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베토벤의 사람들

베토벤의 여인들 1

정준극 2013. 12. 4. 06:40

베토벤의 여인들 1

 

루드비히 반 베토벤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도 없고 자녀도 없다. 만일 결혼을 해서 자녀를 두었고 다행히도 오늘날 그 후손이 있다면 아마 베토벤의 작품을 사용하는데 따른 저작료를 받아 낼수 있어서 재산깨나 모을수 있었을지 모른다. 각설하고, 위대한 작곡가 중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지낸 사람들이 더러 있다. 프란츠 슈베르트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 하기야 슈베르트는 불과 31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결혼을 준비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요한네스 브람스는 64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를 사모했지만 감히 스승의 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아서 '에라 평생을 혼자 지내자'라고 생각했다는 얘기다. 조지 프레드릭 헨델은 74세까지 살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보다는 신앙을 택했던 것 같다. 헨델은 나중에 눈병까지 도져서 고생을 했다. 그러니 누가 와서 수발을 들겠는가? 프레데릭 쇼팽은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애인은 있었다. 작가인 조르즈 상드와의 관계는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이다. 프란츠 리스트도 형식적으로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지냈으며 말년에는 로마 가톨릭의 신부가 되었지만 그에게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얻은 코지마라는 딸이 있다. 코지마는 나중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부인이 되었다. 리스트가 마리 다구라는 백작부인과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것은 새로운 얘기도 아니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다름아닌 코지마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모리스 라벨도 미혼으로 평생을 지냈다. 독신주의자였던 모양이었다. 그런가 하면 영국의 벤자민 브리튼은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아마 게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지냈다. 파트너는 유명한 테너 피터 피어스였다고 한다.

 

베토벤이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지냈다는 것이 무슨 큰 사건이냐고 말할수 있지만 그래도 베토벤이라고 하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인데 그런 훌륭한 분이 결혼을 하지 않은 사연은 무엇인지, 그리고 혹시 정말로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양반이나 아닌지, 아니면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는 알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모두 이루지 못할 사랑으로 끝난 것이나 아닌지, 또한 연애를 했다면 도대체 상대방 여인들은 누구누구인지...이런저런 궁금증을 아무래도 풀어야 하겠기에 '베토벤의 여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일고를 하는 것이다. 하기야 지금까지 여러 학자 및 작가들이 베토벤의 여인들에 대하여 나름대로 자료를 내놓은 것이 있고 개중에는 '불멸의 연인'(The Immortal Beloved)이니 뭐니 해서 영화로도 만든 것이 있으므로 이제와서 '베토벤의 여인들'을 고찰하는 것은 '참으로 할 일도 없다'는 핀잔을 받을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블로그에 수록된 '베토벤의 사람들'의 구색을 위해서, 그리고 본인의 참고자료로 삼기 위해서 정리하는 바이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필자의 협소한 생각으로서는 베토벤이 당연히 결혼을 생각했었는데 그간 만난 여인들은 거의 모두 귀족 출신들이어서 결혼 상대자로서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세월만 흘러서 결혼을 못했던 것 같다. 귀족 여인들은 베토벤의 재능을 흠모하고 존경하기는 했지만 신분이 틀리고 가진 것도 없고 생긴 것도 별로이기 때문에 정작 결혼 상대자로서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한가지 결혼을 못했던 것은 베토벤도 한 성격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결혼해야 고생만 할 것이 뻔하므로 피했던 것 같다. 베토벤의 성격이 괴퍅하다는 것은 온 동리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누가 보더라도 베토벤과 결혼하면 영광은 커녕 뒷치닥꺼리만 하다가 지낼 것 같아서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불멸의 연인' 포스터. 어느 여인이 과연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었는가? 궁금.

 

