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슈트라우스 왕조

'그레이트 왈츠'의 밀리차 코르유스(Miliza Korjus)

정준극 2012. 2. 16. 09:49

'그레이트 왈츠'의 밀리차 코르유스(Miliza Korjus)

러시아-에스토니아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세기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밀리차 코르유스

 

세기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인 밀리차 코르유스(Miliza Korjus: 1909-1980)는 에스토니아 국적이지만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러시아인이다. 그러면서 '베를린의 나이팅게일'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비엔나에서는 '비엔나의 눈물방울'(Viennese Teardrop)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미국에서 영화배우로도 크게 활동했다. 그로 인하여 아카데미상을 두번이나 받았다. 밀리차 코르유스가 에스토니아인이라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에스토니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제정러시아군의 고위장교로서 초기에는 바르샤바에서 근무했었고 나중에는 에스토니아 전쟁장관의 작전참모를 지냈다. 밀리차 코르유스의 어머니는 폴란드계 리투아니아인으로 귀족이었다. 밀리차 코르유스가 바르샤바에서 태어날 당시의 폴란드는 제정러시아의 일부였다. 밀리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1917년 러시아 혁명 때에 헤어졌다. 아버지는 에스토니아로 돌아갈수 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모스크바를 떠나 키에프에 가서 살았다. 밀리차가 음악교육을 받은 것은 키에프에서였다.

 

'베를린의 나이팅게일'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밀리차 코르유스

 

노래를 잘 부른 밀리차는 아직도 10대의 소녀일 때에 키에프의 어느 합창단의 일원으로 소련의 이곳저곳을 순회하였다. 레닌그라드(현재의 생페터스부르크)에서 공연이 있을 때에 밀리차는 아버지를 찾아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밀리차는 아버지와 재회하였다. 이후에는 발트 국가들과 독일을 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밀리차는 20세 되던 해인 1929년에 독일에서 의사인 쿠노 푈슈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밀리차는 결혼 후에도 계속 독일의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연주활동을 했다. 그리고 1933년에는 드디어 베를린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에 전속될수 있었다. 밀리차는 밝고 아름다운 음성에 미모가 뒷받침이 되어 공연 때마다 커다란 갈채를 받았다. 밀리차의 레코드는 날개 돋힌 듯이 팔렸다. 밀리차의 이름은 전 유럽에서 '베를린의 나이팅게일'이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MGM의 감독인 어빙 탈버그(Irving Thalberg)가 밀리차의 레코드를 들어보고는 면접도 하지 않고 밀리차와 10년간 영화출연을 한다는 전속계약을 맺었다. 밀리차 코르유스는 1938년(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해)에 헐리우드에 도착하였다.

 

영화 '카발레리아 델 임페리오'의 한 장면

 

밀리차의 첫번째 헐리우드 영화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생애를 간접적으로 그렸다고 하는 '그레이트 왈츠'(The Great Wlatz)였다. 뉴욕타임스는 이 영화에 대하여 '밀리차 코르유스 특선'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밀리차 코르유스는 매 웨스트(Mae West)와 닮았다는 이유 때문에 더구나 유명해졌다. 밀리차는 '그레이트 왈츠'에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애인인 칼라 돈너의 역할을 맡아 아카데미 최우수 조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두번째 영화는 19세기 초에 부다페스트와 비엔나 사이에서 마차강도로 유명했던 산도르 로차(Sandor Rozsa)에 대한 것이었다. 산도르 로차는 마차를 타고 가는 승객들을 대상으로 강도행각을 저질렀으나 부자들만 상대하고 일반 백성들의 물건은 건드리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한 일종의 헝가리판 홍길동이었다. 그러나 밀리차는 1940년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다리의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의사는 당장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지만 밀리차는 그것만은 제발 이라고 간청했다. 그로부터 힘든 치료생활이 시작되었다. 결국 영화 '산도르 로차'는 촬영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레이트 왈츠'에서 페르난드 그라베트(요한 슈트라우스), 루이제 마리너(요한 슈트라우스의 첫번째 부인 폴디)와 함께. 밀리차 코르유스는 소프라노 칼라 돈너의 역할을 맡았다.

 

밀리차는 1년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천만다행으로 다리가 온전한 상태로 되었다. 밀리차는 1941년 연주를 위해 남미로 갈수 있었다. 남미를 순회 중에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에스토니아 국적을 가지고 있던 밀리차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멕시코에서 당분간 지냈다. 밀리차는 멕시코에 있으면서 스페인어 영화인 Caballeria del imperio 를 촬영했다. 그러던 중, 뉴욕의 카네기 홀이 밀리차를 초청하는 연주회를 기획하였다. 그래서 밀리차는 1944년에 미국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그후 몇년간 더 미국 각지에서 순회 연주회를 가졌으며 마침내 로스안젤레스에 정착하였다. 밀리차는 월터 섹터(Walter Shector)라는 의사와 재혼하였으며 생활에 여유가 있자 자기 자신의 비스니스로서 비너스 레코드 사업을 펼쳤다. 주로 자기의 노래를 레코드로 만들었다. 밀리차 코르유스는 문화예술에 대한 기여와 특히 어머니의 피를 이어 받은 귀족적인 태도로서 로스안젤레스 상류사회의 주요 인사가 되었다.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와 비벌리 실스등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들이 밀리차 코르유스에게 음악적인 자문을 구한 것은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1932년 독일에 있을 때 태어난 딸 멜리싸 웰스(Melissa Wells)는 미국시민으로서 외교관이 되었다. 멜리싸 웰스는 1998-2001년간 에스토니아주재 미국 대사를 지냈다.

 

'그레이트 왈츠'에서 요한 슈트라우스(페르난드 그라베트)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