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피가로(I due Figaro) - The Two Figaros - Les Deux Figaro
Saverio Mercadante(사베리오 메르카단테)의 피가로 시리즈 제3편
사베리오 메르카단테
몰리에르의 후계자라고 불리는 피에르 오귀스탱 캬론 드 보마르셰(Pierre-Augustin Caron de Beaumarchais: 1732-1799)의 '세빌리아의 이발사'(Le Barbier de Séville 또는 la Précaution inutile)가 1775년에 처음 연극으로 공연되었을 때 일반시민들은 귀족을 골탕먹이는 거리의 이발사 피가로의 담대한 기지에 갈채를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극이나 오페라의 주인공은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나 왕족, 또는 영웅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발사를 주인공으로 삼은 연극이 나온 것이다. 이발사란 어떤 사람인가? 아무리 왕족, 귀족이라고 해도 이발사의 앞에서는 모자를 벗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 고개를 이리로 돌리라고 하면 돌려야 하고 머리를 뒤로 젖히라고 하면 젖혀야 한다. 왕족이나 귀족들로부터 억압받던 서민들로서는 이발사의 역할이 유쾌하고 기분 좋기가 이를데 없었다. 그러니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나오자 마자 대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사회상이 그런 자유와 평등 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한 장면. 알마비바 백작과 백작부인(로지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성공에 고무된 보마르셰는 1778년에 피가로 제2편인 '피가로의 결혼'(Le Mariage de Figaro 또는 La Folle Journée)을 내놓아 다시한번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역시 귀족의 권위를 무너트리는 유쾌한 코미디였다. 사람들은 그러한 '피가로의 결혼'을 보고 환호하였다. 피가로는 당시 자유와 평등의 물결과 함께 사회적 유명인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제3편을 열화와 같이 고대하였다. 그러나 보마르셰는 선뜻 제3편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오노레 안투안 리쇼 마르텔리(Honore-Antoine Richaud-Martelly)라는 배우 겸 극작가가 일반대중들의 여망에 부응하여 1790년에 피가로 시리즈의 후속편으로 '두명의 피가로'(Les Deux Figaro)라는 극본을 내놓았다. 보마르셰의 후속편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나마 리쇼 마르텔리의 '두 명의 피가로'를 보고 만족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보마르셰는 만족하지 않았다. 배우이기도 했던 리쇼 마르텔리는 '두 명의 피가로'의 연극초연에서 알마비바 백작 역할을 맡았었다.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한 장면. 바로톨로, 로지나, 백작
벨리니와 더불어 '나폴리 학파'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가인 사베리오 메르카단테(Saverio Mercadante: 1795-1870)는 리쇼 마르텔리의 '두 명의 피가로'의 대본을 보고 흥미를 느껴 오페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보마르셰의 피가로 시리즈의 제1탄인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조아키노 로시니가 오페라로 만들어 1816년에 초연을 가졌고 제2탄인 '피가로의 결혼'은 1786년에 모차르트가 오페라로 만들어 초연되었다. 잘 아는대로 보마르셰의 피가로 시리즈 중에서 제2편이 먼저 오페라로 작곡되었으며 그로부터 꼭 30년 후에 제1편인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오페라로서 선을 보였다. 그리고 메르카단테가 리쇼 마르텔의 극본을 바탕으로 '두 명의 피가로'를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나온지 꼭 10년후인 1826년에 오페라로 완성했다. 메르카단테의 오페라 '두 명의 피가로'의 대본은 벨리니의 파트너로서 '몽유병자'(La Sonnambula)와 '노르마'(Norma)의 대본을 쓴 펠리체 로마노(Felice Romano)가 썼다.