베토벤과 본(Bonn)에서부터 친구였던 프란츠 베겔러(Franz Wegeler) 박사는 '베토벤은 끊임없이 여인들을 사랑했다. 무슨 재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여자들과 잘 사귀었다. 키도 크지 않고 모습도 핸섬하지 않은 마당에 아무튼 그를 좋아한 여자들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다른 멋쟁이 청년들이 베토벤에게 질투심을 가지기도 했다'고 썼다. 베토벤을 10년이나 넘게 이것 저것 치료해 왔다는 어떤 의사는 '베토벤은 우아하면서도 연약한 여자들을 좋아했지요'라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아마 자기 어머니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했던 것 같다고 덧 붙였다. 그림으로 남아 있는 베토벤의 어머니인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은 일견 연약한 것이었다. 베토벤은 아버지가 술에 취해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리는 광경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동정심과 애정이 남달랐다. 그런데 베토벤은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와 사귄다는 얘기를 친구들에게조차 거의 하지 않는 습성이 있었다. 그런 침묵주의는 상대방 여인들에게도 해당되었다. 다시 말해서 베토벤은 어떤 여인을 심히 좋아하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일부러 하지 않거나 또는 아예 하지 못하는 일종의 숙맥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질텐데 굳이 입만 아프게 '이히 리베 디히' 어쩌구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베토벤의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베토벤 초상화를 보면 실물이야 안 그렇겠지만 상당히 세련되지 못한 모습이라는 것을 짐작 할수 있다. 머리칼을 헝클어지고 눈빛은 무엇을 뚜렷이 응시하는 듯 부드럽지가 않다. 눈에 어떤 영감들이 담겨 있는 듯 눈빛이 강렬하다. 어찌보면 말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근엄하며 고집불통으로 보인다. 그런데 웬 여자들이 그렇게도 그를 좋아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마 피아노를 귀신처럼 잘 쳐서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진짜 남성으로서의 매력이 있어서 일까? 베토벤이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세계가 존경하는 악성 베토벤이다. 그런데 그가 만일 결혼하여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아이들의 기저기나 갈아주고 있고 마누라의 잔소리에 못이겨서 음식쓰레기나 밖에 내다 버리고 있다면 어떨까? 그런 모습을 상상이나 할수 있을까? 베토벤은 집에 청소하러 오는 아주머니나 집주인 아주머니에게 신경질적으로 잔소리깨나 퍼붓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도 잔소리가 심하고 참견이 많아서 '아니 여기 아니면 뭐 일할 데가 없나?'라면서 그만 둔 파출부들도 여러 명이 있었고 하숙집 아주머니로부터 이젠 그만 다른 집으로 나가 달라고 강요를 받은 일도 한두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 성격이므로 만일 결혼을 했더라면 세상에 배겨낼 부인이 없었을 것이다. 결혼을 안했기 때문에 바가지를 긁는 아내도 없고 칭얼거리는 아이들도 없으므로 오로지 작곡에만 전념할수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인생의 반려자가 있었더라면 더 의미있는 작품들이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다. 몸도 시원치 않고 음악가로서 결정적인 결함인 청각이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터에 고독을 씹으며 혼자서 지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작품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는 일이라는 얘기다.

 

청년 베토벤. 머리는 헝클어지고 눈매는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고집스럽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베토벤은 22세까지 본에 살았었다. 그전에 17세의 청년으로서 청운의 뜻을 품고 홀로 비엔나에 가서 겨우 두어달 있었기는 했다. 그러는데 본에 계시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바람에 다시 본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튼 본에 22세까지 살았다는 계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베토벤은 20대의 청년으로서 본에서 두어명의 여자들을 만나 좋아하는 감정을 가진 일이 있다. 베토벤이 처음으로 연애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여자는 자네트 혼라트(Jeannette Honrath)였다. 무얼 하는 아가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을 대단히 좋아하는 아가씨였다. 자네트 혼라트는 본이 집이 아니라 쾰른이었다. 자네트는 금발에 아주 명랑하고 활달한 아가씨였다. 자네트는 본에 있는 폰 브로이닝스씨 집의 딸들과 친구여서 간혹 본을 방문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폰 브로이닝의 아들인 슈테판과 친구사이였다. 그래서 폰 브로이닝씨 집에서 자네트와 간혹 만날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베토벤은 자네트의 모습에 매혹당했다. 그보다도 자네트가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친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자네트는 기본적으로 귀족 집안이어서 베토벤처럼 별 볼일 없는 집안의 남자와 장래를 약속할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약간 로맨틱하게 될뻔 하다가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자네트는 베토벤으로서 첫 사랑이나 마찬가지였다. 자네트가 베토벤을 안중에 두지 않고 귀족 집안의 남자와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하자 베토벤은 그러지 않아도 귀족들에게 감정이 좋지 않던 터에 자네트에게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다.

 

독일 본(Bonn)에 있는 베토벤 생가. 원래 태어난 집은 2차 대전 중에 폭격으로 파괴되고 그 자리에 예전 모습대로 다시 지은 건물이다. 현관 상단에 BEETHOVENS BEBURTSHAUS 라고 적혀 있고 왼쪽 창문 위에 돌로 만든 명판이 붙어 있다.

