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위대한 대본가

메타스타시오(Metastasio)

정준극 2012. 1. 10. 05:12

메타스타시오(Metastasio)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

 

메타스타시오는 18세기 오페라 세리아에서 가장 위대한 대본가였다.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가지고 수많은 작곡가들이 오페라를 작곡했다. 당시 바로크와 고전 작곡가들  중에서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가지고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예를 들면, 메타스타시오의 오페라 대본인 '버림받은 디도네'(Didone abbandonata)를 가지고는 약 50명의 작곡가들이 오페라를 만들었고 '올림피아드'(L'Oimpiade)라는 대본으로는 약 60명의 작곡가들이 오페라를 작곡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버림받은 디도네'라는 대본으로는 도메니코 사로(Domenico Sarro: 1724), 니콜라 포르포라(1725), 레오나르도 빈치(1726), 발다싸레 갈루피(1740), 요한 아돌프 하쎄(1742), 니콜로 좀멜리(1747), 주세페 사르티(1762), 니콜리 피치니니(1770), 사베이로 메르카단테(1823) 등이 대표적으로 오페라를 작곡했고 '올림피아드'라는 대본을 가지고 오페라를 작곡한 대표적인 작곡가들은 안토니오 칼다라(1733), 안토니오 비발디(1734),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1735), 레오나르도 레오(1737), 발다싸레 갈루피(1748), 요한 아돌프 하쎄(1756), 토마소 트라에타(1758), 니콜리 좀멜리(1761), 니콜로 피치니니(1761), 빈센초 만프레디니(1762), 안토니오 사키니(1763), 요세프 미슬리베체크(Josef Myslivecek: 1778), 도메니코 치마로사(1784), 조반니 파이시엘로(1786), 게타노 도니체티(1817: 미완성) 등이다.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인 '올림피아드'를 가지고 60명 이상의 바로크 및 고전 작곡가들이 오페라로 만들었다.

 

메타스타시오의 대표적인 오페라 대본은 다음과 같다. ○ '누미디아의 왕 시파체'(Siface rè di Numidia: 1723) ○ '버림받은 디도네'(Dodone abbandonata: 1724) ○ '카나리의 임프레사리오'(L'impresario delle Canarie: 1724) ○ '페르시아 왕 시로에'(Siroe rè di Persia: 1726) ○ '우티카의 카토네'(Catone in Utica: 1728) ○ '에치오'(Ezio: 1728) ○ '인도의 알레산드로'(Alessandro nell'Indie: 1729) ○ '세미라미데 리코노스키우타'(Semiramide riconosciuta: Semiradine Recognized: 1729) ○ '아르타세르세'(Artaserse: 1730) ○ '데메트리오'(Demetrio: 1731) ○ '시리아의 아드리아노'(Adriano in Siria: 1732) ○ '이시필레'(Issipile: 1732) ○ '데모폰테'(Demofoonte: 1733) ○ '올림피아드'(L'Olimpiade: 1733) ○ '티토의 자비' (La clemenza di Tito: 1734) ○ 스키로의 아킬레'(Achille in Sciro: 1736) ○ '치로 리코노스키우토'(Ciro riconosciuto: 1736) ○ '테미스토클레'(Temistocle: 1736) ○ '체노비아'(Zenobia: 1740) ○ '안티고노'(Antigono: 1743) ○ '이페르메스트라'(Ipermestra: 1744) ○ '아틸리오 레골로'(Attilio Regolo: 1750) ○ '목동 왕'(Il re pastore: 1751) ○ '에로에 치네세'(L'eroe cinese: 1752) ○ '니테티'(Nitteti: 1756) ○ '클레리아의 승리'(Il trionfo di Clelia) ○ '로몰로와 에르실리아'(Romolo ed Ersilia) ○ '루지에로'(Ruggiero: 1771)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에 모차르트가 음악을 만든 오페라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 티투스 황제의 자비)

 

