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위대한 대본가

로렌초 다 폰테

정준극 2012. 1. 10. 05:14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

모차르트를 더 위대하게 만든 인물

 

로렌초 다 폰테

 

로렌초 다 폰테(1749-1838)는 베니스 출신의 오페라 대본가 겸 시인이었다. 그의 대본을 사용한 작곡가는 11명이나 되며 오페라로는 28편이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여자는 다 그래'의 대본이다. 로렌초 다 폰테는 모차르트의 위대함을 더 위대하게 만든 막후의 주역이었다. 로렌초 다 폰테는 당시 베니스공화국의 체네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에마누엘레 코네글리아노(Emanuele Conegliano)였다. 그는 유태인이었다. 아버지는 제레미아(예레미아: Geremia)였고 어머니는 라첼레(라헬: Rachele)였다. 어머니는 에마누엘레의 동생인 아나니아를 출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잃은 제레미아는 아이들과 함께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당시 18세이던 오르솔라 파스쿠아 팔레타라는 여자와 재혼하였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대본은 다 폰테의 작품이다. 미국 산타페 오페라 공연 장면.

            

에마누엘레는 그에게 세례를 준 체테다의 로마 가톨릭의 주교로부터 로렌초 다 폰테라는 이름을 받았다. 다 폰테는 교사가 되려고 수업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신부의 서품을 받았다. 이어 베니스에 있는 산루까 성당의 사제로서 활동했다. 로마 가톨릭 성직자인 다 폰테는 뜻한바 있어서 애인을 두었다. 안졸레타 벨라우디라는 결혼한 여자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났다. 다 폰테는 첫 아이가 태어나자 '이런 일이야 우리 사회에서 언제나 있는 일이 아니냐'라고 말하면서 별로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성직자가 정부를 두고 아이까지 낳아서 기른다는 소문이 퍼지자 베니스의 부총독은 다 폰테를 크게 비난하고 더 이상 성당에 있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그러자 다 폰테는 정부인 안졸레타와 함께 매춘하는 집을 오픈하고 경영했다. 이에 베니스 당국은 다 폰테를 '매춘 및 부녀자 납치'라는 죄목으로 고소하고 다 폰테를 베니스에서 추방하였다. 실제로 다 폰테는 사람을 시켜서 정숙한 부인네들을 납치하여 매춘을 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신부였던 사람이 별 해괴한 일도 다 했다.

 

베니스에서 쫓겨난 다 폰테는 비엔나로 흘러 들어왔다. 다 폰테는 마침 궁정극장의 상주 시인이 공석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응모했다. 요셉 2세 황제는 다 폰테에게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극본을 썼느냐고 물었다. 다 폰테는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요셉 2세 황제는 '좋아요, 좋아! 그러면 우린 처녀 뮤즈를 갖게 되는 군!'이라고 말하고 다 폰테를 흔쾌히 채용했다. 다 폰테는 궁정 시인 겸 대본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언어에도 재능이 많았던 그는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대본은 정말 보석처럼 빛나는 것이었다. 모두들 놀람을 금치 못했다. 다 폰테는 비엔나에서 모차르트, 살리에리, 비센테 마르틴 이 솔러(Vicente Martin y Soler)등과 함께 오페라를 빛나게 만들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다 폰테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여자는 다 그래'의 대본을 쓴 것은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귀중한 일이 아닐수 없다.  다 폰테는 1792년 쯤해서(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자기보다 20살이나 젊은 안 첼레스틴 그랄(Ann Celestine Grahl)이라는 여자를 소개 받았다. 낸시라고 불리는 여자였다. 다 폰테와 낸시는 이윽고 결혼하였다. 다 폰테의 네 자녀(루이자, 패니, 요셉, 로렌조)는 낸시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다 폰테를 후원한 요셉2세 황제. 모차르트도 후원하였다.

 

요셉 2세가 세상을 떠나자 다 폰테는 후원자(파트론)를 잃었다. 새로 황제가 된 레오폴드는 다 폰테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다 폰테는 비엔나를 떠나 잠시 프라하에서 지내다가 다시 런던으로 떠났다. 다 폰테는 런던에서 오페라 제작자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비즈니스 수완이 부족했다. 다 폰테는 결국 파산을 하여 무일푼의 신세가 되었다. 다 폰테는 빚장이들을 피하여 미국으로 떠났다. 다 폰테는 미국에서 처음에는 뉴욕에 머물다가 나중에는 펜실바니아주의 선베리(Sunbury)라는 곳에 정착했다. 위대한 대본가 겸 시인인 다 폰테는 선베리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며 사람들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얼마후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했던 다 폰테는 뉴욕으로 다시 돌아와 이번에는 책방을 열었다. 그러다가 시인인 클레멘트 클락 무어(Clement Clarke Moore)와 친하게 지내게 되어 그의 주선으로 콜럼비아대학교에서 이탈리아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얼마후 다 폰테는 다시 로마 가톨릭의 신부가 되었다. 다 폰테는 콜럼비아대학교의 교수로서는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 신부였고 더구나 첫 유태인이었다. 다 폰테는 뉴욕에 있으면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공연을 주관하였다. 그는 또한 로시니의 오페라를 미국에 소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조카인 줄리아 다 폰테와 함께 로시니의 음악을 가지고 미국 순회공연을 떠나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의 대본도 다 폰테의 작품이다. 리옹 오페라 공연 장면

