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정능의 흥천사(興天寺)

정준극 2012. 3. 8. 08:26

정능의 흥천사(興天寺) - 삼각산 흥천사

한 때는 신흥사라 불러

 

넓직한 주차장에서 바라본 흥천사

 

요즘 케이블 방송인 CNTV는 지금부터 거의 6년전에 KBS에서 방영되었던 '용의 눈물'을 토,일에 또 재방송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채널이 많다고 하더라도 스포츠 중계나 동물의 왕국이 아니면 거의 볼꺼리가 없는 처지에 그나마 토요일과 일요일에 '용의 눈물'이 재방송되니 그 시간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정능의 흥천사를 소개하는 마당에 느닷없이 대하사극인 '용의 눈물'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하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 '용의 눈물'에 흥천사 얘기가 잠시 나오기 때문에 반가워서 몇마디 소감을 쓰는 것이다. 흥천사 얘기가 왜 나오느냐 하면,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얼마후에 태조가 신덕왕후를 추모하기 위해 흥천사를 지었기 때문이며 또 얼마후에는 태조 이성계가 나중에 태종이 된 이방원을 극도로 미워한 나머지 함경도 일대의 군사를 일으켜서 태종을 몰아내려고 할 때에 처음으로 함경도에서 온 비밀 대표들을 만나 장차의 계획을 모의를 한 곳이 바로 흥천사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 흥천사는 원래 지금의 중구 정동(당시 한성부 황화방)에 있었으나 한참 후인 정조 시절에 현재의 돈암동으로 이전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돈암동에 태조 이성계 시절부터 흥천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흥천사는 서울 정릉에 있다. 주소지는 성북구 돈암동이다.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돈암동)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와서(5번출구는 공사중) 아리랑고개를 향해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흥천사 가는 길이라는 표지가 있으므로 따라가면 나온다. 6번출구로 나와서 조금 걸어가다가 버스정류장에서 22번 마을버스를 타도 된다. 바로 절 앞까지 가므로 편하지만 버스비라도 아끼려면 걸어가도 그다지 장거리는 아니다. 마을버스의 종점이 있는 그 꼭대기에는 돈암2동 주민센터 건물이 있고 주민센터를 바로 지나면 흥천사 일주문이 서 있다. 일주문을 거쳐 오른편의 부도탑 및 기념비가 있는 곳을 지나 올라가면 넓은 주차장이 나오고 그 위로 산기슭에 절이 자리잡고 있다. 흥천사의 주위는 온통 고층 아파트 들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산중고찰이라는 그윽한 이미지는 어느덧 느낄수 없다. 예전에는 심심산곡의 조용한 사찰이었을 텐데 오늘날에는 명색만 삼각산흥천사일뿐 산중이라는 느낌이 아무리해도 없다. 비록 개발이 좋다고 하더라도 지나친 난개발 같아서 사실상 흥천사의 주위가 볼상 사납다. 

 

대웅전인 극락보전. 참으로 건물이 아름답고 화려하다.

 

태조 이성계는 개성에서 지내게 되자 뜻한바 있어서 황해도 곡산 호족의 딸인 강씨와 결혼하고 살림을 차렸다. 강씨는 왕건의 외가쪽 후손이라고 한다. 강씨는 이성계보다 무려 21세 연하였지만 총명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원래 이성계는 함흥에서 지낼 때에 이미 한씨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여러 아들 딸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으로서 고향 집을 떠나 큰 도시, 특히 왕도인 개성에서 살게 되면 여러가지로 불편하므로 또 한 명의 부인을 두는 것이 관례였다. 고향의 부인을 향처(鄕妻)라고 부르고 서울의 부인을 경처(京妻)라고 불렀다. 이성계는 조강지처보다는 젊고 미인이며 총명하고 집안 배경 좋은 강씨를 애지중지하였다. 강씨는 이성계의 정치적 조언자였다. 강씨는 뛰어난 지략으로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위해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러므로 이성계로서는 강씨가 고맙기만 할 뿐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가 되자 강씨는 당연히 중전이 되었다. 그때 향처인 한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이성계와 강씨는 2남 1녀를 두었다. 강비는 정도전 등과 합세하여 둘째 아들인 의안대군 방석을 세자로 책봉되도록 했다.