메타스타시오는 오라토리오, 칸타타, 칸쪼니테, 축제 작품, 무대 작품 등을 위해서도 수많은 대본과 시를 썼다. 오라토리오는 우리의 관심이 있는 분야이므로 그가 쓴 오라토리오 대본을 살펴보면, ○ '성탄생 축제'(Per la festivita del santo natale: 1727) ○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La passione di Gesu Cristo: 1730) ○ '갈보리의 성 엘레나'(Sant'Elena al Calvorio: 1731) ○ '아벨의 죽음'(La morte d'Abel: 1732) ○ '주세페 리코노스키우토'(Giuseppe roconosciuto: 1733) ○ '베톨리아 해방'(La Betulia Liberata: 1734: 모차트트 작곡) ○ '유대왕 요아스'(Gioas re di Giuda: 1735) ○ '구원자 이삭'(Isacco figura del Redentore: 1740) 등이 있다. 아무튼 대단한 사람이었다.  메타스타시오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인 토르콰토 타소(Torquato Tasso: 1544-1595), 17세기 시인인 지암바티스타 마리노(Giambattista Marino: 1569-1625), 로마제국 시대의 시인인 오비드(Ovid: BC 43-AD 17/18)를 크게 존경하였으며 이들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감동과 영감을 받았다. 그러면 도대체 이렇듯 위대한 메스타시오는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비엔나의 미노리텐교회에 가면 메타스타시오의 기념상과 석관이 있다. 이것은 또 어떻게 된 사연인지를 알아보자.

 

메타스타시오가 대본을 쓰고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가 음악을 만든 오라토리오 '유대왕 요아스'의 음반

 

바로크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페라 5백년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대본가인 메타스타시오는 1698년 로마에서 태어나 1782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세였다. 그런데 메타스타시오는 필명이며 원래 이름은 피에트로 안토니오 도메니코 트라파씨(Pietro Antonio Domenico Trapassi)이다. 그의 아버지인 펠리체 트라파씨는 원래 아씨시(Assisi) 출신으로 로마의 바티칸을 경비하는 코르시카 연대에서 복무한 군인이었다. 펠리체는 로마에서 볼로냐 출신의 프란체스카 갈라스티라는 여인을 만나 결혼하였다. 펠리체는 결혼후 경비대를 사퇴하고 식료품 상점을 열었다. 지금도 펠리체가 운영하였던 식료품점의 자취가 비아 데이 카펠라리(Via dei Cappellari)에 남아 있다. 펠리체는 2남 2녀를 두었다. 메타스타시오는 둘째 아들이었다. 이렇듯 별로 중요치도 않은 사항을 소개하는 것은 별로 중요치도 않은 집안에서 여러 형제자매 중의 하나로 태어난 메타스타시오가 훗날 대단히 위대한 시인 겸 대본가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 되었음을 강조코자 함이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문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지만 메타스타시오는 하늘의 축복을 받아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놀라운 문학적 재능을 보여주어 주위 사람들을 감탄케 만들었으니 사람의 재능이란 선천적 또는 유전적이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케 하는 일이 아닐수 없다.

 

로마의 피아짜 델라 키에사 누오바(Piazza della Chiesa Nuova)에 있는 메타스타시오 기념상

 

[그라비나와의 인연]

될성 부른 나무는 떡닢, 즉 어릴 때부터 알아본다는 말처럼 피에트로는 어릴 때부터 놀라운 문학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피에트로는 길거리에서 행인들이 무슨 제목을 말하면 그 제목에 대한 즉흥시를 지어 소리 높이 읊는 바람에 큰 인기를 끌었다. 말하자면 누가 '사랑'이라는 제목을 말하면 피에트로가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운문시를 즉석에서 만들어 읊는다는 것이다. 1709년의 어느날, 피에트로가 고작 10세 때에, 그날도 거리에서 즉석시를 지어 읊어서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의 신사분들이 거리를 지나다가 피에트로의 시낭송을 듣고 그 소년을 무척 신통하게 여겼다. 한 사람은 조반니 빈센초 그라비나(Giovanni Vincenzo Gravina)로서 당시 로마 사회의 지식계급의 모임인 아르카디아 아카데미(Arcadian Academy)의 주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법과 문학에 대하여도 해박한 지식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로렌치니(Lorenzini)로서 말하자면 문학평론가였다. 그라비나는 아주 매력적으로 생긴 그 소년의 시에 대한 재능에 감동했다. 그래서 피에트로를 프로테제(protégé)로 받아 들였다. 프로테제는 피보호자라는 뜻이지만 생각에 따라서는 자식처럼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말이다. 피에트로의 아버지인 펠리체 트라파씨는 훌륭한 그라비나가 피에트로에게 제대로 공부할수 있는 기회를 주고 훗날 사회생활을 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하자 두말 없이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라비나는 우선 피에트로의 이름을 그리스식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래야 사회적으로나 문학적으로 그럴듯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피에트로 트라파씨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가 되었다. 그라비나는 수양아들 격인 메타스타시오가 자기처럼 법률가가 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아직 소년인 메타스타시오에게 법학과 라틴어를 배우도록 했다. 그렇다고 메타스타시오의 문학적 재능을 도외시하지는 않았다. 그의 문학적 재능을 더욱 갈고 닦기 위해 여러 모로 보살펴 주었다. 메타스타시오는 얼마후부터 그라비나의 저택에서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시를 읊어서 그의 문학적인 천재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결과, 메타스타시오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즉흥시인들과 경쟁해도 지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낮에는 이것저것 공부만해야 했고 밤에는 즉흥시에 매달려 살아야 했기 때문에 소년 메타스타시오의 건강은 모르는 사이에 크게 악화되었다.