 

1828년, 다 폰테는 79세의 나이로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그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1838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뉴욕의 멀베리(Mulberry)가에 있는 생패트릭 대성당에서 열린 다 폰테의 장례식은 대단한 행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다 폰테의 서거를 애도하였다. 기마경찰이 동원되어 겨우 거리의 질서를 잡아야 할 정도였다. 다 폰테는 퀸스의 갈보리공동묘지(Calvary Cemetry)에 안장되었다고 하지만 그 묘지는 1848년까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곳에 다 폰테의 묘지가 있을리는 없다. 하지만 갈보리공동묘지는 비록 소문이지만 다 폰테의 묘지가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묘지 구내에 기념비를 만들에 놓았다.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다 폰테는 로우어 맨하튼(Lower Manhattan)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한편, '여자는 다 그래'는 처음에 살리에리의 오페라의 대본으로 삼고자 했으나 사정이 있어서 결국 모차르트의 오페라의 대본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었다. 다 폰테의 대본들은 새로 창안한 내용들이 아니라 이미 알려져 있던 스토리들을 바탕으로 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피가로의 결혼'은 캬롱 드 보마르셰의 원작 소설을 오페라 대본으로 만든 것이다. 다 폰테의 대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미 알려진 주인공들이지만 다 폰테의 손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어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대표적인 경우는 '돈 조반니'이다. 돈 조반니는 자코모 카사노바(Giacomo Casanova)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것이지만 다 폰테의 손에 의해 새로운 이미지의 인물로 창조되었다.

 

모차르트의 '여자는 다 그래'(코지 판 투테)의 대본도 다 폰테가 쓴 것이다. 거짓 이별의 장면.

 

위대한 대본가인 로렌초 다 폰테의 작품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오페라 대본]

- La Scuola de gelosi(1783) - 안토니오 살리에리

- Il ricco d'un giorno(1784) - 안토니오 살리에리

- Il burbero di buon cuore(1786) - 비센테 마르틴 이 솔러(카를로 골도니의 희곡에서)

- Il Demogorgone(Il filosofo confusoL 1786) - 빈센초 리기니(Vincenzo Righini)

- Il finto cieco(1786) - 주세페 가짜니가

- Le nozze di Figaro(1786) - 모차르트(피에르 보마르셰의 희곡에서)

- Una cosa rara(1786) - 비센테 마르틴 이 솔러(루이스 벨레즈 데 게비라의 희곡 La Luna della Sierra에서)

- Gli equivoci(1786)  스테픈 스토레이스(Stephen Storace)

- L'arbore di Diana(1787) - 비센테 마르틴 이 솔러

- Il dissoluto punito(Il Don Giovanni: 1787) - 모차르트(주세페 가짜니가의 오페라에서)

- Axur, re d'Ormus(1787-88) - 안토니오 살리에리(피에르 보마르셰의 Tarare 대본을 번역한 것)

- Il Talismano(1788) - 안토니오 살리에리(카를로 골도니의 원작에서)

- Il Bertoldo(1788) - 안토니오 브루네티

- L'Ape musicale(1789) - 여러 작곡가들이 공동으로 작곡한 파스티치오

- Il Pastor fido(1789) - 안토니오 살리에리(조반니 바티스타 구아리니의 파스토랄에서)

- La Cifra(1789) - 안토니오 살리에리

- Cosi fan tutte(1789-90) - 모차르트

- La Caffettiera bizzarra(1790) - 요셉 봐이글

- La Capricciosa corretta(1795) - 비센테 마르틴 이 솔러

- Antigona(1796) - 주세페 프란체스코 비안키

- Il consiglio imprudente(1796) - 주세페 프란체스코 비안키

- Meripe(1797) - 주세페 프란체스코 비안키

- Cinna(1798) -  주세페 프란체스코 비안키

- Armid(1802) - 주세페 프란체스코 비안키

- La Grotta di Calipso(1803) - 페터 폰 빈터

- Il Trionfo dell'amor freterno(1804) - 페터 폰 빈터

- Il Ratto di Proserpina(1804) - 페터 폰 빈터

- Don Giovanni - 모차르트

 

[칸타타와 오라토리오]

- Per la ricuperata salute di Ofelia(1785) - 모차르트, 살리에리, 코르네티(악보 분실)

- Il Davidde(1791) - 여러 작곡가에 의한 파스티치오

- Hymn to America - 안토니오 바지올리(Antonio Bagio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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