 

용화전

 

사태가 그렇게 되자 이성계의 향처인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과 공주들의 분노는 컸다. 그중에서도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큰 공을 세운 다섯째 아들 정안대군 방원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방원은 1398년에 자기를 비롯한 한씨 소생의 아들들을 모두 제거하려는 강비와 정도전 등의 음모를 미리 알아차리고 군사를 일으켜 이복 동생인 세자 방석을 포함한 강비 소생의 아들과 사위까지 제거한다. 물론 강비는 이러한 난리가 일어나기 전인 1396년(향년 40세)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자기 소생의 아들들이 이복 형에 의해 모두 살해 당하는 끔찍한 모습을 보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이성계는 강비가 죽자 지금의 덕수궁 뒤편 정동(貞洞)에 강비의 능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정릉(貞陵)이다. 이성계는 40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난 강비의 죽음을 무척이나 애통해하였다. 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향차를 바치게 하다가 다시 1년 간의 공사를 거쳐 큰 절을 지어주었으니 그것이 오늘날 돈암동 아파트 군락 사이에 의연하게 자리 잡고 있는 흥천사의 오리지널이다. 중복되는 설명이지만 정동에 있던 흥천사는 훗날 정조 시절에 비로소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태조는 정동에 흥천사가 완공되자 그 때부터 신덕왕후 강비의 능과 원찰을 둘러보는게 일상사가 되었다. 능과 절을 다 돌아본 뒤 신덕왕후와의 소생들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냈으며 신덕왕후의 능에 재를 올리는 절의 종소리가 나야만 침소에 들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수라 때에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불경 소리를 들은 후에야 비로소 수저를 들어 식사를 하는 등 정성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런 강비이며, 그런 강비의 소생들인데 정안대군 방원이 하루 아침에 경순공주만 제외하고 모두 죽여버렸으니 이성계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는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이성계는 임금이 된 방원을 지극히 미워하여서 옥좌에서 내쫓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고자 했으며 함경도로부터의 지지자들과 첫 비밀회합을 한 곳이 바로 흥천사라는 것이다. 물론, 이성계의 방원정벌 전투, 즉 '조사의의 난'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후 이성계는 방원이를 용서하고 임금으로서 인정하여 경복궁에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가 자기를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이미 죽은 신덕왕후 강비이지만 계속하여 죽어라고 미워하여서 이성계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릉을 파괴하여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또한 왕후는 무슨 얼어죽을 왕후냐고 하면서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이에 부화뇌동이나 하듯 의정부의 신료들은 옛 제왕들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신덕왕후의 능만이 황화방(지금의 정동)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며 더구나 외국 사신들이 묵는 관사와 가까이 있어서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으니 도성 밖으로 옮기는 것이 타당하다는 상소를 빗발치듯 올렸다. 태종은 그같은 상소를 받아들여 정릉을 1409년(태종 9)에 당시 사대문 밖의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당시는 양주군 성북면 사한리)로 천장했다. 태종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얼마후에는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지시했다. 또한 정자각도 헐어버리도록 했다. 정자각의 석재와 능의 석물들은 1410년 청계천의 광통교(현재 한국관광공사 앞의 석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이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종묘의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는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 그러나 저러나 신덕왕후 강비의 묘소가 훼손되고 철거되는 날 많은 비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는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태종이 서얼금고령과 적서차별을 제도적으로 만들어 후처의 자식들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한 것도 역시 계비 강비를 증오하여서라고 한다.

 

아파트 빌딩에 둘러쌓인 듯한 흥천사. 경내의 석탑

 

사적기에 의하면  태조는1396년(태조 5) 왕실발원으로 정동에 170여 칸에 이르는 큰 절을 이룩한 뒤 극락보전에 궁중원불인 명국보타락가산(明國寶陀洛伽山) 42수 관음보살상을 봉안하고 보국안민을 기도하는 향화(香華)가 끊이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정동의 신덕왕후 원찰은 중종 때인 1510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선조때인 1569년 절을 함취정유지(含翠亭遺址)로 옮겨 지었다. 1794년(정조 18) 현 위치로 이건한 뒤 절 이름을 신흥사(神興寺)로 바꾸었다. 1846년(헌종 12)에는 칠성각을, 1849년에는 적조암을, 1853년(철종 4)에는 극락보전을, 1855년에는 명부전을, 1865년(고종 2)에는 대방과 요사채를 짓고 절 이름을 원래대로 고쳤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명부전·용화전·칠성각·독성각·만세루·범종각·승방 등이 있다. 신덕왕후 강씨는 사후 300년 가까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 음력 8월 5일에야 지위가 왕비로 복위되고 신주를 종묘로 들여왔으며, 황폐하게 버려진 정릉이 복구되었다. 또한 음력 8월 20일에는 존호를 순원현경신덕(順元顯敬神德)으로 추존하였고, 1897년(광무 3년) 양력 12월 19일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최종적으로 추존되었다. 

 

극락보전의 42수 관음보살상

 

종각. 다른 곳처럼 운판, 목어 등은  보이지 않는다.

삼각산흥천사라고 쓴 현판이 있는 일주문. 여기도 삼각산에 속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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