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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플리크 가족

정준극 2010. 12. 27. 22:00

[참고자료] 플리크 가족

Fortune 지가 선정한 세계 100 대 부자의 한 사람

 

플리크(Flick) 가족은 오스트리아의 경제전문지인 Gewinn 이 선정한 오스트리아의 10 대 부자에 속한다. 미국의 Fortune 지는 플리크 가족을 세계 100 대 부자의 하나로서 선정하였다. 그만큼 돈이 많은 가족이다. 사람들은 플리크 가족을 '플리크 왕조'라고 부른다. 창업주의 후손들이 여러 분야에서 사업에 관여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왕조의 창시자는 프리드리히 플리크(1883-1972)이다. 독일의 봐이마르 공국에서 석탄, 철강산업을 일으킨 사람이다. 프리드리히 플리크는 다임러(Daimler)회사의 경영에도 참여했었다. 프리드리히 플리크는 파란만장의 삶을 살았다. 좋게 말하면 자수성가한 사람이며 나쁘게 말하면 천하에 둘도 없는 악명 높은 기업인이었다. 그는 나치당의 창설자 중의 한사람으로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여 대단한 이익을 보았다. 기업가로서 그는 히틀러를 위해 군수물자를 생산하였다. 그는 공장운영을 위해 강제수용소에 있던 유태인들을 데려다가 마치 노예처럼 사용했다. 플리크의 공장에서 일하던 상당수의 유태인들은 열악한 환경과 억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2차 대전의 전범으로 고소되어 1948년 뉘른베르크 법정에 선 프리드리히 플리크. 플리크 왕조의 창설자로 간주되고 있다.

 

종전이 되자 프리드리히 플리크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1947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7년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3년만 복무하고 풀려났다. 미국의 고등판무관인 존 매클로이라는 사람이 힘을 써서 풀려났다. 아마도 뇌물을 먹였는지 모른다. 형무소에서 나온 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독일에서 사업을 일으켜 또 다시 많은 돈을 벌었다. 나중에 그는 유태인 사회로부터 전쟁중 혹사한 유태인들에 대하여 보상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는 1972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대부분의 사업을 셋째 아들인 프리드리히 칼 플리크(1927-2006)에게 넘겨 주었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1983년에 독일에서 이른반 '플리크 사건'이 터졌다. 프리드리히 칼 플리크가 독일에서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었던 것이다. 뇌물사건과 함께 세금포탈이 밝혀져 막대한 세금을 내게되자  프리드리히 칼 플리크는 그나마도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오스트리아 시민이 되었다. 얼마후 프리드리히 칼 플리크는 아버지가 일구어 놓은 사업을 독일은행에게 25억불에 매각하고 2006년 죽기 직전에 사업에서 은퇴하였다. 프리드리히 칼 플리크는 오스트리아의 벨델(Veldel)이란 곳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으나 2008년 11월 20일 누군가 그의 시신을 훔쳐갔다. 죽은 부자의 두개골을 가지고 있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설때문인듯 싶다.

 

프리드리히 칼 플리크. 누가 그의 묘를 파헤쳐서 시신을 훔쳐갔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창업주인 프리드리히 플리크는 세 아들을 두었다. 그리고 그 아들들이 또 자녀들을 두었다. 모두 플리크 가족으로서 프리드리히 플리크의 사업을 나름대로 상속받아 큰 재산가가 되었다.

 

- 큰 아들 오토-에른스트 플리크(1916-1974)

               - 딸 다그마르 오트만

               - 아들 게르트 루돌프 플리크

               - 아들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플리크

- 둘째 아들 루돌프 플리크(1919-1943?) 2차 대전중 사망

- 셋째 아들 프리드리히 칼 플리크(1927-2006): 아버지 프리드리히 플리크의 사업을 상속받음.

               - 딸 알렉산드라

               - 딸 엘리자베트 안나

               - 딸 빅토리아-카타리나

               - 아들 칼 프리드리히

 

큰 아들의 딸인 다그마르 오트만은 독일에서 사업을 하였다. 할아버지 프리드리히 플리크가 강제노역을 시킨 유태인들에 대하여 보상을 하라고 하자 유일하게 보상을 하였다. 다른 가족들은 하나도 보상하지 않았다.

게르트 루돌프 플리크는 1997년에 영국 옥스포드대학교에 35만 파운드의 기부금을 내고 사회심리학 교수직을 얻고자 했으나 대학교 측과 유태인 기관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플리크는 화가로서 취리히 박물관에 작품을 전시하려 했으나 스위스 당국이 거절하였다. 그후 2004년에 베를린의 함부르크 기차역에서 전시회를 갖기는 했지만 유태인 그룹들이 크게 항의하였다. 프리드리히 플리크는 고향인 에른스도르프에 고등학교 건물을 지어 기증했다. 당국은 그 학교의 명칭을 '프리드리히 플리크 김나지움'이라고 지었다. 그러나 나중에 학생들의 반대로 명칭을 바꾸어야 했다. 학생들은 플리크가 홀로코스트에 관여한 내용을 자료로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며 플리크를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