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소프라노

우크라이나의 스타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

정준극 2012. 4. 16. 11:16

우크라이나의 스타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Solomiya Krushelnytska)

 

'나비부인'의 브레스키아 초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박수갈채를 받은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는 1872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테르노필(Ternopil)의 서남쪽에 있는 빌리아빈치(Viliavyntsi)라는 마을에서 태어나서 1952년에 세상을 떠난 20세기 초반의 위대한 소프라노이다. 오늘날 그가 태어난 테르노필 인근은 우크리아니의 부차크 라이온(Buchach Raion) 지역이다. 솔로미야의 아버지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사제였다. 솔로미야는 어릴 때에 식구들을 따라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녔으며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테르노필의 북쪽에 있는 빌라(Bila)라는 마을이었다. 솔로미야는 어릴때에 여러 지역으로 이사다니며 살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여러 민속음악을 접하면서 성장했다. 그것이 나중에 솔로미야의 음악적 경력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1년 솔로미야는 리비브(Lviv)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3년 후인 1893년에 최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솔로미야는 음악원을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르비브 오페라단이 제작한 도니체티의 '라 화보리타'에서 레오노라를 맡아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아이다를 맡은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

 

그로부터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라는 이름은 유럽과 미국의 오페라 극장에서 성공을 약속해 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04년에는 브레스키아에서의 '나비부인' 공연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몇달전에 밀라노에서의 공연으로 궁지에 빠진 푸치니는 빛나게 구원해 주었다. 이로써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의 이름은 음악사에 영원히 남게 되었다. 솔로미야는 브레스키아에서의 성공 이후 본격적인 오페라 소프라노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밀라노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매일 6시간 이상씩 발성 연습, 연기 레슨, 새로운 역할 배우기, 언어 배우기 등을 하면서 고된 시간을 보냈다. 소몰리야는 만일 시간이 나면 주로 박물관이나 유적지를 찾아가서 역사를 공부했다. 이것도 나중에 그가 오페라를 소화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이었다. 또한 오페라 공연도 자주 관람하였다. 살아 있는 공부시간이었다. 그는 비록 이탈리아에 와서 있지만 고향인 우크라이나를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고향의 친구들과 계속 연락을 하며 우크라이나의 장래에 대하여, 우크라이나의 문화와 예술에 대하여 걱정을 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르비브에 있는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 기념오페라발레극장

                             

솔로미야는 이탈리아에서 순회공연에 자주 참가하였다. 1주일에 다섯 편의 각각 다른 오페라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스코어에 대한 초견력과 대사의 암기에 있어서 놀랄만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솔로미야에 있어서 한 편의 오페라를 정복하는 데에는 이틀이면 충분했다. 그러면서도 서너 개의 다른 역할을 동시에 공부했다.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의 오페라 레퍼토리는 63편에 이르렀다. 솔로미야는 고전 작품 뿐만 아니라 현대 작품에 대하여고 관심이 깊었다. 그래서 현대적 감각의 오페라를 진흥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는 한편으로 바그너의 오페라에 깊이 심취하였다. 1902년에는 로엔그린으로서 파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1906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로서 밀라노의 오페라 애호가들을 매료했다. 살로메의 공연은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것이었다. 이후 솔로미야는 유럽의 전역, 이집트, 알제리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테르노필에 있는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 기념상

                                                 

1910년에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는 이탈리아의 변호사인 세자레 리코니(Cesare Ricchoni)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1920년에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는 돌연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한참 정상이던 시기였다. 박수를 받을 때 물러나라는 얘기는 바로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솔로미야는 오페라에서 은퇴한후 3년 동안 쉬다가 그 다음부터는 콘서트 투어를 시작했다. 솔로미야는 8개국어를 말할수 있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콘서트를 가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1939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솔로미야는 르비브로 돌아와서 195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솔로미야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르비브 음악원의 교수로서 활동했다. 솔로미야가 세상을 떠난지 몇 주 후에 소련군이 나치와 소련간의 협약에 따라 르비브로 진주해 왔다. 소련 당국은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를 르비브를 빛낸 인물로 선정하여 기념상을 세우는 등 여러 사업을 벌였다. 르비브오페라발레극장은 솔로미야의 이름을 따서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 르비브국립오페라발레아카데미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 극장에는 솔로미야가 입었던 오페라 의상들, 악보 및 소품들이 영구 전시되어 있다.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가 태어난 집은 1963년에 기념관이 되었다. 1966년에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를 기념하는 다큐멘타리 영화를 제작하였다. 1983년에는 키에프에 있는 도브첸코영화슈트디오가 The Return of the Butterfly 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했다. 1991년부터는 르비브에서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를 기념하는 국제오페라성악가경연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1997년에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를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발행한 솔로미야 크루셸니츠카 기념우표

 

그의 생가에 전시되어 있는 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