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위대한 대본가

에마누엘 쉬카네더

정준극 2012. 1. 10. 05:14

에마누엘 쉬카네더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의 대본 작성

 

              

에마누엘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 1751-1812)는 독일의 흥행가, 극작가, 배우, 성악가, 작곡가이다. 쉬카네더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 피리'의 대본을 쓴 사람이며 그 오페라가 초연된 비엔나의 '빈강변극장'(Theater an der Wien)을 설립한 사람이다. 쉬카네더는 당대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난 극장인이었다.

 

쉬카네더는 1751년 바바리아의 슈트라우빙(Straubing)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요한 요셉 쉬카네더였다. 쉬카네더의 부모는 두 사람 모두 어떤 집의 하인으로 일했다. 쉬카네더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쉬카네더의 아버지는 쉬카네더가 세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어린 네 아이들을 데리고 레겐스부르크로 이사와서 어떤 성당에 붙어 있는 헛간을 빌려 살면서 목제 성상들을 팔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지냈다. 쉬카네더는 쇼프(Schopf)라는 극단에 속하게 되었으며 26세 때에 같은 극단에 있는 여배우인 엘레오노레(Eleonore)와 결혼하였다. 쉬카네더와 같은 나이였다. 그런데 쉬카네더는 상당히 바람끼가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쉬카네더는 두 명의 혼외 자녀를 두었는데 두 아이 모두 어머니가 달랐다고 한다. 그런데도 엘레오노레는 꾹 참고 지냈으며 더구나 남편 쉬카네더를 내조하는데 성의를 다 하였다. 1788년에 쉬카네더를 뷔덴극장(Theater auf der Wieden)에 들어가게 만든 것도 착한 아내 엘레오노레의 내조때문이었다. 엘레오노레는 쉬카네더보다 9년이나 더 살아서 1821년에 세상을 떠났다.

 

쉬카네더는 레겐스부르크에서 예수회학교에 다녔다. 그러면서 성당에서 노래공부를 했다. 안드레아스 쇼프 극단에 들어간 그는 오페라, 코미디, 징슈필 등 기회있는대로 출연했다. 인스부르크 궁전에서는 발레를 추기까지 했다. 그는 작곡도 했다. 주로 징슈필을 작곡했다. 대본도 물론 그가 썼고 직접 출연하여 노래도 불렀다. 그의 첫번째 징슈필인 Lyranten은 1775년 인스부르크 궁전에서 첫 선을 보였다. 대성공을 거두었다. 계속 공연이 되었다. 그는 참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쉬카네더는 1777년에 뮌헨에서 햄릿을 공연했다. 상당한 찬사를 받았다. 그해에 쉬카네더와 그의 부인 엘레오노레는 뉘른베르크에 본거지를 둔 요셉 모저(Joseph Moser)의 극단에 들어갔다. 이듬해에 요셉 모저는 그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만사가 귀찮다고 하며 극단의 운영을 쉬카네더에게 맡겼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780년, 쉬카네더는 잘츠부르크에 상당기간 체류하였다. 이때 모차르트의 가족과 알고 지내게 되었다. 모차르트의 가족은 쉬카네더를 주일날 오후에 집으로 초대하여 모차르트 가족들이 즐겨하는 다트 놀이(Boelzschiessen)를 함께 하였다. 쉬카네더는 1784년 11월부터 1785년 2월까지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극장에서 있을 공연에 출연하게 되었다. 요셉 2세 황제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요셉 2세 황제는 얼마전 프레스부르크에서 쉬카네더의 공연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쉬카네더를 비엔나에 초청하였던 것이다. 비엔나에서 쉬카네더의 공연은 큰 찬사를 받았다. 가끔 황제가 직접 참석하는 바람에 더 관심을 끌었다. 쉬카네더와 캐른트너토르극장장인 후버트 쿰프(Hubert Kumpf)는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와 하이든의 '보상받은 정절'(La fedelta premiata: Fidelity rewarded)을 리바이벌하기로 합의했다.

