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미완성 오페라

결혼(Die Hochzeit)

정준극 2012. 3. 26. 14:44

결혼(Die Hochzeit) - The Wedding

리하르트 바그너의 미완성 오페라

 

리하르트 바그너

 

'결혼'(Die Hochzeit)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가 아직도 젊은 시절에 시도했던 작품이지만 미완성으로 남겼다. 바그너는 '결혼'의 대본을 직접 쓰고 1832년 후반부터 작곡에 들어갔다. 19세의 바그너가 라이프치히대학교의 학생으로 있을 때였다. 바그너는 '결혼'을 거의 완성단계에서 포기하고 대본을 찢어 버렸다. 그의 누이인 로잘리(Rosalie)가 마음에 안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로잘리는 가족 중에서 바그너를 가장 응원했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바그너의 '결혼'에서 남아 있는 것은 세 곡뿐이다. 대본이 없기 때문에 스토리가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다만, 아다와 아린달이라는 두 사람의 결혼을 둘러싼 이야기라는 것 정도가 알려져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결혼은 정략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아다가 사랑하는 사람은 카돌트라는 청년이었다. 카돌트는 아다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다를 찾아온다. 그리고는 아다를 아예 자기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 덮치려 한다. 아다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카돌트를 밀친다. 그러는 와중에 카돌트를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게 만든다. 아직도 카돌트를 사랑하는 아다는 카돌트의 장례식에서 쓰러져 그의 옆에서 죽는다. '결혼'의 주인공들인 아다(Ada)와 아린달(Arindal)은 바그너가 1833년에 완성한 첫 오페라인 '요정들'(Die Feen)의 주인공들로 재등장한다.

 

오늘날 라이프치히의 브륄가에 있는 바그너의 생가. 당시의 건물은 없어지고 새 건물이 들어섰다. 당시에는 '붉고 흰 사자의 집'이라는 명칭의 건물이었다. 라이프치히의 유태인 구역에 있었다.

                        

기왕에 여유가 있으므로 바그너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추가코자 한다. 바그너는 라이프치히의 유태인 구역인 브륄(Brühl) 거리에서 태어났다. 유태인을 그렇게도 증오하는 바그너가 유태인 구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바그너가 유태계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식구들이 어떻게하여 유태인 구역에서 살았는지는 잘 모른다. 바그너의 아버지가 상인이었기 때문에 유태인구역에서 장사를 했던 것도 아니었다. 바그너의 아버지인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는 경찰서 서기였다. 바그너의 어머니가 유태계인지도 모른다. 어머니 요한나 로지네(Johanna Rosine)는 빵집 주인의 딸이었다. 바그너는 아홉 자녀들 중 마지막인 아홉번째 아이였다. 그런데 참으로 불행하게도 바그너의 아버지는 바그너가 태어난지 6개월만에 장질부사에 걸려 그만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바그너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채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후 바그너의 어머니는 여러 자녀들을 데리고 살기가 힘들었던지, 또는 오래전부터 딴 마음을 먹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하여튼 아버지의 친구인 배우 겸 극작가인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와 동거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나중에 결혼했는지 안했는지는 역시 확실치 않다.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는데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얼마후 바그너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이어의 집이 있는 드레스덴으로 옮겨갔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바그너에게 있어서 드레스덴은 두번째 고향이었다. 바그너는 14세가 되던 해까지 루드비히 가이어가 자기의 친아버지인줄 알고 자랐다. 이름도 빌헬름 리하르트 가이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그 후에 친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이름을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로 고쳤다. 바그너는 1827년에 라이프치히로 돌아왔다. 라이프치히대학교에 입학했다.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듬해인 1828년부터는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바그너는 그 해에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듣고 너무 감동하여 베토벤을 극히 존경하기 시작했다. 바그너는 베토벤을 자기의 인스피레이션으로 삼았다. 바그너는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듣고 또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로부터 바그너는 모차르트를 존경하기 시작하고 자기의 인스피레이션으로 삼았다. 바그너는 칼 마리아 폰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보고 너무 감동하였다. 그리고는 베버를 이상형으로 삼았다. 이렇듯 바그너는 여러 작곡가로부터 감동을 받았지만 아무래도 베토벤이 제일이었다. 바그너는 1832년에 첫 교향곡을 작곡했다. 교향곡 C 장조이다. 완전히 베토벤 스타일이었다. 프라하에서 초연되어 박수를 받았다. 그해에 바그너는 오페라를 시도하여 첫 작품으로서 '결혼'을 구상하고 상당부분을 작곡했으나 누이인 로잘리가 '내용이 뭐 이래?'라면서 치삐라라고 하자 로잘리의 말에 순종하여 완성을 중단하고 그동안 작곡해 놓았던 스코어를 파기했다. 바그너는 이듬해인 1833년 형의 주선으로 뷔르츠부르크의 합창지휘자로 일자리를 구해서 가게 되었다. 바그너는 이곳에서 첫번째 오페라인 '요정들'(Die Feen)을 완성했다. 오늘날 '요정들'은 바그너의 다른 오페라들에 그늘에 가려서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바그너의 첫번째 부인인 크리스티네 빌헬미네 플라너의 말년의 모습. 애칭으로는 민나라고 불렀다. 연극배우였다. 바그너와의 30년 결혼생활에서 20년은 바그너와 함께 그럭저럭 지냈고 10년은 아예 별거하고 살았다. 바그너보다 4년 연상이었으며 바그너보다 13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났다.

 

결혼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바그너는 1836년, 그가 23세 때에 배우인 크리스티네 빌헴미네 '민나' 플라너(Christine Wilhelmine 'Minna' Planner)를 만나 결혼했다. 민나라는 애칭의 바그너 부인은 바그너보다 4년 연상이었다. 민나의 아버지는 군악대의 트럼펫병사였다. 민나는 15세의 어린 소녀일 때 근위대의 어떤 장교의 유혹에 빠져서 딸까지 낳았다. 민나는 결혼도 하지 않은 여자가 딸을 기르고 있다고 하면 곤란하므로 딸을 동생이라고 주장하면서 친척집에서 길렀다. 그런 민나를 바그너가 열정적으로 사랑하여 결국 두 사람은 1836년 결혼하였다. 민나와 바그너는 결혼후 30년을 부부로서 지냈다. 그중에서 10년은 서로 떨어져서 남남처럼 살았다. 별거의 사유는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의 연애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민나에게 이혼해 달라고 계속 요청했지만 민나는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면서 이혼을 해주지 않았다. 바그너는 민나에게 매달 생활비를 제공하였다. 드레스덴에 살고 있던 민나는 1866년 56세의 나이로 심장병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는 민나가 아직도 법적으로 부인이지만 민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민나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와 결혼해서 살았고 아들도 하나 두었다. 작곡가라는 지그프리트 바그너이다.

바그너의 결혼생활에 대하여 소개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으므로 이쯤해서 끝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