 

어느때 그라비나는 칼라브리아 지방으로 사업차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메타스타시오를 데리고 갔다. 그라비나는 나폴리의 문학계에 메타스타시오의 재능을 전시하였다. 이어 그라비나는 메타스타시오를 스칼레아라는 해안가 마을에 사는 부유한 친척인 그레고리오 카로프레세의 집에서 지내도록 주선해 주었다. 메타스타시오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 해안의 조용함과 맑은 공기로 인하여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라비나는 메타스타시오를 다시는 즉흥시를 읊는 일에나 열중하도록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대신에 좀 더 수준이 높은 문학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인이 존경하는 위대한 시인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메타스타시오는 자기 파트론의 기대에 부응했다. 메타스타시오는 고작 12세 때에 호머의 일리아드(Iliad)를 8행 스탠자로 번역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2년 후에는 지안 조리지오 트리시노(Gian Giorgio Trissino)의 서사시인 '이탈리아 리베라타'(Iltalia liberata)로부터 주제를 얻어 세네카 스타일의 비극을 만들었다. '이탈리아 리베라타'는 그라비나가 가장 애호하는 서사시였다. 메타스타시오의 비극은 '주스티노'(Giustino)라고 불렀는데 42년 후에야 출판되었다. 이에 대하여 메타스타시오는 소년시절의 힘든 추억을 되새기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출판을 미루어 왔었다고 말했다. 1714년, 메타스타시오의 건강을 위해 해안의 저택에서 지내게 해준 카로프레세가 세상을 떠났다. 카로프레세는 그라비나를 상속인으로 지정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718년에 그라비나도 세상을 떠났다. 이에 따라 메타스타시오는 그라비나로부터 무려 1만 5천 스쿠디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메타스타시오는 뜻밖의 재산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릴수 있게 되었다.

 

[로마의 유명인사]

메타스타시오는 이제 20세의 청년이 되었다. 메타스타시오는 지난 4년 동안 수도승의 복장을 하고 지냈다. 어떤 작은 수도회에 속한 수도승처럼 행동했다. 바티칸이 있는 로마에서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으며 지내자면 수도승 복장을 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로마의 생활에 어느정도 익숙해 졌고 더구나 많은 돈을 상속받자 수도승의 옷을 벗어던지고 부유스런 생활을 추종하기 시작했다. 메타스타시오는 지난날의 드라마와 같은 생활, 아름다운 모습, 매력적인 맨너,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인하여 사람들로부터 점차 인기를 얻게 되었다. 2년 쯤 지나자 가지고 있던 돈도 다 소비했다. 메타스타시오는 정신을 차리고 무언가 안정된 직업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폴리로 간 그는 그곳에서 유명한 변호사인 카스타뇰라의 사무실에 들어갈수 있었다. 그러나 변호사사무실의 생활은 힘든 것이었다.

