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처제 조피(Sophihe)

정준극 2012. 3. 22. 06:41

모차르트의 처제 조피(Sophie)

 

조피는 모차르트 부인인 콘스탄체의 하나뿐인 여동생이다. 그러므로 모차르트의 처제이다. 조피의 풀네임은 결혼전에는 마리아 조피 베버(Maria Sophie Weber)이었다. 조피는 결혼 후에도 이 이름을 유지하였다. 조피는 1763년에 독일 슈봐비아 지방의 아름답고 작은 마을인 첼 임 뷔젠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리톤 프리돌린 베버였고 어머니는 세실리아 베버였다. 조피는 이들의 네 딸 중에서 막내였다. 조피의 식구들은 조피가 아주 어릴 때에 만하임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뮌헨으로 갔다. 그러다가 조피가 16세 때에 식구들과 함께 비엔나로 이사왔다. 비엔나로 이사를 온 것은 큰 언니인 요제파가 비엔나 징슈필극장에 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아버지 프리돌린 베버도 뮌헨에서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서 비엔나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고자 했다. 요제파는 당시 상당히 인정을 받았던 소프라노였다. 잘 아는대로 요제파는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초연에서 '밤의 여왕'을 맡았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조피에게는 세 언니가 있었다. 큰 언니 요제파와 둘째 언니 알로이지아는 이름난 소프라노였다. 바로 위의 언니 콘스탄체도 성악에 재능이 많았으나 모차르트와 결혼한 후에는 소프라노로서 활동하겠다는 생각을 그만 두었다. 막내인 조피도 소프라노였다. 그러나 조피는 소프라노로서 보다는 형부인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떤 상태로 떠났는지 등에 대하여 모차르트의 전기작가들에게 증언을 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모차르트의 전기에 여러번 올려서 알려지게 되어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비엔나에 온 조피는 소프라노로서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의 1780-1781 시즌에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실력과 재능이 별로였던지 계속 계약을 맺어 출연하지는 못했다. 한편, 모차르트는 조피의 바로 위 언니인 콘스탄체와 결혼했지만 실은 조피와 결혼할 생각도 했었다. 만일 조피와 결혼했더라면 모차르트의 생애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1781년 잘츠부르크를 떠나 비엔나로 온 모차르트는 우선 거처할 곳이 없어서 잘츠부르크 대주교인 콜로레도의 비엔나 저택에 머물렀다. 그런데 말이 대주교 궁전이지 실은 말들을 돌보는 마굿간이었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그곳에서 다른 하인들과 함께 지내야 했다. 더구나 모차르트는 고용주인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에게 이미 사표를 던지고 떠났던 터였다. 모차르트는 일단 마땅한 거처가 없어서 대주교의 저택에서 다른 하인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지만 자존심도 있고 하여서 하숙을 구해서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러다가 구한 하숙집이 세실리아 베버의 하숙집이었다. 세실리아 베버는 모차르트가 만하임에 있을 때 자주 만났던 사람으로 모차르트는 둘째 딸인 알로이지아와 결혼하고 싶어하였으나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가 강력히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던 사연이 있었다.

 

세실리아 베버는 남편 프리돌린 베버가 세상을 떠나자 남은 재산을 정리하여 하숙집을 차린 것이다. 모차르트는 세실리아 베버의 집에 하숙하면서 그 집의 셋째 딸인 콘스탄체와 넷째 딸인 조피와 시시덕거리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비록 미완성이기 하지만 모차르트가 이때에 작곡한 B 플랫 알레그로(K 400)는 조피와 콘스탄체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것이다. 모차르트는 두 딸 중에서 한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었다. 콘스탄체는 18세였고 조피는 17세였다. 모차르트는 심지어 '17세면 어떠냐, 몇 년 기다리면 되지!'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셋째 딸인 콘스탄체를 선택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모차르트는 조피를 신중하지 않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모차르트가 조피에 대하여 '마음씨는 착한데 머리가 비어 있다'고 말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에 대하여 '못생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예쁘게 생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1782년에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와 슈테판대성당의 성캐터린채플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네 자매 중에서 조피만이 참석하였다.

 

1791년 12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조피는 28세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피는 미혼이었다. 조피는 어머니인 세실리아와 함께 살았지만 형부인 모차르트의 집에 수시로 와서 형부의 병을 간호하였고 언니 콘스탄체의 일을 도와 주었다. 조피는 1807년 1월 7일 슬로바니아의 쟈코바르(Djakovar)에서 테너이며 배우인 야콥 하이벨(Jakob Haibel: 1762-1826)과 결혼하였다. 쟈코바르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다코보(Dakovo)이다. 작곡가로서 야콥 하이벨은 여러 편의 징슈필을 작곡했다. 그중에서 어떤 것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자주 공연되기도 했다. 야콥 하이벨의 징슈필은 주로 에마누엘 쉬카네더 순회극단이 공연했다. 그런데 비엔나에서 지내던 야콥 하이벨은 조피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기혼인 몸으로 조피와 결혼하기 위해 이미 1804년에 자기 부인을 버리고 크로아티아로 도피를 떠나와 있었다. 야콥 하이벨은 쟈코바르 대성당의 합창지휘자였다. 그리하여 조피는 거의 20년 동안 야콥 하이벨과 부부로서 지냈다. 그러다가 야콥 하이벨이 세상을 떠나자 콘스탄체가 살고 있는 잘츠부르크로 갔다. 그때 콘스탄체는 두번째 남편인 게오르그 니센이 세상을 떠나서 혼자 살고 있었다. 콘스탄체와 조피는 콘스탄체가 184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살았다. 조피는 콘스탄체가 세상을 떠난지 4년후인 1846년 잘츠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피가 태어난 첼 임 뷔젠탈. 식구들은 조피가 아주 어릴 때 만하임으로 이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