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더 알기

오페라의 주인공이 된 베네데토 마르첼로

정준극 2012. 5. 14. 12:50

오페라의 주인공이 된 베네데토 마르첼로(Benedetto Marcello)

 

베네데토 마르첼로

 

베네데토 마르첼로(Benedetto Marcello: 1686-1739)는 17세기말부터 18세기 초반에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베니스 출신의 작곡가, 작가, 흥행가, 지방법원 판사, 교사였다. 그렇다고 해서 작곡가로서 위대한 작품을 남긴 것도 아니며 작가로서 뛰어난 작품을 남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독일-스위스의 작곡가인 요아힘 라프(Joachim Raff: 1822-1882)가 '베네데토 마르첼로'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베네데토 마르첼로와 부인 스칼피(Rosanna Scalfi: 1704-1742)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 오페라이다. 물론 대단히 훌륭한 오페라는 아니다. 만일 훌륭한 오페라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세계 곳곳에서 줄곧 공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곡가를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라는데서 관심을 끌고 있다. 작곡가를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들은 더러 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자코모 오레피체(Giacomo Orefice: 1901)의 '쇼팽', 한스 휘츠너의 '팔레스트리나', 살바토레 쉬아리노의 '루치 미에 트라디트리치'(중세 작곡가인 카를로 게수알도의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 하인리히 베르테의 '세 아가씨의 집'(슈베르트의 노래와 사랑이야기를 다룬 작품) 등이 그것들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의 (오페라 세계의 기록)>편을 참고 바란다. 그건 그렇고, 오페라 '베네데토 마르첼로'의 스토리에 대하여는 추후에 소개키로 하고 이번에는 베네데토 마르첼로가 어떤 사람인지, 그의 부인 로산나 스칼피가 어떤 사람인지만을 우선 소개코자 한다.

 

베네데토 마르첼로는 베니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안토리오 로티,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원래 그의 아버지는 베네데토가 변호사와 같은 법조인이 되기를 원했었다. 그래서 베네데토는 법률과 음악의 두가지에 모두 정진키로 결심했다. 베네데토의 형인 알레산드로도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베네데토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법률을 전공하여 1711년에는 베니스 정부의 40인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귀족가문의 출신이므로 정치적인 진출이 빨랐다. 1730년에는 베니스 공국에 속한 폴라(Pola)의 도지사(Provveditore)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아 건강이 문제가 되어 이스트리아 지방에서 8년을 지낸 끝에 브레스키아로 은퇴하였다. 그리고 결국 1739년에 결핵으로 브레스키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네데토 마르첼로는 1728년, 42세의 중년일 때에 24세 연하로서 젊은 성악가인 로산나 스칼피를 사랑하여 비밀 결혼을 하였다. 실은 제자였다. 그러나 귀족으로서 평민인 스칼피와의 결혼은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 베네데토가 53세라는 중년의 나이로 결핵때문에 세상을 떠나자 11년에 걸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무효로 선언되었다. 로산나는 재산을 한푼도 상속받지 못했다. 로산나는 베네데토의 형인 알레산드로를 상대로 재정지원에 대한 소송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작곡가로서 베네데토는 여러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다. 교회음악, 오라토리오, 수백곡에 이르는 솔로 칸타타, 듀엣, 소나타, 협주곡, 신포니아 등을 작곡했다. 베네데토는 비발디보다 젊었지만 같은 시대에 활약했다. 비발디는 베네데토의 작품들에 대하여 상당한 찬사를 보냈다. 베네데토의 대표작은 아마 구약성서 시편의 첫 50편까지의 말씀을 바탕으로 작곡한 Estro poetico-armonico(1724-27)일 것이다. 영국의 존 가스(John Garth)는 이 작품에 크게 감동하여 1757년에 영어로 번역하여 런던에서 출판했다. 브뤼셀음악원은 베네데토의 스코어 중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소장하고 있다. 베네데토가 그의 애인을 위해 작곡한 실내 칸타타 스코어들이다. 그의 애인(또는 정부)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베네데토는 오페라 한편을 작곡했다. La Fede riconosciuta라는 것이다. 1702년 베니스에서 초연되었다. 미안하지만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여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베네데토 마르첼로의 음악은 풍부한 상상력과 대위법 등을 구사한 뛰어난 테크닉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베니스의 '베네데토 마르첼로 음악원'(Conservario di Musica Benedetto Marcello di Venezia)는 베네데토 마르첼로를 기념하여 붙인 명칭이다.

 

베네데토 마르첼로와 결혼한 로산나 스칼피는 소프라노이지만 작곡가로서도 재능을 보여준 여인이었다. 1704년(또는 1705년) 베니스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곤돌라에서 노래부르는 일을 했다. 그라다가 성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하던중 우연히 작곡가이며 지방법원판사인 베네데토 마르첼로를 만나 얼마후에는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결혼까지 하였다. 두 사람의 비밀 결혼식은 베니스의 작은 성당에서 친구 몇명만 참석한 가운데 종교의식으로 치루어졌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평민과 귀족의 결혼은 인정을 받지 못하여 두 사람의 결혼은 법적인 효력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1739년 베네데토 마르첼로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베니스 정부는 두 사람의 결혼을 아예 무효라고 선언했다. 로산나는 베네데토 마르첼로와 11년이나 부부로서 함께 살았지만 아무런 재산도 상속받지 못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아득했던 로산나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지 3년 후인 1742년에 남편의 형인 알레산드로 마르첼로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재정지원을 모색했지만 법원은 로산나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성악가로서 로산나는 소송을 냈던 1742년에 칼 파가넬리(Carl Paganelli)의 오페라 '아르타세르세'에서 아르바체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 오페라는 베니스의 산타 살바토레극장에서 그리스도의 승천축제 기간 중에 공연되었다. 로산나는 알토와 바소 콘티누오를 위한 12곡의 칸타타를 작곡했다. 대본도 거의 모두 직접 작성하였다. 그만큼 음악적 재능이 있는 여인이었다. 요아힘 라프의 1878년도 오페라인 '베네데토 마르첼로'에서 로산나는 메조소프라노가 맡는 것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