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이탈리아왕국의 마리

마지막 국왕 움베르토 2세

정준극 2011. 9. 9. 10:11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움베르토 2세

 

사보이 왕가의 마지막 국왕 움베르토 2세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인 움베르토 2세(Umberto II)는 '5월의 왕'(King of May)라고 부른다. 1946년 5월에 이탈리아 국왕으로 등극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1946년 5월 9일에 국왕으로 등극하였으나 6월 2일 국민투표에 의해 이탈리아가 공화국이 되는 바람에 왕좌에서 밀려났다. 재위기간은 34일이었다. 2차 대전의 여파였다. 움베르토는 1904년 9월 15일 피아몬테(Piamonte: Piedmont)의 라코니기(Racconigi)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빅토르 엠마누엘 3세 국왕이었고 어머니는 몬테네그로의 엘레나 왕비였다. 움베르토는 사보이 왕가의 마지막 왕자였다. 빅토르 엠마누엘 3세 국왕와 엘레나 왕비는 네 자녀를 두었으나 세명은 딸이었고 움베르토 만이 유일한 아들이었다. 움베르토는 어린 시절부터 국왕의 수업을 받으면서 자랐다. 사보이 왕가의 빅토르 엠마누엘 1세는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룩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런 가문에서 자란 움베르토는 영광스런 역사를 안고 지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한 군사훈련과 함께 사보이 왕가가 그에게 요구하는 중압감으로 지나치게 소심하고 결단력이 부족한 성격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왕가의 규범이나 관례를 벗어나 자유분방한 행동을 하기가 일수였다.

 

움베르토가 태어난 리코니기의 카스텔로 디 라코니기(Castello di Racconigi)

             

소심하고 세밀한 성격때문인지 그는 외모와 의상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이탈리아의 신문들은 그런 그를 유럽에서 가장 핸섬한 왕자로 치켜세웠다. 그는 큰 키에 어릴때 부터 다져진 군사훈련으로 누가 보던지 호감을 주는 맨너를 가지고 있었다. 이제 장성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배필이 될 아름다운 공주였다. 이탈리아의 왕자와 결혼할 여자는 로마 가톨릭 국가의 공주여야 했다. 그러나 1차 대전의 여파로 유럽의 여러 로마 가톨릭 왕국들은 공화국으로 전환되었으며 이에 따라 가톨릭 왕가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마침 로마 가톨릭인 벨기에 왕국에 마리 호세라는 공주가 있었다. 벨기에의 알베르 1세 국왕과 바바리아의 엘리자베스 왕비도 진작부터 움베르토 왕자를 마리 호세의 배우자로 점찍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족 모임을 구실로 한두번 만나기도 했다. 드디어 움베르토 왕자는 정식으로 마리 호세 공주에게 청혼하기 위해 벨기에를 방문하기로 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파치스트당이 집권하고 있었고 급진 사회주의자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이들은 움베르토 왕자가 사보이 왕가의 강화를 위해 벨기에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을 대단히 반대하였다. 심지어는 어떤 열혈 청년이 움베르토 왕자를 암살코자 기도한 일도 있었다.

 

옛 사보이 왕가의 영화를 재현한 화려하고 장엄한 결혼식후의 기념촬영. 신부가 신랑의 팔장을 끼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 드디어 움베르토 왕자와 마리 호세 공주는 1930년 1월 8일 로마에서 사보이 왕가위 위용을 보여주는 화려하고도 장엄한 결혼식을 올렸다. 무솔리니도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당시 무솔리니의 주장은 왕정을 타파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탈리아 왕가의 전통에 따르면 아무리 차기 왕위 계승자라고 해도 왕자의 신분으로서는 정치문제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다. 움베르토 왕자도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혹시 움베르토 왕자가 왕정복귀를 주장하며 사회주의를 배격하지나 않을까하여 염려했다. 그래서 움베르토 왕자를 비롯한 사보이 왕가의 사람들을 엄밀히 감시하고 엄격한 통제아래 두었다. 움베르토는 왕자로서 각종 왕실행사에 참여하였지만 무솔리니의 파치스트 정부의 활동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았으며 다만 이탈리아 북부군 사령관으로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어 2차 대전이 진행중이던 1942년에는 이탈리아군 원수(元帥)로서 승진하였다. 문제는 전쟁의 양상이 이탈리아에 불리하게만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첫딸 마리아 피아와 함께

     

왕실은 정치에 관여하면 안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가 세계 정세에서 불리한 입장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수는 없었다. 마리 호세 공주(왕자비)는 진작부터 바티칸과 연락하며 무솔리니의 파치스트 정권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마리 호세 공주는 로마에 있는 반파치스트 세력과 미국 대표단과의 연계를 도모하였다. 이탈리아를 독일을 중심으로한 동맹국의 축에서 빼내오기 위해서였다.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던 움베르토 왕자는 마리 호세 공주의 활동을 내심 지지하였지만 겉으로는 왕실의 관례와 무솔리니의 감시때문에 침묵을 지켰다. 연합군이 리비아를 포함한 동부 아프리카를 동맹국의 세력으로부터 탈환하였다. 리비아는 이탈리아의 '제4의 해안'(Italy's Fourth Shore)라고 할 만큼 이탈리아로서는 중요한 발판이었지만 연합군의 손에 들어갔다. 얼마후 영국과 미국의 연합군이 시실리를 공략하였다. 사태는 이탈리아에게 불리하게만 전개되었다. 도저히 극복하기 어려운 상태로 진전되어가고 있었다.

