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이탈리아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

정준극 2012. 2. 29. 15:04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로 알려진 작곡가, 성악가, 작가

 

줄리오 카치니(예명 줄리오 로마노)

 

일명 줄리오 로마노로 알려진 줄리오 카치니(Giulio Caccini: 1551-1618)는 후기 르네상스와 초기 바로크 시기의 이탈리아의 작곡가, 음악교사, 성악가, 기악연주자, 작가이다. 그는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의 초석을 세운 인물중의 하나로서 특히 새로운 바로크 스타일의 음악을 창조한 유일한 작곡가이다. 줄리오 카치니는 유명한 여류 작곡가인 프란체스카 카치니의 아버지이다. 줄리오 카치니는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수인 미켈란젤로 카치니이며 플로렌스의 조각가인 조반니 카치니의 형이다. 줄리오 카치니는 로마에서 루트와 비올과 하프를 배웠으나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성악가로서였다. 1560년대에 플로렌스의 대공인 메디치 가문의 프란체스코는 줄리오 카치니의 재능에 크게 감동하여 그를 로마에서 플로렌스로 데려와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리하여 1579년부터는 메디치의 궁전에서 테너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주로 국가적인 결혼식에서 도맡아서 축가를 불렀으며 당시 유행하던 화려하고 장엄한 인테르메디(Intermedi)에 출연하였다. 인테르메디는 오페라의 전신이라고 할수 있는 웅대한 스케일의 드라마틱 뮤지컬이라고 할수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조반니 데 바르디(Giovanni de'Bardi) 저택에 모이는 일단의 음악과들과 교분을 가지고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이들을 플로렌스 카메라타(Florentine Camerata)라고 불렀다. 이들은 주로 고대 그리스에서 유행하였던 드라마에 음악을 곁들인 작품의 재발견을 위해 노력하였다.

 

줄리오 카치니는 16세기 후반에 성악가로서 음악교사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 크게 활동하였다. 오늘날 음악교사로서 그의 업적이 과소평가된 경향이 있지만 그는 새로운 스타일의 창법을 가르쳤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당대의 카스트라토인 조반니 구알베르토 마글리(Giovanni Gualberto Magli)를 비롯하여 수많은 성악가들이 있었다. 조반니 구알베르토 마글리는 오늘날 음악사에 있어서 최초의 오페라라고 하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가 초연될 때에 오르페오를 불렀다. 줄리오 카치니는 최소한 한두번은 더 로마를 방문했다. 그는 로마에서 그의 작곡재능과 노래실력으로서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로마는 팔레스트리나를 비롯한 로마학파의 본거지였다. 음악적으로 보면 보수적인 곳이었다. 그러므로 1600년대 이후에 나온 줄리오 카치니의 스타일이 있는 음악은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줄리오 카치니는 성격은 생긴대로 논다는 옛말처럼 상당히 모난 편이어서 사람들로부터 핀잔과 비난을 받기가 일수였다. 더구나 질투와 시기심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수 위였다. 자기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약점을 고변하여 피해를 주는 일도 여러번 있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면 그는 메디치 가문의 공자인 피에트로(Pietro de'Medici)의 부인인 엘레오노라가 베르나르디노 안티노리라는 사람과 불륜 관계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이를 메디치가의 대표인 프란체스코 대공에게 고변하여 그로 말미암아 남편 피에트로가 부인 엘레오노라를 살해하게 만든 것이다. 또한 라이벌 격인 에밀리오 데카발리에리(Emilio de'Cavalieri)와 자코포 페리에 대하여도 지나치게 시기하고 질투를 하는 바람에 오히려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1600년에 카발리에리는 메디치가의 마리아와 프랑스의 앙리4세와의 결혼식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맡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나 카치니가 별별 소리로서 모함하는 바람에 그 직분을 맡지 못했다. 너무나 화가 난 카발리에리는 플로렌스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카치니는 동료인 자코포 페리가 '에우리디체'를 완성하고 악보를 출판한다고 하자 자기도 똑 같은 대본을 가지고 '에우리디체'를 만들어서 페리보다 먼저 출판하기 위해 노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페리보다 2년 후에 출판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카치니의 '에우리디체'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카치니의 제자들은 페리의 '에우리디체'가 처음 공연될 때에 여러 명이 출연하였고 심지어 자기의 딸인 프란체스카는 타이틀 롤을 맡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치니는 페리의 '에우리디체'가 자기의 '에우리디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무던히도 돌아다니며 선전했다. 줄리오 카치니는 1605년 이후 플로렌스에서 별로 영향력이 없는 입장이 되었다. 물론 작곡도 계속하며 다성화음을 이용한 종교음악의 연주회에 출연도 했지만 이미 전성기의 카치니는 아니었다. 줄리오 카치니는 1618년 플로렌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였다. 줄리오 카치니는 산타 아눈치아타(St Annunziata) 성당에 안장되었다.  

 

스틸레 레치타티보(Stille recitativo)라는 말은 플로렌스의 작곡가들이 새롭게 적용하던 단성부곡을 말한다. 이 스타일은 플로렌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16세기 말에 있어서 플로렌스와 베니스는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진보음악의 센터였다. 이 두 지역에서 발전된 혁신적인 음악 양식은 나중에 바로크 스타일의 모체가 되었다. 카치니의 업적은 직접적인 음악표현 형태를 창조한 것이다. 다시 말하여 강연 형태의 대사를 오페라적인 레치타티브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같은 새로운 스타일은 바로크 음악의 발전에 에센스로서 작용하였다. 줄리오 카치니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1602년에 출판된 Le nuovo musiche라는 책이다. 단성부곡들과 솔로와 바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를 위한 노래들은 집대성한 것이다. 이 책은 음악사상 최초의 단성부곡 모음집이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미 그 전에 도메니코 멜리(Domenico Melli)라는 사람이 단성부곡을 정리하여 출판한 일이 있다. 카치니의 책은 그 후편이라고 할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치니는 단성부곡과 바소 콘티누오의 개척자이며 정식 편찬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카치니는 그 책이 1602년에 출판되었지만 발간일을 1601년으로 표기하여 관계되는 사람들에게 증정하였다. 물론 카치니는 그 책의 서문에서 자기가 새로운 스타일의 개발자라고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줄리오 카치니는 세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1600년에 공연된 '에우리디체'는 자코포 페리가 주도하여 완성한 것이며 카치니는 일부 음악을 맡은 것이었다. 당시에는 여러 작곡가들이 합동하여서 오페라를 만들어 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Il rapimento di Cefalo(1600)는 Nuove Musiche에 포함된 작품이다. 그가 별도로 만든 '에우리디체'는 1602년에 발표되었다. 이외에도 그는 한 편의 인데르메디오(intermedio)를 작곡했다. Io che dal ciel farei la nuna 라는 곡이다. 플로렌스의 기록에 의하면 카치니는 1610년경부터 다성 성부를 위한 작품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다성 성부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마드리갈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Amarilli, mia bella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