 

본에 프로일라인 베스터홀트(Fräulein Westerhold)라는 아가씨가 있었다. 아무런 부담없이 남자들과 사귀는 그런 여자였다. 귀족은 귀족인데 선제후 궁전에서의 지나치게 격식적인 사교모임에 싫증을 내고 보통 사람들과 시시덕 거리기를 좋아하는 여자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프로일라인 폰 베'(Fräulein von W)라고 불렀다. 폰(von)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 때문에 귀족층이기는 하지만 귀족으로서의 자격이 부족하니 풀 네임을 부를 필요는 없으므로 약자로서 베(W)라고 불렀던 것 같다. 아무튼 청년 베토벤도 어찌하다가 이 아가씨와 잠시 좋아지낸 일이 있지만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베토벤은 쾰른에 살고 있는 자네트를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폰 브로이닝씨 집안의 딸 들 중에서 엘레오노레라고 하는 아가씨를 좋아하게 되었다. 엘레오노레는 베토벤의 친구인 슈테판 폰 브로이닝의 여동생이었다. 엘레오노레는 레오노레라고도 불렀다. 나중에 베토벤이 그의 작품에서 레오노레를 자주 등장시킨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짐작들이다. 베토벤이 엘레오노레와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친구인 프란츠 베겔러가 폰 브로이닝씨에게 말해서 베토벤을 엘레오노레의 피아노 선생으로 추천한 것이 계기였다. 프란츠 베겔러와 폰 브로이닝은 잘 아는 사이였다. 물론 베토벤과 엘레오노레의 관계는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베토벤이 본을 떠나는 바람에 그러지 않아도 마감되었다. 베토벤은 그후에도 엘레오노레에 대한 감정을 씻어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엘레오노레를 '사랑하는 엘레오노레'(Adorable Eleonore)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베토벤은 비엔나에 있을 때에 피아노 소나타 한 곡을 엘레오노레에게 헌정할 생각으로 작곡을 시작하였으나 미완성으로 남겼다. 그가 작품번호 10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할 즈음이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고나서 그의 유품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베토벤은 엘레오노레의 작은 초상화를 담은 메달을 그때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바베트 코흐(Babette Koch)라는 아가씨도 있었다. 베토벤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아가씨였다. 베토벤은 비엔나에 가서도 바베트 코흐를 잊지 못해서 친구인 프란츠 베겔러에게 바베트가 잘 있는지 궁금하며 벌써 두번이나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으니 만나거든 답장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달라고 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아가씨였다. 바베트의 어머니는 본에서 아주 고급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에 고급 식당에서는 춤도 출수 있었다. 베토벤은 친구들과 함께 그 식당에 몇번 갔었고 바베트와 춤도 같이 추었다. 그래서 이럭저럭 로맨틱한 감정을 가졌었던 것 같다. 바베트는 더구나 엘레오노레의 아주 친한 친구였다. 베토벤의 친구인 프란츠 베겔러는 바베트를 '이상형의 완전한 여인'이라고까지 말했었다. 예쁘고 상냥했던 모양이었다. 베토벤은 바베트를 애칭으로 베(B)라고 부르면서 호감을 표시했으나 베토벤의 비엔나행으로 멀어지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막달레나 빌만(Magdalena Willman)이라는 여인도 베토벤과 관련이 있는 여인이었다. 원래 본 출신으로 성악을 공부했던 막달레라는 베토벤이 비엔나로 간지 2년 후에 성악가로서 활동하기 위해 역시 비엔나로 왔다.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막달레나를 만나서 무척 반가워했고 한두번 만나다가 결국은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프로포즈를 했으나 미안하게도 거절당했다. 나중에 막달레나의 조카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때 막달레나는 베토벤에 대하여 '못 생겨도 한참 못 생긴 사람이어요. 게다가 정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꼭 반미치광이와 같으니...'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막달레나가 왜 베토벤의 프로포즈를 거절했는지 알만하다.

