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어린이 오페라

브룬디바르(Brundibár)

정준극 2012. 2. 6. 09:17

브룬디바르(Brundibár)

A Bumblebee(범블비: 뒝벌)

체코 작곡가 한스 크라사(Hans Krása)의 어린이오페라

 

체코의 유태계 작곡가인 한스 크라사. 1944년 10월 16일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되었다.

 

브룬디바르(Brundibár)는 체코의 유태계 작곡가인 한스 크라사(Hans Krása: 1899-1944)가 동료 극작가인 아돌프 호프마이스터(Adolf Hofmeister)의 대본으로 1938년에 작곡한 3막의 오페라이다. 체코에서 어린이 오페라 선정대회에 출품하여 입상한 작품이다. '브룬디바르'는 그 해에 나치 점령하의 프라하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프라하의 유태인고아원인 모리츠 프로이덴펠트(Moritz Freudenfeld)에서 어린이들에 의해 공연되었다. 나치는 1942년 부터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유태인들을 프라하 근교의 테레진(Terezin: Theresienstadt)으로 집단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브룬디바르'는 나치가 유태인들을 테레진으로 몰아 넣기 전에 프라하의 유태인 건물인 하기보르에서 한번 더 공연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테레진의 유태인 게토에서는 무려 50회 이상이나 공연되는 인기를 끌었다. 작곡가인 한스 크라사도 테레진의 게토로 강제 이주되었기 때문에 공연을 직접 감독하고 지휘했다.

 

미국 피츠버그에서의 공연

 

테레진은 2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인구 5천명 정도의 보통 마을이었다. 그 전에는 군대의 요새로서 사용되었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걸인 마리아 테레자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의 이름을 테레지엔슈타트라고 불렀다. 독일어로는 테레지엔슈타트이지만 체코어로는 테레진이었다. 이곳에 나치가 2차 대전이 한창일 때에 유태인 게토라는 미명 아래 강제수용소를 만들고 이름은 그럴듯하게 테레지엔슈타트 캠프라고 불렀다. 테레지엔슈타트에 끌려온 유태인들은 무려 5만 5천명이나 되었다. 인구 5천명이던 마을이 갑자기 10배가 넘는 규모로 불어났다. 히틀러는 강제수용소인 테레지엔슈타트 캠프를 만들고 나치가 조성한 유태인 게토의 모델로 삼았다. 마을에 들어서는 장소에는 커다란 아치형 문이 설치되었고 그 안에는 학교, 상점, 그리고 심지어는 오케스트라까지 두어서 게토가 편안하고 바람직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선전영화도 만들었던 것이다.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서의 '브룬디바르' 공연 장면. 모두 유태인 청소년들이 출연하는 공연이었다.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서 '브룬디바르'가 공연될수 있었던 것은 1943년 7월에 프라하에 있던 크라사의 친구들이 '브룬디바르'의 악보를 테레진(테레지엔슈타트) 게토로 몰래 들여보냈기 때문이었다. 한스 크라사는 게토에서 '브룬디바르'의 오케스트라 파트를 다시 손질하여 1943년 9월 23일에 테레진의 한쪽에 있는 마그데부르크 바라크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가졌다. 당시만 해도 게토의 유태인들은 비교적 자유스럽게 음악활동을 할수 있었다. 나치는 어린이들을 위한 코믹 오페라인 '브룬디바르'가 게토에서 대인기인 것을 감안하여 이것을 개토생활을 선전하는 목적으로 이용키로 했다. 나치는 유태인들을 새롭게 정착시킨 테레지안슈타트를 선전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고 그 영화의 한 파트에 '브룬디바르'의 공연을 소개하였다. 나치의 선전영화는 Thersienstadt - eine Dokumentarfilm aud den jüdische Siedlungsgebiet(테레지엔슈타트 - 유태인 정착지역으로부터의 기록영화)라는 제목이었다. 나치는 유태인들을 게토에 정착시킨 것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해 국제적십자사의 시찰단이 테레지엔슈타트를 방문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탈리아 라벤나에서의 공연시 포스터

 

