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와 여인들

비제의 부인 즈느비에브(Geneviève)

정준극 2011. 7. 13. 19:34

비제의 부인 즈느비에브 비제-슈트라우스

(Geneviève Bizet-Straus) - Geneviève Halévy

유태인 작곡가 자크 프로멘탈 알레비의 딸

 

즈느비에브 비제-슈트라우스

 

즈느비에브 비제-슈트라우스(1849-1926)는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선구자라고 할수 있는 자크 프로멘탈 엘리 알레비(Jacques Fromental Elie Halévy: 1799-1862)의 딸로서 1869년에 아버지의 뛰어난 제자인 조르즈 비제(Georges Bizet: 1838-1875)와 결혼하였다. 즈느비에브의 원래 이름은 즈느비에느 알레비(Geneviève Halévy) 였고 비제와 결혼했다가 비제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슈트라우스라는 사람과 재혼하여서 즈느비에브 비제-슈트라우스라는 이름을 유지하게 되었다. 즈느비에브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래서 남편 비제의 음악활동을 이해하고 후원하였다. '카르멘'의 초연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에도 비제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준 사람이 즈느비에브였다. 아버지 알레비의 미완성 오페라인 '노에'(Noé: Noah)를 비제가 완성할 때에도 많은 지원을 하였다. 비제는 안타깝게도 한창 시절인 37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즈느비에브는 26세의 젊은 나이였다. 얼마후 즈느비에브는 에밀 슈트라우스(Emile Straus)라는 사람과 재혼하였다. 새로운 남편 슈트라우스는 유명한 로트쉴드 가문의 변호사 겸 미술품 수집담당자였다. 비제와 가난하게 지내던 시절은 지나가고 어느덧 즈느비에브는 파리 사교계의 이름난 호스테스가 되었다. 즈느비에브의 살롱에는 문인과 예술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를 흔들었던 드레휘스(Dreyfus) 사건에 참여하여 힘든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즈느비에브는 향년 77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르즈 비제. 즈느비에브와의 결혼 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즈느비에브 알레비(Geneviève Halévy)는 1849년 2월 27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레오니 로드리게스 앙리크(Léonie Rodrigues-Henriques: 1820-1884)는 포르투갈의 유태인 후손으로서 조각가이며 예술품 수집가였다. 아버지도 유태계였다. 아버지 알레비는 프랑스 예술원(Académie des Beaux-Arts) 사무총장으로 이름난 오페라 작곡가였다. 알레비는 생전에 32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대표적인 작품은 그랜드 오페라인 La Juive(유태여인)이다. 오페라 '유태여인'은 기독교인과 유태교인 사이의 종교적 갈등으로 빚어지는 비극을 그린 것이다. 즈느비에브와 언니 에스터는 샤를르 구노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아버지 알레비는 즈느비에브가 13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즈느비에브의 언니인 에스터가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간혹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소녀 즈느비에브에게 정신적인 타격을 주어 우울증이 생기게 했다.  즈느비에브는 1869년, 20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의 뛰어난 제자인 조르즈 비제와 결혼하였고 1871년에 아들 자크를 낳았다. 즈느비에브의 부모는 즈느비에브가 비제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하였다. 비제가 부유하지 않은 서민가정 출신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가톨릭이라는 이유도 컸다. 즈느비에브는 가톨릭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태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으나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개종하지 않았다. 즈느비에브와 비제의 결혼생활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마침 당시는 보불전쟁의 혼란중이어서 사회적으로 경제가 혼돈중에 있었다.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낸 즈느비에브는 넉넉치 못한 생활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아마 그것은 원래 즈느비에브의 성격이 신경질적인데다가 어머니의 우울증을 물려 받아서 더욱 심했다.

 

즈느비에브의 아버지인 작곡가 자크 알레비

 

비제는 아들 자크가 네살 되던 해인 1875년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슬픔에 빠진 즈느비에브는 삼촌인 레옹 알레비(Léon Halévy)의 집에서 지냈다. 즈느비에브는 마침 조카인 루도빅 알레비(Ludovic Halévy: 1834-1908)이 예술가들이 모일수 있는 살롱을 열고 싶어하여 이를 도와주었다. 루도빅 알레비는 이름난 작가이며 대본가였다. 루도빅 알레비는 앙리 메일락(Henri Meilhac)과 함께 주로 오펜바흐의 오페레타의 대본을 작성했다. 즈느비에브의 살롱은 파리에서 예술계의 유명인사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 살롱은 '루도빅의 목요일'(Les jeudis de Ludovic)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루도빅의 살롱은 소녀시절부터 즈느비에브를 괴롭히던 우울증을 극복하는 도구가 되었다.