 

메타스타시오는 법의 노예가 되어 생활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고난 재능을 어쩔수이 펼쳐보이지 않을수 없었다. 1721년에 그는 에피탈라미움(Epithalamium)을 썼다. 에피탈라미움이란 것은 예를 들어 결혼 초야에 신방으로 향하는 신부를 위한 시를 말한다.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이 시작되는 것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이와 함께 그는 아마도 그의 첫 음악세레나데라고 할수 있는 '엔디미오네'(Endimione)를 완성했다. '엔디미오네'는 메타스타시오의 후원자 중의 한 사람인 돈나 안나 프란체스카 라바스키에리 피넬리 디 산그로와 돈 안토니오 피냐텔리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신랑은 나중에 벨몽테(Belmonte)의 군주가 된 사람이며 따라서 돈나 안나는 벨몽테의 왕비가 되었다. 1722년, 메타스타시오가 24세의 약관일 때에 나폴리 총독은 그에게 왕비의 생일을 기념하는 세레나타를 써 달라고 청탁했다. 세레나타는 일종의 음악극이다. 메타스타시오는 누가 썼는지는 비밀로 하기로 하고 대본을 맡았다. 메타스타시오가 쓴 세레나타는 '글리 오르티 에스페리디'(Gli orti esperidi)라는 제목이었다. 니콜라 포르포라(Nicola Porpora)가 음악을 붙였고 노래는 포르포라의 제자인 카스트라토 화리넬리(Farinelli)가 불렀다. 나중에 위대한 카스트라토가 된 바로 그 화리넬리였다. 이날 화리넬리의 데뷔는 스펙터클한 것이었다. 공연은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모두들 누가 대본의 시를 썼는지를 두고 궁금해 했다. 세레나타에서 비너스의 역할을 맡았던 당대의 프리마 돈나인 마리안나 불가렐리(Marianna Bulgarelli: 1684-1734)는 젊은 메타스타시오가 대본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나서는 메타스타시오를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다.

 

18세기 이탈리아의 소프라노인 마리안나 불가렐리(또는 마리아 안나 벤티). 메타스타시오가 대본을 쓰고 니콜라 포르포라가 작곡한 '버림받은 디도네'(Didone abbandonata)에서 디도네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메타스타시오보다 14세 연상이었지만 오랫동안 동반자로서 지냈다.

 

불가렐리는 메타스타시오에게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설득했다. 불가렐리는 만일 메타스타시오가 그의 재능을 뮤지컬 드라마(오페라의 형태)를 위해서 헌신한다면 높은 명예를 보장 받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불가렐리는 이미 결혼한 처지였지만 메타스타시오는 불가렐리의 집에서 살았다. 메타스타시오는 불가렐리의 저택에서 열리는 예술가들의 모임을 통해서 요한 아돌프 하쎄,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 알레산드로 스칼라티, 레오나르도 빈치, 레오나르도 레오, 프란체스코 뒤랑(Francesco Durante), 베네데토 마르첼로 등 당대의 훌륭한 작곡가들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나중에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가지고 오페라들을 작곡한 사람들이다. 메타스타시오는 불가렐리의 집에서 지내면서 성악을 배웠고 음악적인 멜로디의 아름다움과 성악가들의 노래 스타일을 감상하는 법을 배웠다. 예를 들어 화리넬리의 노래 스타일을 공부한 것은 훗날 그가 오페라 대본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었다. 메타스타시오가 쓴 대본의 스토리는 종이 위에서는 사랑을 토픽으로 한 형식적이고 상투적일지 모르며 연극의 상황으로 보면 황당무계한 것일지 모르지만 일단 여기에 음악을 붙이게 되면 그런 비평은 사라지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메타스타시오는 그리스나 로마제국 시대의 역사적인 사실을 주로 테마로 삼았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그런 서사시적 내용을 흠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메타스타시오의 작품들은 사람들에게 쉽게 어필했다.

