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위대한 대본가

아리고 보이토(Arigo Boito)

정준극 2012. 1. 10. 05:20

아리고 보이토(Arigo Boito)

베르디를 위한 헌신

'오텔로' '활슈타프'의 대본 완성

 

아리고 보이토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 1842-1918)의 원래 이름은 엔리코 주세페 조반니 보이토이며 별명으로는 토비아 고리오(Tobia Gorrio)라고 했다. 이탈리아의 시인이며 저널리스트, 소설가, 작곡가이지만 대본가로서 더 유명했다. 특히 베르디의 오텔로와 활슈타프의 대본을 썼으며 자기의 오페라인 메피스토펠레의 대본도 썼다. 아리고 보이토는 파두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니에이쳐 화가였으며 어머니는 폴란드의 귀족으로 백작부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보이토는 1861년부터 밀라노음악원에서 음악공부를 했으며 1866년에는 이른바 7주 전쟁에 가리발디 장군의 부대에 입대하여 전투에 참가했다. 7주 전쟁은 프랑스가 후원하는 이탈리아 왕국과 프러시아가 합동하여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투이다. 이 전투로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고 있던 베니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보이토는 오페라로서는 메피스토펠레 한 편을 완성했다. 마지막 오페라인 네로네는 5막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메피스토펠레의 한 장면. 영국 에어푸르트 오페라 페스티벌.

                      

보이토는 2편의 오페라를 남겼지만 그 중에서 메피스토펠레(Mefistofele)만이 완성을 보았고 네로네(Nerone)는 미완성이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바탕을 둔 메피스토펠레는 1868년 3월 5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은 보이토가 직접 지위하였다. 그러나 메피스토펠레스가 바그너주의적이라는 비난 때문에 소동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결투까지 벌어졌다. 그리하여 메피스토펠레는 단 2회의 공연을 마치고 경찰에 의해 중단되었다. 베르디는 이같은 예상치 못했던 사건에 대하여 '보이토는 원작에 충실코자 했으나 완전히 이상한 것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보이토는 사태가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돌아가자 라 스칼라에서의 공연을 스스로 취소하고 음악을 수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나온 수정본의 초연은 밀라노에서의 초연보다 7년 후인 1875년 4월 10일 볼로냐에서 있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는 크게 성공적이었다. 보이토는 처음 것을 상당히 축소하였으며 파우스트도 바리톤에서 테너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는 오늘날 그래도 자주 공연되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보이토는 베르디를 위해 오텔로의 대본을 썼다.

                  

보이토는 메피스토펠레 이후 Ero e Leandro 라는 오페라를 만들었으나 만족하지 못하여 스스로 악보를 파괴하였고 이어 Nerone 라는 오페라를 추진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보이토는 Nerone를 1877년부터 1915년 사이에 생각나면 작곡을 추진하고 귀찮으면 중단하며 지내다가 끝내는 마지막 막을 완성하지 못하고 스케치만 남겨둔채 세상을 떠났다. Nerone는 보이토의 사후 토스카니니와 빈센초 토마시니가 완성하여 1924년 라 스칼라의 무대에 올려졌다. 보이토는 작곡에 대하여 끝까지 완성코자 하는 노력이 부족하였으나 그의 문학적인 재능은 시원한 샘물처럼 마를 줄을 몰랐다. 보이토는 토비아 고리오(Tobia Gorrio)라는 필명으로 다른 작곡가들의 오페라 대본을 제공했다. 아밀카레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의 대본은 토비아 고리오라는 필명으로 제공된 것이다. 보이토와 베르디의 관계는 시몬 보카네그라로부터 비롯하였다. 보이토는 베르디에게 시몬 보카네그라의 수정된 대본을 제공하였다. 이로써 시몬 보카네그라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베르디와 보이토의 우정과 존경심은 만개하기 시작했다. 베르디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오페라로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생각만 했을 뿐, 실현하지 못했다. 만일 오페라로 작곡하기로 결정했다면 보이토가 대본을 썼을 것이다. 보이토는 베르디의 마지막 걸작인 오텔로(1887 )와 활슈타프(1893)의 대본을 썼다. 보이토는 베르디의 칸타타인 Inno delle Nzioni(1862)의 텍스트도 썼다. 보이토는 베르디가 세상을 떠날 때 임종을 지켜보았다.

 

보이토는 베르디를 위해 활슈타프의 대본도 썼다.

                                       

보이토는 1889년 파르마음악원장이 되어 1897년까지 8년 동안을 지냈다. 1893년에는 캠브릿지대학교로부터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18년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시미테로 모뉴벨탈레에 안장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1948년에 밀라노에서는 보이토를 추도하는 음악회가 열렸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하였다. 보이토가 쓴 오페라 대본들은 다음과 같다. 연도는 그 오페라의 초연 연도이다.

 

● 아멜토(Amelto: 프랑코 파치오: 1865) ● 황혼(Un tramonto: 게타노 코로나로: 1873) ● 낫(La falce: 알프레도 카탈라니: 1875) ● 라 조콘다(La Gioconda: 아밀카레 폰키엘리: 1876) ● 세미라(Semira: 산 제르마노: 미공연) ● 에로와 레안드로(Ero e Leandro: 조반니 보테시니: 1879, 루이지 만치넬리: 1897) ● 시몬 보카네그라(베르디: 1881, 수정본) ● 바시와 보테(Basi e bote: 리카르도 피크 만지아갈리: 1927) ● 오텔로(Otello: 베르디: 1887) ● 활슈타프(Falstaff: 베르디: 1893) ● 네로네(Nerone: 보이토. 미완성, 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