 

당시는 계몽주의 사상이 싹트고 있던 때였다. 쉬카네더는 Der Fremde(이방인)이라는 타이틀의 코미디를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주인공은 젤텐라이히(Seltenreich)남작이었다. 젤텐라이히라는 말은 '별볼일 없는 부자'라는 뜻으로 주인공은 비엔나 사회에서 수다만 떠는 인물을 의미했다. 일종의 귀족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공연은 별 탈이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쉬카네더는 한 발 앞서 나갔다. 보마르셰의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피가로의 결혼'은 귀족을 비웃고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공연은 황제의 명으로 취소되었다. 사람들은 쉬카네더가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곤경을 겪을 것으로 짐작했다. 하지만 황제는 우악하게도 쉬카네더를 궁정극장(부르크테아터)에서 공연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쉬카네더는 부르크테아터에서 글룩의 징슈필인 '메카에서 온 순례자'(Die Pilgrime von Mekka)의 조역을 맡아 데뷔하였다. 쉬카네더는 부르크테아터에서의 배역에 불만이었다. 그는 햄릿이나 오텔로와 같은 주역을 맡기를 원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쉬카네더는 자기의 극장을 가져 마음대로 공연하고 싶었다. 그래서 황제에게 새로운 극장을 세우고자 하니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단, 비엔나의 교외에 세우겠다고 제안했다. 황제는 즉시 허락했다. 하지만 계획은 그다지 진척되지 못하였다. 쉬카네더는 할수 없이 새로운 유랑극단을 만들어 지방순회 공연을 나섰다. 잘츠부르크에서는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와 만나 친분을 새롭게 하였다.

 

1788년에 요한 프리델과 엘레오노레가 합작한 순회극단은 비엔나 교외에 있는 뷔덴극장에 정착하였다. 현재는 비엔나의 4구로서 도심에서 가깝지만 당시는 뷔덴(Wieden)이 비엔나 교외였다. 그런데 이듬해에 요한 프리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요한 프리델은 모든 뒷일을 엘레오노레에게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요한 프리델의 극단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엘레오노레는 쉬카네더에게 화해를 청하였다. 1785년 쉬카네더의 부인인 엘레오노레는 쉬카네더의 부정한 연애활동을 더 이상 두고보지 못하여 쉬카네더를 떠나 쉬카네더의 과거 동료였던 요한 프리델의 순회극단에 들어갔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되느라고 요한 프리델이 얼마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것을 엘레오노레에게 맡겼다. 엘레오노레로서는 극단을 맡아서 운영하는 일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결국 비록 헤어졌지만 어쩔수 없이 쉬카네더에게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하고 도움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쉬카네더는 엘레오노레와 합심하여 새로운 극단을 만들고 재정 후원자도 한 사람 주선하였다. 모차르트와는 프리메이슨의 형제인 요셉 폰 바우에른펠트(Joseph von Bauernfeld)였다. 새로운 극단은 오페라에 주력키로 했다. 쉬카네더는 두 명의 성악가를 단원으로 영입하였다. 테너 베네딕트 샤크(Benedikt Schack)와 베이스 프란츠 사버 게를(Franz Xaver Germ)이었다. 쉬카네더는 엘레오노레가 데리고 있던 단원 중에서 소프라노 요제파 호퍼(Josepha Hofer) 등을 계속 데리고 있기로 했다. 뷔덴극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새로운 극단(오페라단)은 성공적이었다. 오페라 '후궁에서의 도주'는 중요한 레퍼토리의 하나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극단이 나중에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의 초연에 적극 참여하였다. 쉬카네더 오페라단은 두가지 방향에서 공연을 하였다. 하나는 코믹오페라였다. 예를 들면 Der Dumme Gartner aus dem Gebirge(산골에서 온 어리석은 정원사)이다. 또 하나의 방향은 동화와 관련된 작품을 공연하는 것이었다. 파울 브라니츠키(Paul Wranitzky)가 음악을 붙인 '오베론'을 공연한 것은 대표적인 예였다. 이와 함께 뷔덴 극장의 무대를 현대화하여 사람이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는 장치, 비밀 통로, 천둥과 번개, 불이 나거나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특수효과 등을 낼수 있게 하였다. 동화 오페라 공연의 일환으로 주선된 것이 1791년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였다. 대본은 이미 밝힌바대로 쉬카네더 자신이 만들었다. 프리메이슨적인 요소도 포함하였고 전설적인 동화의 내용도 포함하였다. 쉬카네더는 한스부르스트(Hanswurst)의 전통을 반영한 파파게노를 맡았다.