 

베토벤을 평생동안 괴롭힌 문제가 있다. 베토벤은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 또한 작곡가로서 비엔나의 상류사회, 즉 귀족사회의 사람들과 가깝게 지낼수 있었다. 당시에 음악가들은 귀족들의 후원을 얻어야 제대로 활동할수 있었으므로 베토벤으로서 귀족사회에 발을 디딘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결코 그 사회의 일원이 될수가 없었다. 베토벤은 서민출신이었고 서민으로서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체가 높은 여인들이 베토벤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베토벤의 재능 때문이지 신분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서 베토벤은 간혹 귀족 여인들과 로맨틱한 관계에 있기도 했지만 결국은 신분상의 장애를 넘지 못했다. 베토벤의 생김새도 문제가 되지 않을수 없었다. 작은 키였다. 심하게 말해서 땅딸만했다.얼굴은 검으틱틱했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던 자국이 남아 있어서 약간 얽었다. 눈섶은 무성했다. 머리칼은 검고 올이 굵었다. 옆에 있으면 빗으로 빗어주고 싶은 심정이 들만큼 항상 헝클어져 있었다. 누구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건 그 사람에 대하여 깊은 관찰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근시때문이었다. 실제로 베토벤은 47세가 될 때까지 안경을 썼다. 안경쓴 베토벤...좀 이상하긴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슈베르트야 안경 쓴 모습이 훨씬 보기에 좋지만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안경 쓴 모습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베토벤은 나이가 50줄에 들어서기도 전에 흰머리가 급격히 많아졌다. 가까이서 보면 마치 머리에 서리가 내린듯 했다. 베토벤은 옷도 괴상하게 입는 편이었다. 당시에 베토벤을 만나러 갔던 사람들은 베토벤이 50줄에 들어선 나이인데도 대체로 노란 단추를 단 파란 조끼에 빳빳한 하얀 바지를 입은 것을 보았다. 나쁘게 말해서 마치 어릿광대와 같은 모습이었다. 얼마후에 베버가 베토벤을 만나러 갔던 일이 있었다. 베토벤은 아주 낡아빠진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소매는 너덜너덜했다는 것이다. 그 즈음에 베토벤은 '장엄 미사곡'(Missa Sokemnis)을 작곡하고 있었다.

 

어느때 베토벤은 비엔나 시내에서 부랑자로 오해를 받아 경찰에게 잡혀 간 일이 있었다. 베토벤은 '내가 베토벤이요'라고 설명했지만 경찰은 '위대하신 베토벤 선생은 이런 넝마와 같은 옷을 입고 거리를 배회할 분이 아니다'라면서 믿지를 않았던 것이다. 한편, 그의 동생인 요한 반 베토벤은 린츠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땅을 사고 지주로 행세를 하였다. 그는 비엔나에서 셋방이나 전전하면서 사는 형 베토벤에게 보란 듯이 편지를 보내면서 말미에 '부동산 소유자 요한 반 베토벤'이라고 썼다. 베토벤은 동생 요한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편지의 말미에 '두뇌의 소유자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라고 썼다. 돈이 많아서 땅을 사서 지주가 된 것이 무에 대단한 일이냐는 핀잔 겸 풍자였다. 이건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베토벤이 재산이나 치부에는 재능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본에서 비엔나로 온 베토벤은 뛰어난 피아노 재능으로 인하여 귀족들의 살롱에서 연주회를 가져 박수를 받았으며 아울러 귀족들로부터 자기들의 딸이나 부인에게 피아노 레슨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귀족집 아가씨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는 것은 상당한 행운이었다. 귀족집의 딸들은 대개 결혼 적령기에 있는 아가씨들이었다. 당시에 그런 여자들은 피아노도 웬만큼 칠줄 알아야 하고 노래도 웬만큼 부를 줄 알아야 나중에 파티에서 솜씨를 자랑하여 남편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이 일종의 관습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서 너도나도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초청해서 레슨 선생으로 삼았다. 그러다보니 베토벤은 여러 그럴듯한 아가씨들을 손쉽게 만나서 얘기도 나누고 차도 마시고 산책도 다닐수가 있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귀족집의 아가씨들은 공연히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동정을 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키는 작고 얼굴은 검으틱틱하며 머리칼은 산지사방으로 뻗어 있는 남자이지만 피아노 실력만은 말할수 없이 뛰어났기 때문에 호감을 가지고 접근했다.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베토벤은 오히려 여난으로 인한 피해자라고 말할수 있다.