피가로 3부작으로 유명한 피에르 보마르셰
메르카단테가 '두 명의 피가로'를 작곡할 당시에 그는 마드리드의 로열오페라하우스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었다. 메르카단테는 이탈리아의 알타무라(Altamura)에서 태어나고 나폴리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중간에 마드리스에 가서 오래동안 지낸 일이 있다. 메르카단테는 로열오페라하우스의 음악감독으로서 무언가 뛰어난 오페라를 만들어 마드리드의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리하여 1826년에 '두 명의 피가로'를 작곡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내용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검열당국의 공연허가를 받지 못했다. 실망한 메르카단테는 1831년에 로열오페라하우스의 음악감독을 그만 두었다. '두 명의 피가로'가 처음 공연된 것은 1835년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프린치페(Teatro Principe)에서였다.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은 초연 이후 끊임없이 대단한 인기를 차지하여 세계 곳곳에서 경쟁적으로 공연되었지만 메르카단테의 '두 명의 피가로'는 어찌된 일인지 소문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2011년 잘츠부르크 봄축제(Whitsun: 성령강림절에 즈음한 음악제)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갖게 되었다. 거장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i)가 지휘를 맡았으며 유명한 에밀리오 사지(Emilio Sagi)가 무대감독을 맡은 공연이었다. 그로부터 메르카단테의 '두 명의 피가로'는 점차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잘츠부르크 봄축제에서 메르카단테의 '두 명의 피가로' 리허설 장면. 무대감독인 에밀리오 사지가 소프라노 로사 페올라(Rosa Feola)와 연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있다. 아래쪽의 거울도 무대장치의 일환이다.
그런데 실은 19세기 이탈리아의 작곡가인 미첼 카라파(Michel Carafa: 1787-1872)라는 사람도 '두 명의 피가로'(I Due Figaro 또는 Il Soggetto di una Commedia)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로시니의 친구인 그는 로시니와 함께 작품활동을 하였지만 워낙 로시니가 유명하므로 상대적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못했다. 카라파의 '두 명의 피가로' 역시 펠리체 로마노의 대본을 사용했다. 메르카단테의 '두 명의 피가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메르카단테의 오페라는 '피가로의 결혼'이 거행된지 20년 후의 이야기를 담은 것인데 비하여 카라파의 '두 명의 피가로'는 15년 후로 시점을 잡은 것이다. 15년 후에 케루비노가 피가로 2세로 가장하여 알마비바 백작의 궁전을 찾아와 알마비바 백작의 딸인 이네스(Inez)와 어떻게 해 보려고 접근한다는 스토리이다. 사족이지만 카라파의 '두 명의 피가로'는 2006년에 이탈리아의 본조반니(Bongiovanni)라는 음반회사가 세계 최초로 레코딩을 하여 내놓았다. 당시의 공연을 DVD 로 만든 것은 2009년 11월에야 발매가 시작되었다. 이 세계최초의 레코딩에 우리나라 소프라노인 김은실이 비록 노래를 부르는 역할은 아니지만 알마비바 백작의 딸인 이네즈로 참여하였다.
미첼 카라파의 '두 명의 피가로' DVD 커버. 이네즈 역을 김은실이 맡았다.
보마르셰는 대중들의 '피가로 시리즈 3탄'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듯하자 생각을 고쳐 먹고 제3편을 쓰기로 결심했다. 더구나 제2편인 '피가로의 결혼' 이후 이것저것 추측성 후편이 나오자 무언가 교통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피가로의 결혼'을 내놓은 후 14년간의 침묵을 깨고 1792년 피가로 시리즈의 제3편인 '죄많은 어머니'(La Mère coupable 또는 L'Autre Tartuffe)를 발표했다. '죄많은 어머니'의 스토리는 피가로가 수산나와 결혼하고 백작이 백작부인(로지나)과 화해한 때로부터 20년 후의 이야기이다. 백작부인을 사모하던 케루비노는 백작이 멀리 출장을 떠난 사이를 이용하여 드디어 백작부인과 사랑의 하룻밤을 지낸다. 그리하여 아들 레옹이 태어난다. 한편 백작도 출장중 어떤 여인과 인연을 맺어 딸 플로렌틴을 갖는다. 백작은 레옹이 아무래도 자기 아들이 아닌 것 같아서 레옹에게 모든 것을 상속할 생각이 없다. 그래서 일부러 세빌리아에서 파리로 모두 이사를 간다. 그러므로 제3편 '죄많은 어머니'의 무대는 파리이다. 그런데 한 집에 살게 된 레옹과 플로렌틴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한편, 옛날에 백작이 스페인의 대사로외국에 나가 있을 때 비서를 지냈던 베기어스라는 사람은 플로렌틴을 보자 결혼하여 백작의 재산을 가로 챌 음모를 꾸민다. 그런 사실을 피가로와 수산나가 알아채리자 베기어스는 이번에는 피가로와 수산나를 무고하여 결국 백작이 이들을 해고하게 만든다. 그러나 피가로가 이런 난관을 기지와 지혜로서 타개하여 베기어스를 추방하고 이어 백작부인이 레옹을 정식으로 양자로 들이도록 하고 백작이 플로렌틴을 정식으로 양녀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그러므로 레옹과 플로렌틴은 실상 남남이므로 사랑을 해도 상관이 없게 된다는 내용이다.
