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이탈리아

프란체스카 카치니(Francesca Caccini)

정준극 2012. 2. 29. 09:10

프란체스카 카치니(Francesca Caccini)

최초의 여성 오페라 작곡가

 

프란체스카 카치니(1587-1641)

 

음악사상 최초의 오페라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의 '오르페오'라고 한다. 1607년에 초연되었다. 혹자는 몬테베르디가 아니라 자코포 페리(Jacopo Peri: 1561-1633)의 '다프네'라고 주장한다. '다프네'는 1598(또는 1597년)년에 발표되었다. 그런데 기록상으로는 '다프네'가 최초의 오페라라고 볼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악보가 분실되는 바람에 어떤 음악인지 알수 없어서 찬밥 신세를 지고 있다. 자코포 페리는 오비드의 '변형'(Metamorphooses)를 바탕으로 '에우리디체'(Euridice)라는 오페라를 1600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이 오페라에는 자코포 페리의 친구인 줄리오 카치니가 여러 파트의 음악을 작곡하여 넣었다고 한다. 사족이지만, 줄리오 카치니도 오비드의 '변형'을 바탕으로 전혀 독자적인 '에우리디체'를 작곡했으나 페리의 것보다 나중에 출판되었으며 공연도 1602년에야 가능했다고 한다. 카치니의 '에우리디체'는 초연 이후 불행하게도 다시는 공연되지 않았다. 아마 페리의 '에우리디체'가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그 그늘에 가려 있었기 때문인듯 싶다. 페리의 '에우리디체'에는 반주를 넣은 레시타티브가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그전까지는 오페라라고 해도 마치 연극을 하는 것처럼 그냥 대사를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때까지만 해도 대사에 반주를 곁들인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페리는 대사에 반주를 넣음으로서 음악을 통하여 드라마의 긴장감을 고조시키거나 또는 안정적인 감정을 갖도록 했다.

 

그건 그렇고, 그러면 음악사상 최초의 여성 오페라 작곡가는 누구일까? 혹자는 독일의 힐데가르트 폰 빙겐(Hildegard von Bingen)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주로 교회에서 공연하는 성극에 음악을 곁들인 단순한 작품을 작곡했기 때문에 오페라다운 오페라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조사 결과,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카 카치니(Francesca Caccini: 1587-1641)가 최초의 여성 오페라 작곡가라는데 이의가 없게 되었다.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초기 바로크 시대의 유명한 작곡가이면서 뛰어난 소프라노였고 시인이면서 훌륭한 음악교사였다. 그의 아버지는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 1551-1618)이다. 줄리오 카치니 역시 훌륭한 작곡가이면서 뛰어난 성악가였다. 아무튼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12세기의 힐데가르트 폰 빙겐으로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온 동리 여성 오페라 작곡가 중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프란체스카 카치니가 작곡한 La liberazione di Ruggiero(루지에로 해방)은 여성 작곡가에 의한 역사상 최초의 오페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성악가로서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1600년 자코포 페리의 '에우리디체'가 초연되었을 때 타이틀 롤을 맡았다. 오르페오는 자코포 페리가 직접 맡았다.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플로렌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운 외에도 라틴어, 그리스어, 문학, 수학등 인문교육을 받았다. 프란체스카 카치니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 나섰다는 기록은 1600년에 프랑스의 앙리4세와 메디치가의 마리아가 결혼식을 올릴 때에 아버지인 줄리오 카치니가 작곡한 축하음악을 노래부른 것이다. 그로부터 4년후에 카치니 식구들이 모두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앙리는 프란체스카 카치니의 노래를 크게 치하하면서 '온 프랑스를 통틀어도 그대와 같은 성악가는 없소이다'라고 말하고 제발 프랑스에 남아서 활동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당시 함께 갔던 플로렌스의 관리들이 그건 곤란하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하였다.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1607년에 카니발을 위해 La stiava라는 작품을 작곡했다. 이 작품으로 인하여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메디치 궁정에서 봉사할수 있게 되었다. 그해애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조반니 바티스타 시뇨리니라는 사람과 셜혼했다. 프란체스카 카치니가 20세가 되던 때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마르게리타가 태어났다.

 

프란체스카 카치니의 '루지에로 해방' 음반 커버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플로렌스에서 오페라 공연이 있으면 가족들과 함께 출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여동생인 세티미아(Settimia), 이복동생인 폼페오(Pompeo), 기타 줄리오 카치니의 제자들이 동원되어 출연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프란체스카 카치니를 Le donne di Giulio Romano라고 불렀다. 줄리오 로마노는 줄리오 카치니의 예명이다. 프란체스카 카치니의 오페라 출연은 여동생인 세티미아가 결혼하여 만투아로 이사가기 까지 계속되었다.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1627년 초반까지 메디치 궁정에서 왕자와 공주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실내 연주회가 열리면 노래를 불렀으며 무대작품을 공연할 때는 감독도 하며 지냈다. 물론 작곡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메디치 궁정에서 가장 대우를 많이 받는 음악가였다. 하지만 모두들 프란체스카 카치니의 재능과 성실함을 인정하였으므로 여자로서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데 대하여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작곡을 빨리하기도 하거니와 여러 분야의 음악을 많이 작곡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당대에 프란체스카 카치니와 비견할수 있는 작곡가는 같은 메디디 궁정에서 봉사하고 있던 자코포 페리와 마르코 다 갈리아노(Marco da Gagliano)정도였다. 불행하게도 그의 작품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는 몇 편의 무대음악을 작곡했는데 대부분이 시인인 미켈란젤로 부로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의 대본에 의한 코미디였다. 미켈란젤로 부로나로티는 저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조카이다. 그의 대본으로 만든 무대음악으로는 La Tancia(1613), Il passatempo(1614), La fiera(1619) 등이 있다.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1618년에 36곡의 솔로 노래와 소프라노/베이스 듀엣 곡을 담은 Il primo libro delle musiche 를 출판하였다. 현대 스타일을 따른 깊은 감동을 주는 곡들이다. 대부분 종교적인 색채가 있는 탄식의 노래, 그리고 기쁨에 넘친 노래로서 화음적으로 처음 시도하는 음악으로 구성된 것이다. 1625년 겨울에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이탈리아를 방문한 폴란드의 황태자 라디슬라우스 시기스몬도를 환영하기 위해 75분에 걸친 '코미디 발레'곡인 La liberazione di Ruggiero dall'isola d'Alcina를 작곡하였다. 그는 나중에 블라디슬라브 4세로 등극하였다. 라디슬라우스 황태자는 이 작품에 감동하여 몇년후 바르샤바에서 일부러 다시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1626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재혼을 서둘러서 이듬해 10월에 루카 지방의 귀족인 토마소 라파엘리라는 남자와 재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태어났다. 그런데 결혼 3년 만에 두번째 남편이 요단강을 건너갔다.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두번째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루카의 라파엘리 저택에서 살면서 루카 지방의 음악가들과 많은 교분을 가졌다.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곧이어 메디치 가문으로 다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역병이 만연하여 메디치 가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지체될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두번째 남편이 세상을 떠난지 4년 후인1634년에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두 아이를 데리고 메디치 가문에 들어가 궁정음악가로서 또한 메디치 가문의 공주들을 가르치는 음악교사로서 활동하였다. 프란체스카 카치니는 1641년 메디치 궁전을 떠났고 이후 대중들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데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