 

혹자는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가 오늘날 나슈마르크트에 면하여 있는 링케 빈차일레(Linke Wienzeile)의 '빈강변극장'(Theater an der Wien)에서 초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니다. 현재 오페른가쎄 26번지와 파울만가쎄(Faulmanngasse) 1번지에 걸쳐 있는 건물에서 초연되었다. 당시에 '뷔덴극장'(Theater auf der Wieden), 또는 프라이하우스테아터(Freihaustheater)라고 불렀던 건물이다. 현재는 파파게노 호프(Papageno-Hof)라고 불리며 벽면에 '마술피리'가 1791년 9월 30일에 초연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파파게노의 모습이 그려진 조각이 있어서 당시의 공연을 기념하고 있다. 쉬카네더는 뷔덴극장을 인수하여 운영하였으며 나중에 현재의 링케 빈차일레에 있는 빈강변극장을 건설하여 운영하였다. 빈강변극장의 앞길은 링케 빈차일레이지만 뒷면은 레하르가쎄이고 옆면에는 파파게노토르가 있는 밀뢰커가쎄이다. 빈강변극장과 인접하여서는 베토벤 호텔이 있다. '뷔덴극장'은 1787년부터 1801년까지 14년 동안 운영되다가 문을 닫았다.

 

현재의 오페른가쎄 26번지 파파게노 호프에 설치되어 있는 '마술피리' 초연 기념조각

 

'마술피리'에는 파파게노와 파파게나가 처음 만났을 때 감격적으로 부르는 듀엣이 있다. 모차르트는 처음에 두 사람이 '파파게노!' '파파게나!'라고 울부짖듯 소리치는 것으로 시작하게 작곡하였다. 그러나 쉬카네더가 그건 곤란하다고 하며 두 사람은 말을 할수 없는 벙어리가 되었다가 그제서야 입이 열려 말을 하게 되었으므로 처음부터 풀 네임을 부르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하여 더듬거리는 것으로 시작하도록 자문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파파게노가 '파-파파파-파-파'라면서 더듬으며 말을 시작하면 파파게나도 '파-파파파-파-파'라며 더듬다가 나중에 드디오 '파파게노' '파파게나'라고 말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제2막의 시작과 함께 나오는 승려들의 행진곡도 쉬카네더의 제안을 받아들여 모차르트가 마지막 순간에 추가한 곡이라고 한다. 뷔덴극장에서의 '마술피리' 공연은 대성공이어서 매일 공연이 표가 매진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몇달 동안 수백회의 공연을 가졌다고 한다. 몇달 후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쉬카네더는 크게 애통하였다. 그래서 어느 날의 공연은 모차르트를 위한 자선공연으로 주선했다. 그때 모차르트의 미망인인 콘스탄체는 재정적으로 궁핍하였으므로 도움을 주기 위해 그날 공연의 수익을 모두 콘스탄체에게 제공했다는 것이다.

 

1791년 9월 30일 뷔덴극장에서의 '마술피리' 초연에서 파파게노 역할을 맡은 쉬카네더

 

쉬카네더는 '마술 피리' 이후에도 계속 오페라를 공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물론 그가 주역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차르트의 제자 겸 조수인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Franz Xaver Süssmayr)의 '아르카디아의 거울'(Der Spiegel von Arkadien), 모차르트의 사후 매제가 된 야콥 하이벨(Jakob Haibel)의 '티롤의 하얀 빵'(Der Tyroler Waster), 페터 폰 빈터(Peter von Winter)의 '마술 피리' 후편인 '미로'(Das Labyrinth) 등을 공연하였다. 한편, 쉬카네더는 뷔덴극장을 아카데미의 연주회를 위해 제공하기도 했다. 모차르트, 하이든의 심포니가 연주되었고 젊은 베토벤이 피아노 솔리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쉬카네더가 중시한 것은 모차르트의 오페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후궁에서의 도주' '피가로의 결혼' '음악감독' '돈 조반니' '여자는 다 그래' '티토의 자비'를 중점 공연하였다. 쉬카네더의 공연은 성공적이었지만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날이 갈수록 빚에 허덕이게 되었다. 다행히 바르톨로매우스 치터바르트라는 부유한 상인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을수 있어서 집세를 낼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적자운영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마술피리'의 한 장면. 미시간오페라

쉬카네더와 파트너인 치터바르트는 새로운 대극장을 건설한 필요성을 느꼈다. 치터바르트는 빈강변에 새로운 극장 건설을 위한 부지를 매입하였다. 사실상 뷔덴극장으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그렇게 하여 빈강변극장(Theater an der Wien)이 1800년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빈강변극장은 1801년 6월 13일에 오픈하였다. 프란츠 타이버(Franz Tyber)가 음악을 만들고 쉬카네더 자신이 대본을 쓴 오페라 '알렉산더'(Alexander)가 개관기념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빈강변극장은 당시 비엔나에 있는 어느 극장보다도 화려하고 웅장한 것이었다. 실제로 가장 규모가 컸다. 베토벤은 1792년 비엔나에 정착하였다. 베토벤은 작곡가로서, 그리고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베토벤은 비덴극장이 문을 닫기 전까지 몇 차례에 걸쳐 연주를 했었다. 1803년부터 새로 생긴 빈강변극장은 베토벤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연주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교향곡 제1번, 제2번, 피아노협주곡 제3번(베토벤 자신이 초연했다), 오라토리오 '감람산상의 그리스도'등이 초연되었다.

