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추가로 읽는 366편

275. 요한 슈트라우스의 '기사 파즈만'

정준극 2011. 11. 5. 17:52

기사 파즈만(Ritter Pázmán)

Knight Pazman - Ritter Pásmán

Johann Strauss Sohn(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유일한 오페라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생전에 약 12편의 오페레타를 작곡했다. 우리가 잘 아는 '박쥐'(Die Fledermaus), '집시남작'(Die Zigeunerbaron) 등이다. 혹자는 이 작품들을 오페라의 범주에 넣어서 설명하지만 음악학자들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오페레타이며 다만 '기사(騎士) 파즈만'(Ritter Pázmán)만이 오페라라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3막의 '기사 파즈만'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유일한 오페라이다. 그러나 짐작컨대 요한 슈트라우스 자신은 그런 구분을 하지 않고 그저 모두 오페라라고 표현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아래의 오리지널 포스터에서도 볼수 있듯이 'Komische Oper in 3 Acten'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기사 파즈만'의 대본은 헝가리 소프론 출신의 극작가인 루드비히 도치(Ludwig (Louis) Dóczy: 1845-1918)가 헝가리의 유명한 시인인 야노스 아라니(János Arany: 1817-1882)의 서술시 '파즈만 로바그'(Pázmán lovag)를 기반으로 완성했다. '기사 파즈만'은 1892년 1월 1일 비엔나의 호프오퍼(Hofoper)에서 초연되었다. 호프오퍼는 오늘날의 비엔나 슈타츠오퍼(Staatsoper)이다.

 

프란츠 요셉 황제 시절에는 호프오퍼라고 불렸던 현재의 비엔나 슈타츠오퍼. '기사 파즈만'이 초연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가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여 호프오퍼에서 공연한다고 발표되자 사람들은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사람들은 슈트라우스가 새로운 왈츠를 발표할 때마다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지만 이번에는 슈트라우스의 첫번째 오페라이기 때문에 더욱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초연의 반응은 뜨거운 것이 아니었다. 평론가들은 '기사 파즈만'의 공연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기사 파즈만'은 호프오퍼에서 단 9회 공연한후 무대에서 사라졌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평론가들은 대본의 내용이 진부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출연자들이 음악적으로 뛰어나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그러나 리하르트 호이버거와 같은 작곡가는 '기사 파즈만'의 오케스트레이션이 대단히 훌륭했다고 찬양하였다. 특히 슈트라우스가 오페라에 나오는 차르다스를 위해서 둘시머(Dulcimer)라는 민속악기를 기용한 것은 훌륭한 조치였다고 내세웠다.

 

헝가리 민속악기인 둘시머

 

오페라의 배경은 르네상스 시기의 헝가리이다. 제1막과 2막은 오페라의 주인공인 기사 파즈만의 시골 성이 무대이다. 기사의 아름다운 부인 에바(Eva: MS)를 비롯하여 하인들은 주인인 파즈만(B)과 일행들이 사냥에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기 위해 연회를 준비하고 있다. 드디어 기사 파즈만 일행이 성으로 돌아온다. 사냥에 참여했던 사냥꾼 중의 한 사람인 어떤 젊은이가 기사 파즈만의 부인 에바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젊은 사냥꾼(T)은 파즈만이 눈치를 채지 못하는 중에 에바의 이마에 키스를 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표시한다. 젊은 사냥꾼이 떠난 후 파즈만은 그 젊은 사냥꾼이 자기 부인인 에바의 이마에 키스를 한 것을 알고 몹시 분노한다. 제3막은 왕궁이 무대이다. 이튿날 파즈만은 부인을 데리고 왕궁으로 가서 왕에게 그 젊은 사냥꾼과 자기 부인을 벌하여 달라고 요청한다. 파즈만은 젊은 사냥꾼에 대한 복수로서 그의 부인에게 키스를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왕은 바로 그 젊은 사냥꾼이 자기라고 밝히고 파즈만에게 왕비(S)의 이마에 키스를 하도록 허락한다.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었다. 제4막은 다시 시골에 있는 기사 파즈만의 성이다. 행복한 연회가 열린다. 1892년 1월 1일의 초연에서 에바 역할은 메조소프라노 마리 르나르(Marie Renard: 1864-1939)가 맡아서 갈채를 받았다.

 

기사 '파즈만'의 포스터

 

[마리 르나르이갸기]

마리 르나르(Marie Renard)는 그라츠 출신의 오페라 메조소프라노이다. 그라츠에서 성악을 공부한 그는 이어 베를린으로 가서 당대의 성악교수인 로사 드 루다(Rosa de Ruda)에게 다시 성악을 공부했다. 오페라에의 첫 데뷔는 1882년 그라츠에서 아주체나(일 트로바토레)로였다. 원래 다른 사람이 부르기로 되어 있었으나 사정상 출연하지 못하게 되어 대타로서 출연하였다. 그라츠에서 1884년까지 활동한 그는 1884-85년 시즌에는 프라하의 독일극장에 전속되어 활약했다. 그리고 1885년에는 베를린의 궁정오페라극장(호프오퍼)에서 '카르멘'과 '미뇽'으로 데뷔하여 갈채를 받았다. 마리 르나르는 1888년까지 베를린 호프오퍼에서 활동하면서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mann)의 '돈나 다이나'(Donna Diana)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는 등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메조소프라노 마리 르나르

                    

마리 르나르는 1888년 비엔나 호프오퍼와 계약하였다. 연봉 1만6천 굴덴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액수였다. 마리 르나르의 최고의 전성기는 비엔나 호프오퍼에서였다. 그는 특히 프랑스 오페라의 주역으로서 사랑을 받았다. 카르멘은 그의 대표적인 역할이었다. 1889년에는 베버의 '세 사람의 핀토' 초연에서 여주인공 역할을 맡았으며 1890년에는 마농(마스네)의 비엔나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다. 베버의 '세 사람의 핀토'는 구스타브 말러가 완성한 버전이었다. 그리고 1892년 1월 1일에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라인 '기사 파즈만'의 세계 초연에서 여주인공인 에바 역할을 맡았다. 그해 2월에는 마스네의 '베르테르' 세계초연에서 샬로테 역할을 맡았으며 1896년 3월에는 골드마르크의 '덤불 속의 귀뚜라미'(Das Heimchen am Herd)의 세계초연에서 프라우 도트(Frau Dot)를 맡았고 1897년에는 차이코브스키의 '유진 오네긴'의 비엔나 초연에서 타티아나 역할을 맡았다.

 

헝가리 민속춤인 차르다스

                         

비엔나에 있으면서 맡았던 다른 역할 들은 '피가로의 결혼'(독일어 버전)에서 케루비노, '돈 조반니'에서 체를리나, 비제의 '쟈밀레'에서 타이틀 롤, 베버의 '마탄의 사수'에서 앵헨,  오버의 '검은 도미노'에서 안젤라,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에서 로잘린데, 푸치니의 '라 보엠'에서 뮤제타,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에서 헨젤 등이었다. 마리 르나르의 고별출연은 1900년 카르멘이었다. 그는 무대에서 은퇴한 후 비로소 저명한 루돌프 킨스키 백작과 결혼하였다. 마리 르나르는 향년 75세로서 고향인 그라츠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