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이탈리아왕국의 마리

무솔리니와의 염문

정준극 2011. 9. 8. 11:01

무솔리니와의 염문(?)

 

마리 호세 왕비와 베니토 무솔리니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와 마리 호세 왕비가 섬싱이 있었다는 소문이 나돈 적이 있다. 무솔리니는 여성편력이 복잡한 사람이었다. 라첼레 귀디(Rachele Guidi)라는 여자는 1910년부터 무솔리니의 정부였다. 그런 중에도 무솔리니는 1914년에 이다 다슬러(Ida Dasler)라는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12월 첫째 부인과 이혼하고 정부였던 라첼레와 결혼하였다. 무솔리니는 라첼레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다. 그러면서 무솔리니는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가지며 지냈다. 주로 무솔리니 추종자들이었다. 마지막까지 함께 지낸 여자는 클라레타 페타치(Claretta Petacci: Clara Petacci)였다. 클라레타는 그의 일기에서 1937년에 마리 호세 왕비가 로마 부근의 해변휴양지에서 무솔리니를 유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썼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마리 호세와 무솔리니가 상당한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무솔리니의 아들인 로마노라는 백성은 훗날 어떤 잡지에 낸 글에서 '아버지와 마리 호세 공주가 상당히 로맨틱한 관계에 있었다'고 말했다.

 

벨기에 알베르 국왕의 딸인 마리 호세는 유럽의 다른 왕실 사람들처럼 일찍이 움베르토 왕자와 정략결혼을 하였지만 그래도 남편을 믿고 결혼생활을 하려 했으나 남편 움베르토가 자기가 무슨 카사노바라고 여성편력이 화려하여서 행복한 생활을 하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은 1946년 사보이 왕가가 붕괴되자 헤어졌다. 마리 호세는 이탈리아로부터 추방되어 스위스에서 여생을 보냈다. 아무튼 이탈리아에서 파치슴이 일어나고 사보이 왕국의 존폐가 경각에 달리게 되자 마리 호세 왕비는 어떻게 하면 사보이 왕가를 유지할수 있을 까라고 고심하다가 2차 대전중에 미국과의 평화협상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는 와중에서 무솔리니와도 만나게 되었고 카사노바와 같은 무솔리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억지로 접근했는지도 모른다. 한편, 무솔리니로 말하자면 돈 조반니는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불세출의 정력가여서 하루에 적어도 한 여자 이상과 섹스를 했다고 한다. 그러기를 1943년 이탈리아 파치스트 정권이 무너지기까지 거의 14년이나 했다는 것이다. 무솔리니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페타치에 의하면 어느날 무솔리니가 자기에게 마리 호세 왕비가  로마 부근의 카스텔포르치나오 해변에서 무솔리니를 유혹하려 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움베르토의 아버지인 빅토르 엠마누엘 이탈리아 왕의 사냥별장이 있었는데 무솔리니에게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했다는 것이며 이후 무솔리니는 이곳에 수많은 여인들을 끌어들여 즐겼다는 것이다. 무솔리니의 정부인 페타치의 일기에 의하면 비록 마리 호세가 거의 누드로서 무솔리니를 유혹코자 했지만 무솔리니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무솔리니의 아들인 로마노는 1971년에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분명히 한때 깊은 관계에 있었다고 믿는다'라고 했다. 이탈리아 사보이 왕국의 마지막 왕비인 마리 호세가 과연 파치슴의 대명사이며 카사노바의 직계라고 생각되는 무솔리니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었는지 아닌지는 이제는 말없는 당사자들만 아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