 

불가렐리는 자기보다 훨씨 나이 어린 메타스타시오에 대하여 마치 모성이라도 보여주듯, 그리고 어느정도 로맨스를 느끼며, 또한 그의 재능을 몹시 사랑하여 그야말로 열정을 쏟으며 그를 돌보아 주었다. 예전에 그라비나가 메타스타시오에게 쏟았던 애정보다도 더 짙은 것이었다. 심지어 불가렐리는 메타스타시오의 가족들, 즉 메타스타시오의 아버지, 어머니, 동생들을 모두 자기의 저택으로 불러서 함께 지내도록 했다. 이것만 보아도 불가렐리가 얼마나 메타스타시오를 끔찍히 위했는지는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메타스타시오는 불가렐리의 보살핌과 애정에 영향을 받아 '버림받은 디도네', '우티카의 카토네', '에치오', '인도의 알레산드로', '세미라미데 리코노스키우타', '시로에', '아르타세르세' 등 불후의 대본을 완성했다. 이들 대본을 가지고 당대의 저명한 작곡가들이 오페라로 만들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는 사실이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나이는 속일수 없어서 불가렐리는 점점 늙어갔다. 불가렐리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그만두어야 했다. 메타스타시오는 불가렐리의 친절을 오히려 귀찮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독립을 하고 싶었다. 메타스타시오는 그가 대본을 쓴 오페라가 공연될 때마다 300 스쿠디의 돈을 받았다. 그 정도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고정적인 수입이 있기를 바랐다. 마침 1729년 9월에 비엔나 궁정극장(부르크테아터)이 메타스타시오를 연봉 3천 플로린스로서 상주시인으로 초청하였다. 메타스타시오는 즉시 수락했다. 불가렐리는 메타스타시오의 장래를 위해 오히려 그의 앞날에 영광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불가렐리는 비록 메타스타시오가 비엔나에서 살게되었지만 로마에 있는 그의 가족들을 계속 돌보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메타스타시오는 비엔나로 향하였다.

 

[비엔나와 메타스타시오]

1730년 여름, 메타스타시오는 그가 32세 때에 비엔나에 정착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미하엘러하우스'(Michaelerhaus)라고 불리는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아마 현재의 미하엘러플라츠 3번지에 있는 로스하우스라고 생각되는 건물이다. 1730년은 메타스타시오의 예술활동에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여는 해였다. 그로부터 메타스타시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메타스타시오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그가 비엔나에서 활동할 기간 중인 1730년부터 1740년 사이에 완성된 것이다. 이 기간 중에 그는 비엔나 궁정극장을 위해 '아드리아노', '데메트리오', '이시필레', '데모폰테', '올림피아드', '티토의 자비', 스키로의 아킬레', '테미스토클레', '아틸리오 레골로' 등을 완성했다. 메타스타시오의 집필 스피드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아킬레'는 18일만에 완성했다. '이페르메스트라'는 불과 9일만에 완성했다. 메타스타시오가 대본을 쓰기 시작하면 어찌나 속히 완성하는지 그 대본을 받아 작곡을 해야 하는 작곡가들이나 사보가들, 그리고 오페라를 공연할 성악가들은 그냥 허둥지둥하기가 일수였다. 메타스타시오는 오페라 대본이라는 특별한 예술분야에 대하여 세세한 부분까지 잘 알고 있었다. 로마와 나폴리에서 축적한 경험이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메타스타시오는 오페라의 관중들이 누구인지를 알고서 대본을 썼다.

 