 

바르바라 폰 케겔비츠(Barbara von Kegelwicz) 백작부인은 마침 베토벤이 하숙을 하고 있던 집의 길건너 저택에 살고 있었다. 베토벤은 백작부인과 그의 여동생의 피아노 선생으로서 백작부인의 저택을 스스럼없이 드나들수 있었다. 어떤 날 저녁에는 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않은채 백작부인의 집을 방문했다.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에 슬리퍼를 신고 머리에는 뾰죽한 나이트 캡을 쓴채 레슨을 하기 위해 갔던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아하, 노인네니까 그런 차림으로 남의 집에 갈수도 있겠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베토벤은 실은 그때 겨우 27세였다. 베토벤은 그만큼 괴짜였다. 그때 베토벤은 바르바라 폰 케겔비츠 백작부인에게 피아노 소나타 작품번호 7번을 헌정했다. 이 소나타는 원래 Grand Sonata 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Verliebte(사랑에 빠진 여인의 소나타: Amorous Sonata)라고 제목을 바꾸었다. 이렇게 말하면 대충 짐작하겠지만 베토벤이 바르바라 폰 케겔비츠 백작부인을 사모하여서 이 소나타를 작곡하여 헌정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자료에는 Babette de Kegelvics 백작부인이라고도 되어 있어서 혼선을 준다.)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베토벤이 백작부인의 여동생도 좋아했다는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베토벤이 바르바라 폰 케겔비츠 백작부인을 사모하여서 피아노 소나타 작품번호 7번을 헌정한 때로부터 2년이 지났다. 베토벤은 다른 피아노 작품을 하나 더 만들어서 백작부인에게 헌정했다. 살리에리가 '활슈타프'에서 소재를 가져와서 작곡한 La stessa, la stessissima 를 바탕으로 만든 피아노 변주곡이었다. 베토벤이 '활슈타프'를 주제로 하여 변주곡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처사였다. '활슈타프'에서 존 활슈타프 경은 한량으로서의 바람끼가 동하여서 미세스 포드와 미세스 페이지에게 각각 편지를 보낸다. 두 사람 중에 한 여자라도 낚으면 다행이고 두 여자 모두 낚으면 더할수 없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두 부인은 활슈타프에게서 온 편지를 서로 대조해 보니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았다. 두 부인은 활슈타프의 의도를 단번에 파악하고 골탕을 먹이기로 계획을 꾸민다. 결국 활슈타프는 두 부인 등등의 계략에 말려서 망신만 당하고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한다. 베토벤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면 비슷했지 별로 다르지 않았다. 베토벤은 백작부인과 그의 여동생에게 똑 같은 내용으로 사모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어떤 자료에는 백작부인의 여동생이 아니라 다른 여자였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어쨋든 백작부인 및 여동생과의 사건은 사모로만 끝을 맺었다. 얼마후 백작부인은 이탈리아의 명문인 에르바 오데스칼키(Erba-Odescalchi) 공과 결혼하여 더 지체 높은 바르바라 오델스칼키 공녀가 되었다. 베토벤은 바르바라가 결혼한지 한달이 지난 때에 그에게 피아노 협주곡 C 장조를 헌정하였다. 이 피아노 협주곡은 베토벤으로서는 처음 시도한 피아노와 관현악 작품이었다. 이걸 보면 백작부인과 그의 여동생에 대한 베토벤의 사모의 마음은 활슈타프와는 거리가 먼 것을 알수 있다.

 

베토벤은 대단히 완고하고 성질이 불같아서 농담을 한다든지 또는 여자에게 희롱같은 것을 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제자인 페르디난트 리스(Ferdinand Ried)는 베토벤을 한마디로 '못 말리는 희롱꾼'(Hopeless flirt)라고 말했다. 어느날 리스가 베토벤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는데 어떤 괜찮게 생긴 젊은 여자가 지나가자 베토벤은 그 여자에게 윙크를 보냈다고 한다. 그 젊은 여자는 기분이 언짢아서 베토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바삐 지나갔다고 한다. 리스는 그런 경우가 두어번 더 있었다고 말했다. 또 어느 날엔 베토벤의 하숙집으로 레슨을 받으러 갔었는데 어떤 젊은 여자가 이미 와서 소파에 편하게 앉아 있었다고 한다. 베토벤은 그 젊은 여자와 간혹 짖궂은 농담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베토벤은 제자인 리스가 나타나자 리스에게 좀 분위기 있는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해 달라고 말했다. 리스가 어쩔수 없이 아는 곡을 하나 피아노로 연주했다. 그랬더니 그 젊은 여자와 꼭 붙어서 앉아 있던 베토벤이 리스에게 '아니, 좀 더 멜랑콜리한 곡을 치란 말야'라고 말했다. 그래서 리스는 좀 우울한 곡을 쳤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좀 열정적인 곡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또 좀 열정적인 곡을 쳤다. 베토벤은 분위기를 만들어서 그 여자의 마음을 잡아 보려고 했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얼마후에 베토벤은 리스의 집에서 길하나만 건너면 되는 곳에 새로운 하숙집을 정했다. 리스는 베토벤에게 '식사가 여의치 않거나 무슨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라도 우리 집에 오세요'라고 말했다. 베토벤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베토벤은 몇 달이나 지나면서 한번도 리스의 집에 가지 않았다. 대신에 리스의 집의 바로 옆에 있는 어떤 양복점은 자주 찾아갔다. 양복점 주인에게는 매력적인 딸이 셋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토벤은 양복점을 찾아갈 구실이 마땅치 않으니까 심지어 바늘을 빌려 달라는 구실로 양복점을 찾아가서 그집 딸들과 농담이나 하다가 가곤 했다. 자기가 무슨 바느질을 한다고 바늘을 빌려달라고 그러는지 알수 없다는 것이 리스의 주장이었다.