1944년 9월에 국제적십자 시찰단이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를 방문하였을 때 나치는 크라사 등에게 '브룬디바르'를 공연토록 했다. 그러나 실제로 '브룬디바르'는 테레지엔슈타트이 생긴 이래 그곳에서 무려 55회나 공연되었으며 국제적십자사 시찰단이 관람한 것은 사실상 테레지엔슈타트에서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국제적십자사 시찰단이 다녀간지 2주후부터 테레지엔슈타트의 강제수용소에 있던 유태인 예술가들은 모두 아우슈비츠를 위시한 동부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나치는 1942년부터 유태인들을 동부의 가스실로 보내기 시작했고 음악가들은 제일 나중에 보냈던 것이다. 한스 크라사도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그곳의 가스실에서 1944년 10월 16일, 45세의 한창 나이로 소멸되었다. 이때 빅토르 울만(Viktor Ullmann), 기데온 클라인(Gideon Klein), 파벨 하스(Pavel Haas)와 같은 뛰어난 음악가들도 함께 가스실로 끌려 들어가는 운명을 당하였다.

 

영국 랭커셔 초등학교에서의 공연

 

'브룬디바르'라는 체코의 구어로서 영어의 범블비(Bumblebee)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뒝벌이라고 되어 있다. 오페라에서 '브룬디바르'는 시장에서 오르간을 돌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비유로서는 히틀러를 뜻한다. '브룬디바르'는 '헨젤과 그레텔' 또는 '브레멘의 음악가' 처럼 동화오페라에 속한다. 아닌카(Aninka: 영어 대본에서는 Annette)와 페피체크(Pepicek: 영어 대본에서는 Little Joe)의 어머니는 병에 걸려 몸져 누워있다. 의사는 어머니에게 신선한 우유가 필요하다고 처방해 준다. 아닌카와 페피체크는 우유를 구하기 위해 시장으로 간다. 행상하는 사람들이 서로 자기 물건을 사라고 부추킨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사람, 빵을 파는 사람, 그리고 마침 우유를 파는 사람이 서로 자기 물건을 사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남매에게는 우유를 살수 있는 돈이 없다. 남매는 우유를 파는 사람에게 노래를 부를테니 우유를 달라고 하지만 거절 당한다. 그런데 시장의 한 쪽을 보니 어떤 사람이 오르간을 돌리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돈을 던져주고 간다. 아닌카와 페피체크도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을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위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오르간을 돌리는 사람은 시장의 한 쪽에서 아이들이 느닷없이 노래를 불러대자 자기의 돈벌이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화를 내며 남매를 쫓아버린다. 몇몇 시장 사람들도 웬 아이들까지 노래를 부르며 돈을 벌려고 하느냐면서 듣기 싫다고 하며 남매에게 꺼지라고 말한다.

 

체코에서의 무대

                    

참새 한마리와 고양이와 개가 남매를 돕기로 한다. 시장에서 남매를 쫓아버린 오르간 돌리는 사람을 혼내 주기로 계획을 세운다. 세 동물은 이웃 아이들까지 불러서 함께 남매를 돕자고 한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온다. 사람들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준비들을 한다. 동물들과 마을 어린이들이 합세하여서 브룬디바르가 오르간을 돌리지 못하도록 한다. 아닌카와 페피체크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마을 사람들은 남매의 노래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앞을 다투어 돈을 준다. 그런데 갑자기 브룬디바르가 스며 들어와서 마을 사람들이 남매를 위해 준 돈을 물래 가져간다. 마을 어린이들과 동물들이 브룬디바르가 가져간 돈을 되찾고 그를 멀리 쫓아버린다. 모두들 마음씨 나쁜 브룬디바르를 쫓아버린 것을 기뻐하는 노래를 부른다.

 

미국 사크라멘트 어린이합창단의 공연

                

이제 '브룬디바르'의 공연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코자 한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브룬디바르'는 1938년에 프라하에 있는 모리츠 프로이덴펠트라는 유태인 고아원의 구내식당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라파엘 섀흐터라는 사람이 감독을 맡았다. 라파엘 섀흐터가 테레지엔슈타트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자 고아원을 설립한 루디 프로이덴펠트가 다음번 공연을 준비하게 되었다. 무대장치는 프라하국립극장의 유명한 무대 디자이너인 프라티세크 첼렌카라는 사람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나치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고 매일 아침이면 수많은 유태인들이 테레지엔슈타트로 끌려가는 판에 아무리 훌륭한 무대 디자이너라고 해도 무대장치를 제대로 할수는 없었다. 실제로 동물들(참새, 고양이, 개 등)을 분장할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큰 종이를 구해서 동물들의 모습을 그려 넣고 얼굴 부분을 오려내서 배역을 맡은 아이들이 얼굴만을 내밀고 노래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무대에는 세장의 커다란 종이만 붙여 있었을 뿐이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간단한 무대장치였을 것이다. 공연장은 고아원의 구내식당이었기 때문에 악기들이 있다고 해도 연주할 공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반주는 피아노 하나, 바이올린 하나, 작은 북 하나가 전부였다.