비엔나 1구 미하엘러플라츠 3번지의 로스하우스. 비엔나에 온 메타스타시오가 이곳에서 잠시 지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비엔나에서의 활동은 비엔나라는 특별한 사회로 볼 때에 그다지 대단한 성공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하찮은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귀족 서클로부터 은근히 소외되었기 때문이었다. 메타스타시오는 그런 차별을 극복이라도 하려는듯 알트안(Althann) 백작부인이라는 여인과 특별히 친하게 지냈다. 알트안 백작부인은 과거에 로마에 있을 때에 메타스타시오의 파트론 중의 하나였던 벨몽테 공녀의 동서였기 때문에 그런저런 사연으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알트안 백작부인은 얼마전 남편과 사별하였다. 그리고 한 때는 황제가 가장 총애하는 여인으로 알려질 정도로 황제와 가까운 사이였다. 메타스타시오와 알트안 백작부인의 사이는 누가 보더라도 너무나 가깝게 보여서 심지어는 두 사람이 비밀결혼을 하지 않았느냐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건 그렇고 로마에 남아 있는 불가렐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불가렐리는 메타스타시오가 비엔나에서 내내 지내게 되자 함께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메타스타시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비엔나의 궁정극장으로부터 역할을 받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메타스타시오는 그런 불가렐리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했다. 사실상 메타스타시오는 불가렐리에 대하여 지쳐 있었다. 메타스타시오는 불가렐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비엔나에 올 필요가 없다고 설득하였다. 편지의 내용은 비엔나에 오지 말라는 것이었지만 편지를 받아본 불가렐리는 메타스타시오가 쓴 글의 표현을 읽고서는 '이럴수가?'라고 말할 정도로 놀라고 분했다. 불가렐리는 당장 비엔나로 가서 메타스타시오와 따져 보기로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차를 타고 로마를 떠나 비엔나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가렐리는 자기의 모든 재산을 이미 메타스타시오에게 남겼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메타스타시오의 마음은 비통함과 후회로 넘쳐 있게 되었다. 메타스타시오는 자기에게 상속된 그 많은 재산을 받지 못하겠다고 거절하였다. 로마에 있던 불가렐리의 식구들은 물론, 메타스타시오의 식구들은 메타스타시오의 그런 결단에 크게 혼돈되었다. 불가렐리의 남편은 자기에게 재산권이 있다고 주장하였고 재혼하였다. 메타스타시오의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들은 불가렐리의 집에서 나와 거리를 헤맬 정도가 되었다.

 

콜마르크트 11번지의 미하엘러하우스의 현재의 모습. 하이든은 슈테판성당의 합창단을 그만두고 이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메타스타시오의 비엔나 생활은 여러가지 변화, 그리고 날씨 때문에 힘든 것이었다. 메타스타시오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쳐 있었다. 메타스타시오는 대략 1745년 이후부터는 별로 집필 활동을 하지 않았다. 글을 쓰더라고 오페라 대본보다는 칸타타와 칸초네타에 치중하였다. 칸초네타인 Ecco quel fiero istante는 친구인 화리넬리에게 보낸 것으로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1755년에 비엔나에서 가장 가깝게 지냈던 알트안 백작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이후로 메타스타시오는 친구들의 모임에 별로 참석하지 않았다. 간혹 친구로서 귀족인 마르티네즈(Martinez)에 집에 놀러가서 마르티네즈의 식구들과 지내거나 사람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었으나 알트안 백작부인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그나마도 가지 않았다. 메타스타시오는 말년을 대개 혼자서 지내다가 1782년 4월 12일 비엔나의 콜마르크트 가쎄(Kohlmarkt Gasse)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메타스타시오는 자기의 전 재산인 13만 플로린스를 친구인 마르티네즈의 여섯 아이들에게 모두 상속했다. 물론 그는 그동안 이탈리아에 있는 식구들도 돌보았었다. 메타스타시오의 시신은 1구 헤렌가쎄에 있는 미노리텐교회에 안치되었다. 미노리텐교회는 비엔나에 거주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센터가 되는 교회이다. 교회 안에는 메타스타시오의 기념상도 설치되었다. 기념상 하단에는 그의 임종을 그린 부조가 있다. 교황 비오 6세가 병자성사를 집전하고 있고 그 옆으로 하이든, 살리에리, 모차르트가 서 있는 부조이다.

 

미노리텐키르헤(교회)에 있는 메타스타시오의 영묘 하단의 부조.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침상 위의 메타스타시오 뒤편에 서있으며 애통해 하고 있다.

 

메타스타시오는 약 40년이나 비엔나에서 지냈다. 말년에는 거의 작품을 쓰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인기는 유럽 전역에서 결코 시들지 않았다. 그는 비엔나에서 약 40편의 작품을 썼다. 모두 이탈리아어로 쓴 것이다. 이들 중에서 대부분은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현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메타스타시오 작품 하나를 가지고 여러 작곡가들이 오페라를 작곡한 경우가 많았다. 오페라로 만든 메타스타시오의 작품들은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정상급 성악가들이 노래로 불렀다. 유럽 여러나라의 예술원들은 메타스타시오를 명예회원으로 모셨다. 비엔나 콜마르크트에 있는 그의 집에는 낯선 나그네들이 자주 찾아온다. 위대한 시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미노리텐교회의 메타스타시오 영묘를 찾아간다. 그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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