 

줄리에타 구이치아르디 백작부인

                             

어느덧 베토벤이 비엔나에 온지도 여러 해가 지났고 베토벤의 나이는 30에 들어섰다. 베토벤은 그의 여섯 곡으로 세트를 이룬 첫 현악사중주곡을 완성했다. 그리고 줄리에타 구이키아르디(Giulietta Guicciardi)라는 젊은 백작부인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고 있었다. 그때 줄리에타는 16세였다. 그 즈음에 베토벤은 청각에 이상을 느끼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본에 있는 친구인 독토르 프란츠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제야 나의 삶도 밝아지려나보다. 그처럼 아름답고 지성적인 젊은 아가씨를 만난 것이 그런 징조이다. 나는 그 아가씨를 사랑한다. 그 아가씨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는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그 젊은 아가씨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진정한 행복이 눈 앞에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어서 '아, 불행하게도 그 아가씨는 나와 같은 신분이 아니다(She is not of my rank in life).'라고 덧 붙였다. '내가 그 여자와 같은 신분이 아니다'라고 쓴 것이 아니라 '그 여자가 나와 같은 신분이 아니다'라고 쓴 것은 베토벤의 심중을 알수 있게 해주는 표현이었다. 다음해인 1801년에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한 곡을 줄리에타에게 헌정했다. 오늘날 '월광 소나타'라고 알려진 너무나 유명한 곡이다. 피아노 소나타 14번이다. 베토벤은 과연 이 소나타를 줄리에타에게 헌정할 것인지 아닌지를 두고 고심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옛날에 학교에서 배울 때에는 베토벤이 어떤 달 밝은 밤에 산책을 나왔다가 어떤 신기료장수의 집에서 피아노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발길을 옮겨 그 집으로 들어가보니 어떤 눈먼 소녀가 피아노를 더듬더듬 치고 있기에 베토벤이 그 소녀에게 잠시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한 후에 피아노 앞에 앉아서 그때의 감정을 즉흥적으로 연주했으니 그것이 바로 '월광곡'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얘기일 뿐이며 실은 베토벤이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심히 사랑했던 줄리에타 구이키아르디 백작부인에게 헌정한 곡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아무튼 얼마후 줄리에타는 이떤 백작과 결혼하여 이탈리아로 가서 살았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베토벤의 귀는 완전히 먹게 되었다. 그리고 줄리아타가 비엔나로 돌아왔다. 줄리에타가 베토벤을 찾아왔다. 베토벤이 나중에 적어 놓은 글을 보면 '그 여자는 울었다. 하지만 나는 그여자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She wept, but I scorned)라고 되어 있었다.

 

'월광 소나타'(Mondlicht Sonata)가 만들어진 에피소드를 그린 그림. 그러나 그건 그냥 흥미있으라고 지어난 얘기라고 한다. '월광 소나타'는 베토벤이 사랑했던 줄리에타에게 헌정한 곡이라고 한다.