실질적으로 백작의 권한을 행사하게 된 피가로
보마르셰의 '죄많은 어머니'의 스토리는 그렇다고 치고 리쇼 마르텔리가 극본을 쓰고 이를 펠리체 로마노가 오페라의 대본으로 만든 것을 메르카단테가 '두 명의 피가로'라는 오페라로 만든 것의 스토리는 내용이 조금 다르다. 알마비바 백작가문의 전설적인 무대를 다음 세대로 옮긴 것이다. 피가로는 오래전부터 백작의 전적인 신임을 얻어 백작이 외국에 나가 있을 때에는 백작 저택의 실질적인 주인과 같은 권한을 갖게 된다. 백작은 이제 집안의 대소사를 모두 피가로에게 일임하고 있는 형편이다. 백작은 딸 이네즈(Inez)의 결혼을 서두르고 싶다. 그 일도 피가로에게 일임한다. 한편, 20년전에 백작의 명령에 따라 군대에 들어간 케루비노는 20년을 한결같이 군대에서 지내는 바람에 지금은 대령이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케루비노를 본 이네즈는 그만 그가 누구인지 모른채 케루비노를 사랑하게 된다. 케루비노도 아름다운 이네즈를 사랑하게 된다. 두 사람의 비밀스런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르익는다. 케루비노는 이네즈와 결혼하기 위해 피가로라는 이름으로 가장하여 백작의 저택을 찾아간다. 뿐만 아니라 케루비노는 20년전 피가로의 복장을 하고 나타난다. 백작은 그런 모습을 보자 옛날 생각이 나서 찾아온 피가로(케루비노)에게 호감을 갖는다. 진짜 피가로는 피가로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사람이 자기와 이름만 같은 사람인지, 또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으므로 자기가 무슨 관계에 있는지를 몰라 혼란스럽다. 우여곡절 끝에 케루비노와 이네즈는 공증인의 앞에서 결혼계약서에 서명을 마친다.
보마르셰의 피가로 시리즈 제3편인 '죄많은 어머니'의 내용도 따지고 보면 당시 사회의 도덕적인 잣대로 보아서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대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죄많은 어머니'가 연극으로 공연된지 204년 후인 1966년에 프랑스의 현대음악 작곡가인 다리우스 미요(Darius Milhaud: 1892-1974)가 오페라 '죄많은 어머니'를 작곡하여 발표했다. 스위스의 제네바대극장(Grand Théâtre de Genève)에서 초연되었다. 미요의 '죄많은 어머니'는 연극과 마찬가지로 오페라로서도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로시니나 모차르트의 아름답고 재치있는 음악을 기대했던 사람들로서는 다리우스 미요의 음악이 생소하기만 했기 때문인 것도 큰 이유였다. 그보다도 아무래도 '죄많은 여인'의 스토리가 18세기에서처럼 커다란 감동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다리우스 미요의 '죄많은 어머니'는 초연 이후 거의 공연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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