 

미국 세인트 루이스 공연. 고양이 역을 맡은 아이는 고양이처러 생겼다. 그런데 가난한 남매의 옷차림은 가난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얼마후 한스 크라사도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고아원장인 루디 프로이덴펠트도 곧 들어가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프로이덴펠트는 다른 것은 몰라도 '브룬디바르'의 스코어는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인당 허용된 50kg의 짐에 우선적으로 '브룬디바르'의 스코어 뭉치를 넣어서 몰래 가져갔다. 그때가 1943년 7월이었다. 한스 크라사는 이미 그 전해인 1942년에 테레지엔슈타트로 들어갔다. '브룬디바르'의 스코어가 없기 때문에 기억을 되살려서 노래 부분의 스코어만 대충 만들어서 아이들을 연습시키고 공연을 하였다. 그러므로 오리지널의 풀 스코어가 절실한 판에 프로이덴펠트가 검열을 무릅쓰고 몰래 스코어 뭉치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아이들 중에는 노래에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어른 중에는 스메타나의 오페라 '팔린 신부'에 출연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브룬디바르'가 정식으로 공연될수 있다고 하자 너도나도 출연하겠다고 오디션에 참가하였다. 루디 프로이덴펠트가 오디션을 주관하였다. 그런데 배역들을 선정하고 리허설에 들어갔지만 출연자들이 영양실조가 되어 도저히 노래를 부르지 못할 지경도 있었다. 하지만 아닌카와 페피체크, 그리고 브룬디바르의 세 배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출연할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들은 먹지 못하더라도 주연을 맡은 사람들은 먹고 기운을 차려야 한다고 해서 먹을 것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었다.

 

에스토니아에서의 공연. 무대배경이 화려하다.

                    

먼지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에 들어와 있던 무대 디자이너 첼렌카가 역시 공연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무대장치를 위한 재료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무대에 담을 만들어야 하는데 널판지를 구할수가 없었다. 자재 조달 책임으 브룸리크라는 사람에게 맡겼다. 인형극을 하던 사람이어서 무대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더구나 그는 눈먼 사람들만 수용한 건물의 감독관이었다. 무대에 필요한 자재는 결국 다른 곳에서 훔쳐와야 하는데 그런 내용을 알면 말이 새어나갈수도 있어서 걱정이지만 장님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널판지는 나치의 승마연습장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브룬디바르'의 연습장소도 브룸리크가 감독관으로 있는 장님동으로 정하였다. 널판지 등 자재를 구하는 심부름은 젊은 목수인 제리 린드가 맡았다. 제리 린드는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브룬디바르'의 리허설 장면을 언제라도 볼수 있었고 진짜 공연은 무려 네번이나 좋은 자리에서 볼수 있었다. 한스 크라사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 '브룬디바르'의 오케스트라 스코어를 새롭게 만들었다. 풀 오케스트라를 사용할수 없기 때문에 수용소 안에서 가능한 연주자들을 감안하여 오케스트라 스코어를 만들었다. 플륫/피콜로, 클라리넷, 트럼펫, 기타, 작은 북, 큰 북, 피아노, 바이올린(4), 첼로, 콘트라베이스, 아코디온이 전부였다. 영광스럽게도 루디 프로이덴펠트가 지휘를 맡았다.

 

영국에서의 공연. 브룬디바르를 거인으로 표현했다.