 

빈강변극장(테아터 안 데어 빈)의 무대

 

쉬카네더는 베토벤이 빈강변극장을 위해 오페라를 작곡해 줄것을 희망하였다. 쉬카네더는 빈강변극장의 방을 내주어 베토벤이 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자기가 쓴 대본은 Vestas Feuer를 보여주고 오페라로 만들어 볼 것을 넌지시 암시하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Vestas Feuer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쉬카네더의 호의를 너무 무시할수도 없었다. 베토벤은 휘델리오의 제2막 1장에 나오는 O namenlose Freude 라는 듀엣에서 쉬카네더의 대본을 사용했다. 베토벤은 빈강변극장에 당분간 기거하면서 휘델리오를 시작하였다. 휘델리오는 1804년에 빈강변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나 쉬카네더가 감독하지는 않았다. 그때쯤해서 쉬카네더의 경력도 하향길에 접어 들기 시작했다. 휘델리오를 무대에 올렸지만 어찌된 일인지 생각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하여 제작비를 커버하기도 어려웠다. 쉬카네더는 빈강변극장을 비엔나 귀족연맹(콘소시엄)에 매각하고 비엔나를 떠나 브르노와 수타이르로 가서 일을 했다. 더구나 1811년에는 화폐개혁이 있어서 모든 경제가 어려웠었다. 쉬카네더는 모든 재산을 잃었다. 1812년, 쉬카네더는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부다페스트로 갔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만 여러 타격을 받아 정신이상에 걸렸다. 비엔나로 돌아온 쉬카네더는 그해 9월 21일 가난 속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61세였다.

 

쉬카네더는 56편의 징슈필 대본과 45편의 연극 대본을 남겼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오페라, 징슈필의 대본을 쓴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Die Lyranten(또는 Das lustige Elend: 음유시인 또는 유쾌한 구두쇠) - 오페레타, 1775년 인스부르크. 쉬카네더가 음악을 붙였다.

- Das Urianische Schloss(우리안 성) - 징슈필. 쉬카네더가 음악을 만들었다. 1786년 잘츠부르크

- Der dumme Gartner aus dem Gebrige(또는 Die zween Anton: 산골에서 온 어리석은 정원사 또는 두명의 안톤). 코믹 오페라. 베네딕트 샤크와 프란츠 사버 게를의 음악. 1789년 비엔나

- '두명의 안톤' 후편 Was macht der Anton im Winter? (안톤은 겨울에 무얼하나?) - 베네딕트 샤크-프란츠 사버 게를의 음악. 1790년 비엔나

- '두명의 안톤' 후편 Anton bei Hofe(궁전에 간 안톤) 또는 Das Namenfest(명명일) - 1791년 6월 비엔나. 모차르트가 이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 Der Stern der Weisen(철학자의 돌) 또는 Die Zauberinsel(마법의 섬) - 영웅적 코믹 오페라. 베네딕트 샤크, 프란츠 사버 게를, 쉬카네더, 모차르트 공동음악. 1790년 비엔나

- Der Fall ist noch weit seltner - 오페라. 베네딕트 샤크 음악. 1790년 비엔나

- Die Zauberfloete(마술 피리) - 오페라. 모차르트 음악. 1791년 9월 비엔나

- Der Spiegel von Arkadien(아르카디아의 거울) - 그랜드 영웅적 코믹 오페라.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 으악. 1794년 비엔나

- Babylons Pyramiden(바빌론의 피라미드) - 오페라

- Das Labyrinth(미로) 또는 Der Kampf mit den Elementen(엘레멘트와의 투쟁) - '마술 피리의 제2편. 영웅적 코믹 오페라. 페터 폰 빈터 음악. 1798년 비엔나

- Der Tyroler Wastel(티롤의 하얀 빵) - 오페라. 야콥 하이벨 음악.

 

에마누엘 쉬카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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