 

베토벤에게는 줄리에타 말고도 또 다른 학생이 있었다. 테레사 폰 브룬스비크(Teresa von Brunswick) 백작부인이었다. 테레사는 줄리에타의 사촌이었다. 테레사는 줄리에타가 결혼한 이후, 베토벤이 사랑했던 여자 중의 하나였다. 베토벤은 테레사에게 피아노 소타나 한 곡을 헌정했다. 그만큼 테레사를 마음에 두었다.  F 샤프 장조로서 비교적 작은 규모의 곡이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 소나타를 가장 좋아했다. 아마 음악적인 가치 때문이 아니라 테레사와의 관계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어떤 날 밤에 베토벤이 테레사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는데 너무나 못하기 때문에 화가 치밀었다. 베토벤은 답답해서 밖으로 뛰쳐 나갔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베토벤은 모자도 쓰지 않고 코트도 입지 않고 빗속을 걸어갔다. 그 뒤를 테레사가 역시 비를 흠뻑 맞으면서 마치 시종처럼 쫓아가고 있었다. 테레사와 함께 와서 밖에서 기다리던 시종 한 사람이 급히 방안으로 들어가서 베토벤의 모자와 코트를 집어 들고 베토벤을 쫓아갔다.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테레사의 어머니도 마차에서 나와서 빗속을 달려 테레사를 겨우 붙잡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했다. 비가 쏟아지는데 그 모습들이 가관이었다. 사실상 테레사는 베토벤의 건강을 걱정을 많이 했다. 나중에 테레사는 일기에 '나의 주인님, 사랑하는 나의 선생님'이라고 썼다. 베토벤의 마음은 줄리에타가 결혼한 이후에 테레사로 향하였다.

 

베토벤과 비밀약혼까지 했다는 테레사 폰 브룬스비크 백작부인

                    

테레사와 베토벤은 1806년에 비밀약혼을 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36세였고 테레사는 몇 살인지 모르는 때였다. 두 사람이 약혼을 했다는 사실은 테레사의 남동생만이 알고 있었다고 한다. 테레사의 남동생은 베토벤을 아주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약혼을 비밀로 지키고 있었다. 그같은 사실이 빍혀진 것은 테레사가 나중에 자기 친구에게 그런 얘기를 했기 때문이며 그 친구는 테레서로부터 들은 그 이야기를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지 한참 후에 글로 써서 남겼기 때문이었다. 테레사와 베토벤의 관계는 몇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 시기는 베토벤이 교향곡 4번, 5번, 6번, 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4번과 5번, 작품번호 70의 트리오, 작품번호 74의 현악사중주곡 '하프'를 작곡한 때였다. 두 사람의 비밀약혼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은 베토벤과 같은 독립적이며 불같은 성격의 사람으로서 4년이 넘도록 그런 사실을 비밀에 붙이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할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 테레사와 약혼까지 했다는 것이 신빙성이 없다는 설명이 있다. 그 기간에 베토벤은 비엔나 시내에 있는 안네 마리 에르되디(Anne-Marie Erdödy) 백작부인의 시내 궁전에서 방 한 두개를 차지하고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에르되디 백작부인과 섬싱이 없을수 없었다. 베토벤은 에르되디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 베토벤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 헝가리에 있는 에르되디의 시골저택에 놀러가서 며칠 밤을 지내고 오기도 했다. 베토벤은 에르되디에게 작품번호 70의 피아노 트리오 곡들을 헌정했다. 그 중 하나는 '유령 트리오'(Ghost Trio)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트리오 곡에는 베토벤의 피아노 작품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악장이 들어 있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무슨 문제인지는 몰라도 어떤 하인이 애매모호한 행동을 한 것 때문에 두 사람이 다투더니 그것으로 관계가 끊어졌다. 그후로 몇년 동안 두 사람은 만나는 일이 있어도 얼굴을 돌리고 말도 하지 않았다.

 

안네 마리 에르되디 백작부인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베토벤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에르되디에게 작품번호 102의 첼로 소나타들을 헌정한 때로 부터였다. 그렇다고 전처럼 로맨틱한 감정은 아니었고 그저 친구로서 지냈다. 베토벤은 수입이 없어서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마침 베스트팔리아의 왕이 베토벤에 대한 소식을 듣고 와서 지내라고 제안했다. 그 소식을 들은 에르되디는 다른 친구들과 협력하여 베토벤을 위해 펜션을 마련해주고 피아노 레슨을 할수 있는 학생들을 주선해 주어서 결국 베토벤을 비엔나에 붙잡아 두었다. 몇 년후 에르되디 백작부인은 어떤 음모에 휩싸여서 비엔나에서 체포되어 추방을 당했다. 가족간의 문제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 때문에 에르되디 백작부인의 아들 중에서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다. 이같은 사실은 1820년도의 베토벤 대화록에 기록되어 있다. 테레사 폰 브룬스비크와 비밀약혼을 했다든지, 헝가리의 에르되디 백작부인과 섬싱이 있다든지 하는 모든 일들은 1809년을 전후해서 있었다는 일이다. 1809년이라고 하면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이 비엔나를 점령한 시기이다. 1809년이라고 하면 하이든이 세상을 떠났으며 베토벤이 하프 4중주곡을 완성한 해이다. 그리고 이때에 '엘리제를 위해서'(Für Elise)라는 작은 바가텔르(bagatelle)를 작곡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도대체 엘리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엘리제 뷔르거(Elise Bürger)라는 여인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있었다. 하지만 엘리제 뷔르거는 이 남자 저 남자와 스캔들이 많기도 했지만 최근에 이혼을 한 여자이다. 그러므로 '엘리제를 위해서'의 그 엘리제는 당연히 아닐 것이다.

