바람에 고가고속도로 건설계획은 1980년에 들어와서 무산되었다. 한때 시당국은 귀어텔 정화사업을 구상했었다. 그래서 시립공공도서관을 세우고 나이트 클럽들은 오토 바그너 정류장 쪽으로 이주시키는 등 몇가지 노력을 했지만 더 이상 진전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아직도 추운 겨울 밤 초미니 가죽스커트를 입은 창녀들이 거리를 서성이는 일은 아직도 귀어텔의 풍물이 되어 있다. 만일 비엔나에서 방을 구하는데 교통도 좋고 지역도 관찮은데 집세가 생각외로 저렴하면 일단 귀어텔로부터 얼머나 떨어져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에 현관에 붉은 전등을 단 호텔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비엔나의 섹스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