                      

'브룬디바르'는 아마도 다른 작곡가들의 오페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시인 베르톨트 브레헤트가 대본을 다시 만들고 쿠르트 봐일이 음악을 붙인 Der Jasager(예스맨), 파울 힌데미트의 Wir Bauen eine Stadt(우리는 도시를 세운다), 모리스 라벨의 L'Enfant et les sortileges(어린이와 마법), 엥겔버트 훔퍼딩크의 Hansel und Gretel(헨젤과 그레텔),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의 Peter and the Wolf(피터와 늑대), 레오스 야나체크의 The Cunning Little Vixen(교활한 암여우) 등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영향을 준 작품은 Der Jasager 일 것이다. 이 오페라는 독일 봐이마르 지방의 학교에서만해도 2백회 이상이나 공연되었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스 크라사와 아돌프 호프마이스터의 '브룬디바르'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독특한 오페라로 인정되고 있다. 출연자들이 모두 어린이라는 특성때문이다. 물론 오케스트라는 어른들이 맡지만 말이다.

 

아르헨티나에서의 공연. 진짜 아이들이 많이 출연했다. 브룬디바르 한 사람만이 어른이다. 어떤 공연에서는 브룬디바르도 덩치가 큰 아이가 출연토록 하고 있다.

                                  

'브룬디바르'가 게토에서 그렇게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히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할수 있다. 첫째는 어린이들이 좋아서 공연을 하는 것을 보는 어른들의 마음도 기쁘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는 어린이들이 거리를 방황하지 않고 그나마 공연장에서 오페라를 볼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는 것이다. 둘째는 '브룬디바르'의 내용이 비유적이어서 보는 사람들의 심정을 유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주인공인 브룬디바르는 독재자를 지칭한 것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독재자인 히틀러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쫓겨나고 창피를 당하는 것이 보기에 즐거웠던 것이다. 셋째는 음악이 좋다는 이유 때문이다. 한스 크라사의 음악은 누구나 쉽게 다가갈수 있는 감미롭고 즐거운 음악이며 한번 들으면 자꾸 기억나는 음악이다. 그리고 주인공드라마다 주제가 되는 멜로디가 있다. 그래서 참새에 대한 모티브 멜로디가 나오면 '아하 이것은 참새를 말하는 구나'라고 짐작할수 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상황에 대한 멜로디가 있다. 예를 들면 밀크가 필요하다는 상황, 못된 사람을 몰아 냈다는 상황 등이 별도의 주제적인 멜로디로서 표현되고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다. 하모니를 보면, 당시 신세데 작곡가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불협화음의 사용은 거의 볼수 없다. 그래서 듣기에 수월하다. 이와 함께 재즈적인 요소와 민속음악적인 요소를 대단히 상쾌하고 매력적인 방법으로 도입하였다. 체코의 민속적인 색채는 왈츠 멜로디에서 찾아볼수 있고 오르간 돌리는 사람의 아리아, 오누이가 돈을 벌기 위해 처음에 부르는 노래 등에 포함되어 있다.

 

영국 주빌리오페라의 공연. 영국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점잖게들 공연하는 것 같다.

              

'브룬디바르'가 체코에서 마지막으로 공연된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44년 국제적십자사 시찰단이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 이후로 1975년 미국에서 리바이벌 되기까지의 수십년 기간동안 공연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종전 이후의 기록은 1975년 미국에서의 공연, 1977년 캐나다에서 영어대본에 의한 공연, 1985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독일어 대본에 의한 공연이 있었다. 한가지 특기사항은 1995년에 독일에서 Jeunsses Musicales Deutschland(독일청소년음악)협회라는 기구가 The Brundibar Project를 시작한 것이다. 브룬디바르를 더욱 올바르게 이해하자는 프로젝트이다. 이들은 브룬디바르 공연에 대한 테레지엔슈타트의 생존자들의 증언, CD에 담은 크라사의 음악, 브룬디바르 공연 장면의 비디오, 이밖에도 교사와 학생들을 위한 나치 독일에 관한 자료, 테레지엔슈타트와 다른 게토에서의 문화활동에 대한 자료들을 하나의 패키지로 만들어 제공하고 있으며 또한 독일과 동유럽 여러나라에서 '브룬디바르'를 공연할 경우, 그 공연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 때문인지 1999년 이래 미국, 영국, 독일, 동유럽 여러나라에서 '브룬디바르'의 공연이 대단히 활발해졌다.

 

미국 피츠버그오페라의 공연. 흑인소년이 페피체크의 역할을 맡았다. 미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