 

뛰어난 대본가인 루도비크 알레비. 비제의 부인인 즈느비에브의 조카였다.

 

'카르멘'이 초연된지 몇 달후 비제는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비제의 명성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즈느비에브는 비제의 미망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약 10년후 즈느비에브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알레비의 명성과 권리는 모두 즈느비에브가 물려 받았다. 즈느비에브는 자기 집에 예술가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사회적인 혼란과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즈느비에브의 살롱은 비록 다른 귀족들의 살롱에 비하여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당대의 뛰어난 예술가들이 모인다는 점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즈느비에브의 살롱은 파리에서 예술가로 성공할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살롱 '루도비크의 목요일'에서. 왼쪽으로부터 기 드 모파쌍(Guy de Maupassant), 마담 드 브루아씨아(Madame de Broissia), 비스꽁트 외진 멜키오르 드 보그(Visconte Eugene Mechior de Vogue), 마담 슈트라우스(Madame Straus= 즈느비에브 비제-슈트라우스), 제네랄 아넨코프(Generale Agenkoff)

 

즈느비에브는 비제가 세상을 떠난지 11년 후인 1886년(우리나라에서 배재학당이 설립된 해)에 로트쉴드 가문을 위해 일하는 부유한 변호사인 에밀 슈트라우스(Emilel Straus: 1844-1929)와 재혼하였다. 에밀 슈트라우스는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했다. 파리에 있는 슈트라우스의 저택 거실에는 장 마르크 나티에 (Jean Marc Natier), 조르즈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등의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다. 즈느비에브가 호스테스가 된 슈트라우스 저택의 살롱에는 당대의 예술가, 정치인, 귀족 들이 드나들었다. 그중에는 청년 작가인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도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즈느비에브와 비제 사이에서 태어난 자크의 학교친구였다. 즈느비에브의 새로운 남편 슈트라우스는 젊은 작가인 프루스트의 후원자가 되었다. 프루스트는 문학 활동에 있어서 즈느비에브와 많은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프루스트의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게르망트(Guermantes) 공작부인은 즈느비에브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귀 드 모파쌍(Guy de Maupassant)도 그의 Notre coeur(우리들의 마음)에서 즈느비에브를 등장시켰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비제와 즈느비에브 사이에 태어난 자크 비제와 같은 나이로서 친구였다.

 

1894년에 프랑스 사회를 뜨거운 논쟁의 와중으로 몰고 간 저 유명한 드레휘스(Alfred Dreyfus)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군 대위로서 유태인인 드레휘스는 프랑스에 대한 간첩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결국은 모든 병사들이 도열한 가운데 그의 상관이 그의 견장을 뜯었으며 그의 지휘검을 압수하여 부러트렸다. 군인으로서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조치를 받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드레휘스 사건'은 유태인에 대한 기독교의 박해라는 견지에서 많은 사람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논쟁의 불길은 즈느비에브의 살롱으로까지 번졌다. 정치가이며 변호사로서 즈느비에브의 오랜 친구인 조셉 라이나흐라는 사람이 살롱에서 드레휘스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러자 살롱에 자주 드나들었던 에드가 드가, 쥘르 르메트르(Jules Lemaitre), 장 루이 포렝(Jean-Louis Forain) 등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그로부터 즈느비에브의 살롱은 프로-드레휘스의 센터가 되었다. 그러나 잃은 것도 많았다. 살롱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 깨지고 혼란이 초래되었다는 것은 '드레휘스 사건'의 여파였다. 즈느비에브의 살롱은 1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옛 친구들의 모임의 장소가 되었다. 앙드레 지드, 줄리앙 벤다 등은 즈느비에브의 살롱을 잊지 않고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1922년 11월, 즈느비에브의 아들인 자크 비제가 자살하였다. 그로부터 15일 후에는 즈느비에브가 가장 총애하던 마르셀 프루스트가 세상을 떠났다. 즈느비에브의 상심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4년 후인 1926년 12월 22일 즈느비에브도 숨을 거두었다.

 

프랑스 뿐만 아니라 전유럽을 뜨거운 논쟁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알프레드 드레휘스 사건. 유태인인 드레휘스는 파리의 앵밸리드 광장에서 군인으로서는 최대의 수치를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