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미완성 오페라

비밀재판(Les francs-juges)

정준극 2012. 3. 26. 09:04

비밀재판(Les francs-juges) - The Free Judges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미완성 오페라

 

엑토르 베를리오즈

 

'비밀재판'은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의 미완성 오페라이다. 베를리오즈는 23세의 청년이던 1826년에 친구 윔베르 페랑(Humbert Ferrand)의 대본으로 작곡을 시작하였으나 마지막 터치를 남겨놓고 스스로 포기하고 이미 작곡한 것을 대부분 파괴하였다. 다만, 베를리오즈는 서곡은 파괴하지 않고 보존했다. 그래서 '비밀재판'의 서곡은 오늘날에도 연주회의 레퍼토리로서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비밀재판'에 사용했던 멜로디들은 나중에 다른 작품에 재사용하기도 했다. 베를리오즈가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는 외형적으로는 정부의 공연허가를 받지 못해서였지만 아마도 당시 그가 당면했던 여러가지 난관과 심적 고통도 큰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베를리오즈는 1827년에 가난과 빚에 허덕여야 했으며 가정문제로도 무척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에게 있어서 희망이란 없었으며 모든 것이 절망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는 절망과 투쟁하는 중에 '비밀재판'을 시도하던 것이다. 그래서 베를리오즈는 '비밀재판'은 '절망의 찬가'(A Hymn of Despair)라고까지 불렀다. 실로 '비밀재판'에는 인간이 상상할수 없는 모든 분노와 절망과 자비를 갈구하는 애처러움이 담겨 있었다.

 

'비밀재판'이란 중세인 14-15세기에 독일을 중심으로하여 피크를 이루었던 무자비한 비밀재판을 말한다. 오늘날의 시스템과 가치관으로서 보면 말도 안되는 야만적인 인권말살의 재판이었다. 무법천지이던 당시에는 권력을 가진 자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이었다. 권력을 가진 자는 부하들을 동원하여 누구던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자비한 명령으로 사형을 내릴수 있었다. 재판은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피고의 권리는 하나도 인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재판'이라고도 불렸다. 재판은 대부분 사형언도로 마무리되었다. 사형을 당한 사람의 시신은 길거리에 걸어 놓아 사람들이 두려움을 갖도록 했다. 프랑스어의 Les francs-juges 는 영어로 Free judges 라는 뜻이며 독일어로는 Freischöffec 이라고 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Holy Vehme라고 했다. 종교를 앞세워서 무고한 백성들을 처단했기 때문이다. '비밀재판'은 Heimliches Gericht(Secret courts)라고도 하며 Stillgericht(Silent courts)라고도 불렀다. 억울하게 재판을 받는 백성들이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하고 재판장의 결정에 무조건 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Verbotene Gerichte(Forbidden courts)라고도 불렀다. 아무도 방청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를리오즈의 평생 친구인 페랑은 법학도이면서 시를 사랑하였다. 페랑은 이미 베를리오즈를 위해 1825년에 칸타타 La Revolution grecque의 가사를 작성한바 있다. 페랑은 베를리오즈가 첫 오페라로서 '비밀재판'을 작곡하겠다고 하자 대본을 쓰겠다고 나섰다. '비밀재판'은 종교를 앞세운 권세있는 자들의 무자비한 폭정과 그런 중에서 열정적인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젊은이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억압으로부터 구원한다는 내용이다. 베를리오즈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프랑스에서 이른바 '구원오페라'(Rescue opera)라는 것이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을 정의로서 구원한다는 내용들이다. 베를리오즈는 메울이나 케루비니처럼 프랑스 혁명 스타일의 구원오페라를 작곡하고 싶어했다. 베를리오즈는 '비밀재판'을 완성하면 오데온극장에서 공연하고 싶어했다. 오데온극장은 페랑의 대본을 보고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여 작곡을 추진토록 했다. 베를리오즈는 1826년 6월에 1막과 2막을 완성했고 7월과 8월에는 3막을 작곡했으며 9월에는 마지막 터치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오데온극장은 정부의 공연허가를 받지 못했다. 정부의 방침은 새로운 오페라의 공연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하여 베를리오즈의 '비밀재판'은 선반 위에 쌓여 있게 되었다.

 

베를리오즈는 독일의 극장들과 연락하여 '비밀재판'의 공연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칼스루에의 극장과 연락을 했다. 베를리오즈는 '비밀재판'에서 민감하다고 생각되는 파트를 1829년과 1833년에 수정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비밀재판'은 베를리오즈의 생전에 한번도 무대에 올려지지 못했다. 다만, 1826년에 오리지널 스코어에서 몇 곡만이 콘서트 형식으로 연주되었을 뿐이었다. '비밀재판'의 서곡은 1828년 5월 26일에 파리음악원에서 별도로 초연되었다. 프란츠 리스트는 1833년에 '비밀재판'의 서곡을 주재로 하여 피아노곡을 만들었다. '비밀재판'의 음악 중에서 일부는 '환상적 교향곡'(Sumphonie fantastique)에 재사용되었으며 '장송과 승리의 교향곡'(Symphonie funebre et triomphale)의 제2악장에도 '비밀재판'의 음악이 재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