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오페라 성악가 일화

나나의 모델 블랑셰 당티니(Blanche d'Antigny)

정준극 2011. 10. 24. 10:20

블랑셰 당티니(Blanche d'Antigny)

에르베, 오펜바흐 오페레타의 스타

 

가수이며 배우인 블랑셰 당티니

 

프랑스의 오페레타 가수이며 배우인 블랑셰 당티니(1840-1874)는 비록 34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에밀 졸라가 그의 소설 '나나'에 그를 모델로 삼았다는 사실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기억되고 있다. 블랑셰 당티니는 프랑스의 마르티자이 지방에서 마리 어네스틴 안티니로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장 안티니는 마을 교회의 성물관리인이었다. 마리는 14세 때에 집을 뛰쳐 나와 애인과 함께 루마니아의 뷰카레스티로 갔다. 하지만 애인이라는 남자는 마리를 집시들에게 떠맡기고 사라졌다. 천신만고 끝에 파리로 돌아온 마리는 처음에 서커스에서 일하다가 얼마후 부터는 이곳저곳 댄스홀에서 일했다. 마리는 화가들의 모델 일도 했다. 대표적인 것은 폴 자크 에메 보드리(Paul-Jacques Aime Baudry: 1828-1886)의 '참회하는 마델레이느'(The penitent Madeleine)의 모델을 한 것이다.

 

폴 보드리의 '참회하는 마델레이느'. 블랑셰 당티니가 모델이다.

        

마리는 파리를 방문한 러시아경찰청장인 메센초브의 정부가 되어 그와 함께 생페터스부르크로 갔다. 하지만 얼마후 짜리나의 명령으로 러시아를 떠나야 했다. 마리는 독일의 뷔스바덴(Wiesbaden)으로 왔다. 마리는 독일에서 오페레타 무대의 스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가난한 시골 소녀가 오페레타의 스타가 되기까지 지내온 인생역정은 졸라가 그의 소설 '나나'에서 나나의 삶을 그린 것과 그렇게도 닮을수가 없었다. 오페레타의 스타가 된 마리 앙티니는 곧이어 돈 많은 사람들로부터 구애를 받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작곡가, 가수, 지휘자, 배우, 대본가, 극작가, 화가인 에르베(Hervé: 1825-1892: 원래 이름은 Louis Auguste Florimond Ronger)는 자칭 마리의 후견인이 되어 마리의 출세를 위해 도와주었다. 예를 들어 에르베는 마리를 그가 작곡한 오페레타(오페라 부프) 쉴페릭(Chilpéric)의 주인공으로 출연토록 했고 이어 그의 대표작인 '작은 파우스트'(Le petit Faust: 1869)에서는 마리를 마르게리트로, 그리고 자기는 파우스트로 출연하였다. '작은 파우스트'는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를 풍자한 뛰어난 오페레타 작품이다. 마리 앙티니는 이름도 블랑셰 당티니로 바꾸고 에르베와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에 중점 출연하여 명성을 떨쳤다. 예를 들면 에르베의 'L'oeil creve), 오펜바흐의 '파리인의 생활'(La vie parisienne) 등이다.

 

'참회하는 마그델레느'(막달라 마리아). 역시 블랑셰 당티니가 모델이었다. 폴 자크 에메 보드리 작

                         

블랑셰의 여러 애인들은 블랑셰를 위해 많은 돈을 쓰고 선물공세를 하였지만 블랑셰는 그 중에서 누구 하나도 진정으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아마 남자에 대하여 신뢰를 하지 못했기 때문인듯 싶다. 그러다가 이른바 애인이라는 사람 중의 하나가 파산을 하고 그것이 블랑셰에게도 영향을 미치자 블랑셰는 한동안 파리를 떠나 지내기로 한다. 이집트로 간 블랑셰는 카이로의 극장에 출연하였고 이어 케다이브(총독)과 스캔들을 뿌렸다. 그러나 뜻하지 아니하게 장질부사에 걸려 다시 파리로 돌아올수 밖에 없었으며 파리에 돌아와서 서서히 고통 속에 돈 한푼 없이 죽음을 마지했다. 블랑셰 당티니는 파리의 유명한 페르 라셰즈(Pere Lachaise)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졸라가 블랑셰 당티니의 말년의 생애를 그의 소설 '나나'의 모델로 삼은 것은 '나나'를 세계적인 작품으로 만든 바탕이었다. 원래 졸라는 프랑스 제2제국과 그 시대의 사회상에 대하여 연관관계를 모색하는 작품을 구상했다. 즉, 프랑스 제2제국의 사회상인 매춘, 부패, 탐욕, 무지 등이 제2제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소설을 통하여 탐구코자 했다. 졸라는 경찰국의 자료들을 토대로 그 시기의 모든 사회적인 문제들을 조명코자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2제국의 말기인 1870년대에 그허한 매춘과 탐욕과 부패가 줄어들었다. 마찬가지로 관용과 향락의 생활도 줄어들었다. 관용과 향락의 시기를 오펜바히아드(Offenbachiad)라고 불렀는데 그러한 용어가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펜바흐 자신도 나중에는 비극적 내용의 오페라를 작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