 

이 즈음에 베토벤은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친구에서 편지를 보내서 결혼을 하고 싶으니 아내될 여인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내가 될 여인의 조건은 우선 아름답게 생겨야 할것, 그리고 함께 조화있게 살기 위해서는 한숨을 따로 쌓아 두는 여인이면 좋겠다고 했다. 말하자면 바가지 전문이면 곤란하다는 얘기였다. 한편,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이 친구라는 사람은 베토벤의 또 다른 피아노 학생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아마 베토벤도 그 여동생이라는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프라이부르크의 친구가 자기 제자의 여동생과 결혼했다고 하니까 상당히 정신이 나간듯이 보였다고 한다. 얼마후 베토벤은 이번에는 담당 의사인 독토르 말파티(Dr Malfatti)의 조카딸인 테레사 말파티(Teresa Malfatti)와 자주 만났다. 그리고 이 때쯤해서 베토벤은 본에 있는 친구 프란츠 베겔러에게 자기의 출생증면서를 한 통 떼어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아마 결혼을 생각하여 출생증명서를 필요로 하지 않았겠느냐는 짐작이다. 그런데 누구와 결혼한단 말인가? 테레사 폰 브룬스비크는 아니다. 에르되디 백작부인도 아니다. 주치의 말파티의 조카인 테레사도 아닌 것 같다. 여기에서 새로운 이름이 등장한다. 테레사 폰 브룬스비크의 여동생인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Josephine von Brunswick)이다. 요제피네는 어떤 나이 많은 사람과 어쩔수 없이 결혼했는데 결혼한지 1년후에 남편이란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은 1810년에, 40세 때에 테레사에세 프로포즈하였다. 그런데 어떤 테레사였던가? 아마도 말파티일 것 같지만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테레사의 가족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면서 반대했다. 베토벤은 40살이나 된 심술궂고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던가? 그리고 테레사는 방년 18세. 프로포즈는 거부되었다. 다음해에 독토르 말파티는 베토벤에게 보헤미아 테플리츠의 온천장에 가서 긴장을 풀고 마음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자문했다. 베토벤은 테플리츠로 갔다. 베토벤은 이곳에서 괴테를 만났다. 그리고 소프라노인 아말리 제발트(Amalie Sebald)도 만났고 여베우인 라헬 레빈(Rahel Levin)도 만났다. 베토벤은 다음해 여름에도 다시 테플리츠를 찾아갔다. 베토벤은 테플리츠에서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편지들을 썼다. 연도는 쓰지 않고 날짜만 적었다. 7월 6일과 7일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편지는 붙이지 않았다. 베토벤이 테플리츠에서 쓴 편지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책상 설합에서 발견되었다. 나중에 베토벤 연구자들은 이 편지들이 그의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려던 것이라고 추측했다. 자, 그렇다면 그 '불멸의 연인'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베토벤의 생애에서 가장 신비스런 사항 중의 하나이다.

 

이 그림은 칼 롤링(Carl Rohling)이라는 화가가 1887년에 그린 '테플리츠 사건'(The Incident in Teplitz)라는 것이다. 어느날 베토벤이 괴테와 함께 테플리츠의 거리를 산책하고 있는데 어떤 왕족을 만난다. 괴테는 모자를 벗어들고 공손히 인사를 했지만 베토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나중에 괴테가 베토벤에게 '아니, 여보게, 왕족인데 경의를 표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나무라듯 말하자 '칫, 왕족인지 무언지가 나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지 왜 내가 먼저 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베토벤의 성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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