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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락의 왕’이 ‘리골레토’가 된 사연

정준극 2012. 1. 3. 14:11

‘일락의 왕’이 ‘리골레토’가 된 사연

 

1850년 베니스의 라 훼니체(La Fenice)극장은 당시 이미 유명해진 베르디에게 새로운 오페라의 작곡을 의뢰하면서 내용은 아무것이나 원하는 대로 택하여도 좋다고 말했다. 베르디는 대본가인 피아베와 어떤 내용의 오페라를 작곡할지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피아베는 이미 에르나니(Ernani), 두명의 포스카리(I due Foscari), 맥베스(Macbeth), 해적(Il Corsaro), 스티펠리오(Stiffelio)의 대본을 썼기 때문에 베르디와는 콤비였다. 베르디와 피아베는 알렉산더 뒤마의 ‘킨’(Kean)을 생각했다.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셰익스피어 배우인 에드먼드 킨의 사생활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베르디는 보다 역동적인 주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피아베는 빅토르 위고의 ‘일락의 왕’(Le roi s'aumse)을 생각하고 그 작품을 강력히 추천했다. 나중에 베르디는 그 작품에 대하여 ‘진정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주제가 훌륭하다. 깊이가 있다. 그리고 주인공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그 작품의 주제는 대단히 논란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빅토르 위고 자신도 당국의 검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마찬가지로 베르디와 피아베의 새로운 오페라도 당시 북부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당국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왕정을 고수하고 있는 입장이고 서로 동맹관계였으므로 왕권을 비판하는 어떠한 활동도 제약을 받았다.

 

베니스의 라 훼니체 극장. 이 극장에서 초연된 오페라는 '아틸라' '라 보엠' '에르나니' '르 마스케르' '리골레토' '시몬 보카네그라' '라 트라비아타' 등이다. 그만큼 유서 깊은 극장이다.

 

 

베르디는 처음부터 검열에 대하여 걱정을 했다. 대본을 쓰는 피아베는 더 걱정을 하였다. 당시 베르디가 피아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런 상황을 잘 알수 있다. “‘일락의 왕’이 검열에 통과될수 있도록 해줄 마땅한 사람을 어서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을 반드시 구해야 한다"고 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프랑스에서도 결국은 빅토르 위고의 '일락의 왕'이 검열을 통과한 것을 생각하고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베르디와 피아베는 아마 오스트리아 당국의 검열을 과소평가했는지도 모른다. 라 훼니체 극장의 사무장으로 베르디의 친구인 브렌나(Brenna)도 설마 위대한 베르디 선생의 작품인데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냐며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다.

 

질다를 농락하는 만투아 공작

 

1850년 여름부터 어떻게 나온 소문인지는 모르지만 오스트리아 당국이 베르디의 새로운 오페라를 검열에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오스트리아가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레제 마제스테(Lese majeste), 즉 왕권에 대한 비난으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만일 베르디가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그대로 오페라로 만든다면 베니스에서도 똑 같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그해 여름이 지날 무렵인 8월말, 베르디와 피아베는 베르디의 고향인 부세토로 돌아가 조용한 가운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부세토로 피신한 또 다른 이유는 당국의 검열에 대비하는 대책을 세우기 구상하기 위해서였다. 베르디는 우선 ‘일락의 왕’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않고 임시로 ‘저주’(The Malediction)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검열관인 드 고르츠코브스키(De Gorzkowski)라는 사람은 스파이를 통해 베르디의 작업 내용을 파악하고는 아무리 제목을 바꾸었다고 해도 내용이 같으므로 허가를 내줄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 얘기를 들은 피아베는 아무래도 내용도 약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리골레토가 몬테로네 백작에게 백작의 딸이 공작에게 농락당한 것을 조롱하고 있다. 이에 몬테로네 백작은 리골레토에게 '너도 언젠가는 딸이 농락당한 아버지의 원한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리골레토는 속으로 움찔한다.

                    

피아베는 이미 허가를 받아 공연되었던 '방돔 공작‘(Il Duca di Vendome)이라는 오페라의 대본을 상당수 빌려서 쓰기로 하고 몇가지 내용도 수정하였다. 오늘날 ’방돔 공작‘이라는 오페라는 누구의 작품이었는지 알려지지도 않은 채 자취를 감추었지만 피아베의 기록에 의하면 국왕은 공작으로 바꾸었고 꼽추 어릿광대와 저주의 내용은 삭제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베르디는 무척 반대하며 원작의 내용대로 놓아두고 검열 당국과 맞서 보자는 입장이었다. 베르디는 대목 대목을 검열 당국과 논쟁을 통하여 해결할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라 훼니체 극장의 사무장인 브렌나가 조정의 역할을 맡았다. 브렌나는 검열 당국에게 위대한 베르디 선생의 창작활동을 제약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크게 실망할 것이라는 점을 적극 강조하였다. 검열관인 드 고르츠코브스키는 유명한 베르디 선생의 활동을 방해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라 훼니체 극장과 검열 당국과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우선 무대를 프랑스의 왕궁으로부터 이탈리아 또는 프랑스의 공작궁으로 바꾸기로 했다. 주인공들은 빅토르 위고의 원본대로 그대로 설정키로 했으나 이름은 변경키로 했다. 공작이 질다의 방에서 나오는 장면은 삭제키로 했고 공작이 주막을 찾아가는 것도 스스로 찾아간 것이 아니라 자객과 어릿광대의 계략에 의해 찾아간 것으로 했다. 꼽추 어릿광대의 이름은 원래 소설에서는 트리뷸레라고 되어 있으나 리골레토로 바꾸었다. 프랑스어의 리골로(rigolo)는 우습다(funny)는 뜻이다. 이와 함께 오페라의 제목도 ‘일락의 왕’이 아니라 ‘리골레토’로 바뀌었다.

 

궁신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있는 리골레토

초연은 글자그대로 대성공이었다. ‘라 돈나 에 모빌레’는 사람들이 다음날 아침부터 거리에서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베르디는 다른 극장들이 리골레토를 허락받지 않고 마음대로 공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극장 사람들은 물론 출연진에게도 리골레토의 멜로디를 최대로 비밀에 붙이도록 당부하였다. 실제로 공작 역의 테너 미라테는 자기 아리아의 악보를 초연 며칠 전에야 받아볼수 있었다. 그리고 특히 공연 전에 ‘라 돈나 에 모빌레’의 멜로디를 부르거나 심지어는 휘파람으로라도 불지 않는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바리톤 바레시의 역할은 많은 사람들은 감동시킨 것이었다. 몇 년 후에 그의 딸인 지울라 코리는 초연 당시를 회상하면서 아버지 바레시가 꼽추로 분장한 것을 몹시 기분 언짢아했다고 전하였다. 바레시는 비록 대단히 경험이 많은 오페라 성악가였지만 자기의 지금까지 이미지가 꼽추 어릿광대로 변경되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차례가 되어 무대에 나서는 것을 꺼려했다고 한다. 이때 무대 뒤에 있었던 베르디가 바레시를 억지로 밀어서 무대로 나가게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바레시는 엎어지면서 무대로 나가야 했다. 사람들은 그런 바레시를 보고 실감있는 연기라고 하며 감동했다. 결과적으로 바레시는 대단한 갈채를 받았다.

 

바리톤 펠리체 바레시(1813-1889). 1851년 리골레토 초연에서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