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이탈리아왕국의 마리

5월의 왕비 마리 호세

정준극 2011. 9. 8. 07:00

5월의 왕비 마리 호세(Marie José of Belgium: Maria Józefa Belgijska)

 

결혼 전의 마리 호세 공주. 뛰어나게 아름답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귀엽고 지성적으로 생겼다.

 

마리 호세 왕비는 이탈리아왕국의 마지막 왕비였다. '이탈리아에도 왕국이 있었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탈리아도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사보이 왕가가 통치하던 왕국이었다. 그러다가 2차 대전 후인 1946년 이탈리아 국민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국민투표를 하여 왕국을 공화국으로 만들고 왕은 추방하고 대통령을 뽑았다.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왕비가 마리 호세였다. 마리 호세는 벨기에의 공주로 태어나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의 움베르토 왕세자와 결혼하여 나중에 이탈리아 왕국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아마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동안 왕비의 자리에 있었던 여인일 것이다. 1946년 5월 9일에 왕비가 되어 한달 후인 6월 2일에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비로서 재직기간은 25일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마리 호세를 '5월의 왕비'(The May Queen)이라고 불렀다. 겨우 5월 한달 동안 왕비 노릇을 하다가 물러났다는 뜻에서였다. 마리 호세 왕비 자신은 La Petit 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Petit 는 '작다' '짧다' '귀엽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 호세 왕비의 키가 작았다는 것은 아니다. 간접적으로 풀이하면 '단명의 왕비'라는 의미일 것이다.

 

결혼 후의 마리 호세 공주.

    

마리 호세는 1906년 8월 4일 벨기에의 서해안 오스텐드(Ostend)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벨기에의 알베르 1세 국왕이며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왕비였다. 위로는 레오폴드 왕자와 샤를르 왕자의 두 오빠가 있었다. 마리 호세는 알베르 국왕의 유일한 공주였다. 마리 호세의 세례명은 여늬 왕족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길다. 마리 호세 샬로테 소피 아넬리 앙리에트 가브리엘르(Marie José Charlotte Sophie Amelie Henriette Gabrielle)이다. 하지만 간단히 줄여서 '벨기에의 마리 호세'(Marie José of Belgium: Maria Józefa Belgijska)라고 부른다. 마리 호세라는 이름은 할머니인 포르투갈의 공주였던 마리아 요세프(Maria Josephe of Barganza)에서 가져온 것이다. 소피, 아멜리, 가브리엘르는 어머니의 자매들, 즉 이모들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앙리에트는 아버지의 여동생, 즉 고모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마리 호세 왕비가 태어난 플란더스 서부지방의 오스텐드. 현대식 빌딩은 유럽센터(Europacentrum)이다. 멀리 보이는 성당은 '성베드로-성바오로성당'이다. 오스텐드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하다.

 

마리 호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회화, 피아노, 바이올린을 공부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 받았던 것 같다. 실제로 마리 호세의 가족들은 함께 모여 연주하기를 즐겨했다. 마리 호세는 아버지 알베르 국왕과 오빠 레오(레오폴드)와 가깝게 지냈다. 어머니는 자녀들의 결혼문제에 대단히 신경을 썼다. 유럽의 좋은 왕가의 사람들과 결혼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마리 호세의 작은 오빠인 샤를르가 평민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리 호세의 큰 오빠인 레오폴드가 재혼할 때에는 샤를르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던지 평민과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마리 호세의 어머니는 마리 호세가 장성하자 배우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왕자로서 언젠가는 왕위에 오를 사람을 우선으로 고려했다. 하지만 그런 후보자는 거의 없었다. 유일한 후보자가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의 움베르토 왕세자였다. 마리 호세와 움베르토의 결혼은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마리 호세의 어머니는 움베르토 왕세자가 멋있고 잘생긴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마리 호세와 움베르토 왕세자는 가족 모임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만났다. 벨기에의 왕가로서 공주의 배우자는 로마 가톨릭을 우선 염두에 두었다. 개신교 또는 영국 성공회의 사람은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오스트리아도 로마 가톨릭이었지만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미 1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붕괴되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탈리아 만이 아직도 로마 가톨릭의 왕가를 이어나가고 있었으므로 벨기에의 알베르 국왕도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와의 결혼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