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추가로 읽는 366편

306. 살바토레 스키아리노의 '배반의 눈빛'

정준극 2012. 2. 18. 10:52

배반의 눈빛(Luci Mie Traditrici) - The Betraying Eyes

Meine trügerischen Augen - The Deadly Flower(죽음의 꽃)

살바토레 스키아리노의 2막 아방 갸르드 오페라

 

살바토레 스키아리노

             

근년에 이르러 현대음악 작곡가인 이탈리아의 살바토레 스키아리노(Salvatore Sciarrino: 1947-)가 작곡한 오페라 '배반의 눈빛/루치 미에 트라디트리치'(Luci Mie Traditrici)가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다. 1998년 독일 슈베칭겐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이래 2008년 잘추브르크 페스티벌, 2010년 베를린 페스티벌 등에서 각광을 받았으며 이밖에도 세계의 다른 극장에서의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이 오페라가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특징있는 현대 음악과 현대적인 연출, 그리고 현대적인 무대장치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방향의 현대음악, 특히 새로운 진로의 아방 갸르드 음악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으면 살바토레 스키아리노의 이 오페라를 보면 된다. '루치 미에 트라디트리치'는 현대 전위음악의 전형이다. 원래 '루치 미에 트라디트리치'라는 말은 '나의 배반하는 눈'(Oh My Betraying Eyes)이라고 번역할수 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원제목에 충실하게 Meine trügerischen Augen(마이네 트뤼거리셴 아우겐)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1988년 슈베칭겐 페스티벌에서의 초연에서는 The Deadly Flower(죽음의 꽃)이라고 의역했다. 이처럼 여러가지로 번역할수 있으므로 본 블로그에서는 잠정적으로 원래 타이틀대로 '루치 미에 트라디트리치'라고 표기키로 한다.

 

공작이 부인에게 부정을 추궁하지만 부인은 죽으면 죽었지 그런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루치 미에 트라디트리치'의 대본은 17세기 이탈리아의 극작가이며 시인인 지아친토 안드레아 치코니니(Giacinto Andrea Cicognini: 1606-1651)가 쓴 Il tradimento per l'onore(명예를 위한 불신)이라는 극본을 바탕으로 작곡자인 살바토레 쉬아리노가 직접 작성했다. '명예를 위한 불신' 또는 '명예를 위한 배반'이라는 제목의 극본은 16세기 르네상스 작곡가로서 귀족인 카를로 게수알도(Carlo Gesualdo: 1566-1613)가 변절한 부인과 정부를 살해한 사건을 다룬 것이다. 카를로 게수알도는 나폴리 공국에 속한 베노사의 공자이면서 작곡가로서 놀랍도록 새로운 마드리갈을 작곡한 사람이다. 카를로 게수알도 공자는 부인과 정부를, 그리고 부인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있던 하인까지 살해했지만 그의 신분과 상황이 참작되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 끔찍한 사건은 세간의 뇌리에 남게 되어 그후로 여러 문인들이 소설, 또는 연극대본으로 만들었다. 게수알도 공자의 사건이 있은 때로부터 약 50년후에 나온 것이 지아친토 안드레아 치코니니의 극본이다. 이 극본을 바탕으로 살바토레 스키아리노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번뇌, 일시적인 정열과 충돌하는 구원의 사랑, 소유에 대한 집념과 자학, 일방적인 욕망, 실망과 좌절, 복수에 대한 갈망 등을 표현했다. 사실 살바토레 스키아리노는 게수알도 사건을 내용으로 한 오페라를 작곡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알프레드 슈니트케가 게수알도 스토리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작곡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기왕 손을 댄 것이므로 계속 진행하였다. 다만, 게수알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마드리갈 풍의 음악은 배제하고 대신 17세기 클로드 르 주느의 프랑스 샹송을 도입부에서 부터 사용하였다.

 

공작부인이 손님과 밀회하는 장면을 하인이 엿보고 있다.

 

'루치 미에 트라디트리치'는 마치 마법에 씌인듯한 아름다운 여성 음성의 멜로디로부터 시작한다. 그 음악은 클로드 르 주느(Claude le Jeune)가 1608년에 작곡한 엘레지(비가)를 인용한 것이다. 마법에 걸린듯 아름다운 음악, 하지만 아름다움의 쇠퇴를 예견하는 멜로디이다. 작곡자인 스키아리노는 이같은 분위기의 음악을 '음악적 비극의 르네상스'라고 불렀다. 멜로디는 되돌아 오지만 매번 되돌아 올때마다 더욱 깨지기 쉬운 상태가 되며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진다.

 

슈베칭겐에서의 공연에서 공작부인이 손님을 위해 만찬을 베푸는 장면이다.

 

프롤로그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클로드 르 주느의 엘레지를 주제로 한 노래가 나온다. 사랑하던 여인의 아름다움을 회상케 하는 노래이다. 이 오페라에서 게수알도는 말라스피나로, 게수알도와 결혼한 엘레오노라는 공작부인으로 나온다. 말라스피나(Malaspina)는 공작부인의 아름다움을 장미꽃에 비유하여 노래하며 장미는 시들지만 공작부인의 아름다움은 영원할 것이라고 찬양한다. 공작부인이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손가락에서 피가 흐른다. 이 모습을 본 말라스피나는 현기증을 일으키며 기절할 것 같다. 말라스피나는 그만큼 공작부인을 사랑하고 애끼고 있다. 공작부인은 말라스피나에게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말라스피나는 공작부인에게 진심을 담아 청혼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굳게 맹세한다. 질투심 많은 하인이 두 사람의 모습을 엿보고 있다. 얼마후 손님이 한 사람 찾아온다. 손님과 공작부인은 아마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인듯 싶다. 공작부인이 그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가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두 사람은 정열의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공작부인이 손님과 만나는 장면을 하인이 엿보고 있다. 하인도 실은 공작부인을 사모하고 있었다.

 

손님과 공작부인은 자기들이 열정을 가지고 만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눈빛에서는 어쩔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손님과 공작부인은 두 사람만의 은밀한 시간을 갖게 되자 드디어 사랑의 고백을 하며 포옹한다. 이 모습을 하인이 지켜본다. 하인은 두 사람의 랑데부를 주인인 말라스피나에게 고해 바친다. 말라스피나 공작은 자기의 명예가 모욕을 당했다고 믿어서 복수하기로 결심한다. 말라스피나 공작은 우선 두 사람의 밀회 장면을 목격한 하인부터 처리한다. 이어 공작은 부인의 부정함을 크게 비난하며 말다툼을 한다. 공작은 이제 더 이상 부인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인은 공작을 배신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면서 항변한다. 공작은 부인의 말을 영원한 정절의 서약으로서 믿고 싶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그날 밤에 다시 얘기를 나누기로 한다.

 

공작이 부인에게 침대의 시트를 걷어 보라고 명령한다.

 

그날 밤, 공작과 부인이 다시 만났을 때 공작부인은 공작의 태도가 변한 것을 알아챈다. 공작은 말로는 공작부인에 대하여 '나의 생명'이라고 하지만 그의 눈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보인다. 공작은 침대를 살펴보면 부인이 말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볼수 있다고 말한다. 부인은 공작의 그같은 말이 무슨 뜻인지를 얼른 알아채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러자 공작은 부인에게 침대의 시트를 걷어 보라고 말한다. 부인이 시트를 걷자 거기에는 손님이 피를 흘린채 죽어 있다. 이어 공작은 부인을 살해한다. 그리고 공작은 남은 평생을 영원한 고뇌 속에서 지낸다.

 

 

공작와 부인이 사랑을 맹세하고 있다. 하인이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