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포 왕자와의 결혼
로마 퀴리날 궁전에서의 결혼식을 마치고.
움베르토 왕자의 애칭은 베포(Bepo)였다. 베포 왕자는 이탈리아와 벨기에 왕가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드디어 마리 호세 공주에게 청혼하였고 이에 따라 1929년 10월 24일 약혼이 발표 되었다. 이날은 바로 저 유명한 월스트리트의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이었다. 약혼이 발표된 그날, 움베르토 왕자와 마리 호세 공주는 로마에 있는 무명용사의 묘소에 헌화를 하고 있었다. 그때 페르다난도 데 로사라는 젊은 이탈리아 청년이 움베르토 왕자를 공격하여 살해코자 했다. 암살은 미수로 돌아가고 청년은 체포되었지만 사보이 왕가로서는 적잖이 당황한 일이었다. 이 청년의 움베르토 왕자 살해기도는 무솔리니의 등장과 함께 이탈리아 군주제에 대한 항거로 해석될수 있다. 암살기도와 체포는 순식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사실상 움베르토 왕자와 마리 호세 공주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움베르토 왕자의 이름을 연호하며 찬양하였다. 마리 호세 공주는 어째서 사람들이 움베르토 왕자의 이름만을 소리치는지 궁금하여 시종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시종은 왕자의 침착함과 용기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마리 호세 공주는 공연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움베르토 왕자에게 '정말로 나와 결혼하는 것이 침착해야 했고 용기가 있어야 했느냐?'고 물어보기 까지 했다.
결혼기념 엽서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930년 1월 8일, 두 사람은 로마의 퀴리날(Quirinal)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날짜를 이 날로 정한 것은 움베르토 왕자의 어머니인 엘레나 왕비의 57회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축하하는 결혼식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움베르토 왕자와 마리 호세 공주에게는 피곤하고 짜증이 나는 하루였다. 이날 마리 호세 공주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일찍 일어나서 서둘렀지만 결혼식장에는 예정보다 늦게 도착하였다. 신랑이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신부를 만나러 가는 것은 관례상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움베르토 왕자는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신부가 어떤 모습인지 보기 위해 신부대기실로 찾아갔다. 움베르토 왕자는 완벽주의자였고 대단한 심미주의자였다. 마리 호세 공주는 나중에는 왕자의 그런 점이 싫기도 했다. 아무튼 왕자는 공주의 웨딩 드레스를 보자 소매가 잘못 바느질 되었다면서 대단히 화를 냈다. 누구도 그것을 알아 차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당장 고쳐 입으라고 요청했다. 결국 공주는 바느질해서 연결한 소매 부분을 떼어 버리고 대신 긴 장갑을 끼기로 했다. 사실 마리 호세 공주는 그 드레스를 입고 십지 않았다. 공주는 보다 단순하고 현대적인 웨딩 드레스를 입고 싶어했다. 하지만 왕자가 신부는 화려하고 웅장하게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 드레스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날 공주가 입은 웨딩 드레스는 왕자가 직접 디자인 한 것이라고 한다. 어쨋든 마리 호세 공주는 그 드레스를 입고서 '사람들이 메고 행진하는 성모 마리아상과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결혼할 때에 마리 호세 공주는 23세였고 움베르토 왕자는 25세였다.
마리 호세의 시어머니인 엘레나 왕비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드레스 소동 때문에 결혼식은 지체되었다. 결혼식은 퀴리날 궁전의 카펠라 파올리나(Cappella Paolina)에서 거행되었다. 두 사람이 유럽의 왕족들이 늘어서 있는 복도를 걸어 들어갈 때에 유머를 좋아하는 마리 호세의 아버지 알베르 국왕은 딸의 귀에 '우리네 직업에는 이제 실업자가 많아서 많이들 왔단다'라고 속삭였다. 많은 나라가 왕정 대신에 공화제를 선택하여서 왕족들의 실업율이 높아졌지만 이탈리아는 아직 왕국이어서 직장을 잃을 염려가 없다는 조크였다. 제단에는 전통에 따라 사보이의 네 왕자들이 마치 무대의 막처럼 커다란 하얀 베일을 들고 있었다. 순결과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베일은 두 사람이 이제 남편과 아내가 되었다고 선언이 있을 때에 치워졌다.
마리 호세 공주의 웨딩 드레스. 움베르토 왕자가 디자인 했다고 한다.
결혼식이 끝난후 두 사람은 궁전 내의 다른 방으로 가서 결혼서류에 서명하는 의식을 가졌다. 무솔리니도 참석하였다. 무솔리니는 이제는 왕세자비가 된 마리 호세에게 이름을 이탈리아 식으로 Maria Giuseppina(마리아 주세피나)라고 쓰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한 고집하는 마리 호세는 그같은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고 원래대로 Marie José 라고 서명했다. 이탈리아 신문들은 어떻게 보도해야 할지 당황했다. 신문들은 무솔리니의 기분도 상하지 않게 하고 마리 호세 공주의 체면도 살리기 위해서 Maria 라는 첫 이름만 쓰고 Giuseppina 또는 José 라는 이름은 삭제하였다. 이튿날 아침, 움베르토와 마리 호세는 성당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오래동안 기도하였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이상한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결혼전부터 스캔들의 기미가 있었던 움베르토가 이제는 오로지 마리 호세만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다는 가십으로부터 두 사람의 사이가 아무래도 이상하므로 저렇게 오래 기도하고 있다는 소리까지 별별 소문이 다 돌았다. 이것은 앞으로 두 사람을 따라 다니는 수많은 가십의 서막에 불과했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마리 호세는 오빠 레오폴드가 스웨덴의 아스트리드 공주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지낸 것을 기억하며 자기의 결혼은 왜 그렇지 못한지 한탄하였다. 레오폴드는 왕가의 관례에 따라 스웨덴의 왕가와 정략결혼을 하였지만 레오폴드와 아스트리드 공주는 진실로 서로 사랑하였던 것이다. 마리 호세는 움베르토와 결혼한지 4년 후인 1934년에 첫 자녀로서 마리아 피아 공주를 낳았다. 움베르토는 마리아 피아가 태어난 후 그동안 참아왔다는 듯 여성편력의 길로 접어 들었다. 움베르토와 고급 창녀들에 대한 스캔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심지어는 남자들과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까지 나 돌았다. 마리 호세는 나폴리의 궁전에 틀어박혀서 그저 가끔씩 나타나는 남편과 잠자리를 할 뿐이었다. 아무튼 두 사람 사이에는 네 자녀를 두었다. 둘째는 1937년에 태어난 비토리오 엠마누엘 왕자였다. 셋째는 1940년에 태어난 마리아 가브리엘라 공주였다. 넷째는 1943년에 태어난 마리아 베아트리체 카롤리네 공주였다. 모두 나폴리에서 태어났다. 마리 호세는 몇년후 자신의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on n'a jamais été heureux(우리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는 한마디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두 사람은 가톨릭 신앙에 따라 이혼하지 않고 별거만 하였다.
큰딸 마리아 피아와 아들 비토리오 엠마누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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