 

카이로를 방문한 움베르토 2세

                

무솔리니에 대한 지지는 급격히 저하되었다. 빅토르 엠마누엘 3세의 권력은 점차 확장되었다. 드디어 빅토르 엠마누엘 국왕은 독재자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토록 했다. 그후 이탈리아는 연합국 측과 평화협정을 체결할수 있었다. 그러자 독일이 뜻밖에도 갑자기 북부 이탈리아를 강제로 점령하고 나섰다.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는 이탈리아 남부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민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국왕이 잘못하여 이런 지경까지 초래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런가하면 국왕도 파치스트와 오래 지내다보니 물들었다고 하며 더 이상 국왕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주장도 있었다. 어쨋거나 빅토르 엠마누엘 국왕으로서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기가 곤란한 입장이 되었다. 빅토르 엠마누엘 국왕은 양위에 대한 제안을 거부하고 대신 움베르토가 모든 권한을 대행하도록 했다. 그리고 국왕은 잠시 이탈리아를 떠나 있기로 하여 친구인 이집트 화루크(Farouk) 국왕의 배려로 카이로로 갔다. 움베르토는 나름대로 사태수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움베르토를 찬양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움베르토는 연합국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에 수립된 파치스트 정부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체포되어 감옥에 있던 무솔리니는 독일 특공대의 활약으로 탈출하여 북부 이탈리아에 히틀러 괴뢰정부를 수립하였다.

 

1930년 6월 결혼식후에 피에드몽(피아몬테)를 방문한 움베르토와 마리 호세

             

움베르토는 1945년에 나치가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연합국 측에 서서 독일 및 무솔리니 군대를 몰아내기 위한 전투를 계속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파치스트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공화주의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비록 움베르토에 대한 지지가 높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국에 대한 열망은 막을수 없었다. 더구나 미국이 은근히 사보이 왕가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왕정이 문을 닫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우선은 빅토르 엠마누엘 국왕이 움베르토에게 양위함으로서 사태를 수습코자 했다. 그리하여 1946년 5월 9일 양위하였다. 움베르토는 움베르토 2세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정타도에 대한 소리는 높아만 갔다. 움베르토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한지 1주일후 왕정철폐 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빅토르 엠마누엘 3세도 이탈리아에게는 공화제가 적합하다고 예견했다. 찬반은 백중이었다. 하지만 국민적인 열망과 국제적인 대세는 거스를수 없었다. 정부는 개표가 완료되기도 전에 공화제를 발표했다. 때문에 아직 투표를 하지 않은 층도 이미 공화제 찬성이 압도적인 것으로 믿어서 아예 투표장에 가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1946년 6월 12일 이탈리아에서의 왕정은 영원히 종지부를 찍었다.

 

움베르토와 마리 호세의 약간 즐거운 한때

                         

움베르토 국왕와 마리 호세 왕비는 네 자녀들과 함께 망명의 길을 떠났고 이어 별거에 들어갔다. 움베르토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을 주로 포르투갈에서 지냈다. 그러면서 그는 여행을 자주 다녔다. 세계의 여러 나라의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맺으며 지냈다. 그렇게 여러 나라에 친구들이 많았지만 정작 이탈리아의 새로운 공화정부와는 교류가 없었다. 이탈리아의 새로운 정부는 사보이 왕가의 남자는 어느 누구도 이탈리아의 땅을 밟을수 없다는 법을 정했다. 그런데 참으로 어이없는 것은 이탈리아의 새로운 공화정부가 무솔리니의 파치슴을 배격하면서도 무솔리니의 가족에 대하여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공화정부가 유독 사보이 왕가에 대하여만 숨통을 조인 것은 아직도 이탈리아에는 왕당파 인사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으므로 혹시나 이들이 무슨 일을 꾸미지나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다.

 

생긴 것은 멀쩡한데 아무튼 비운의 왕이었다.

                      

움베르토 2세는 1983년 3월 18일 아직도 추방 중에 제네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움베르토 2세는 프랑스의 사보이 인근에 있는 오뜨꽁비(Hautecombie) 수도원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17년 후인 2001년 마리 호세 왕비도 이 교회에 있는 움베르토의 영묘 옆에 안장되었다. 프랑스 오뜨꽁비 수도원에서의 움베르토 2세 장례식에는 유럽의 수많은 국가에서 조문객이 참석하였다. 과거에 이탈리아의 적국이었던 나라에서도 조문객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탈리아에서는 단 한명의 조문객도 파견하지 않았다.

 

움베르토 2세와 마리 호세 왕비가 안장되어 있는 프랑스 사보이의 오뜨꽁비 수도원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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