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누구인가?

정준극 2012. 6. 6. 08:09

마리아 테레지아는 누구인가?

오스트리아의 어머니/유럽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또 누구인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비엔나를 방문한 사람은 누구든지 한번쯤은 시내 한복판에 장엄하게 자리잡고 있는 국립미술관(비엔나에서는 미술사박물관이라고 부른다)과 자연사박물관을 구경이라도 하려고 기웃거리게 된다. 쌍둥이 처럼 생긴 두 건물인 미술관과 자연사박물관 사이에 아름답게 조성된 광장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엔 광장(Maria Theresien Platz)이다. 그 광장의 한 복판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기념상이 높이 자리 잡고 있다. 기념상의 아랫쪽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절에 제국에 기여했던 장군들, 학자들, 관리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그 중에는 어린 모차르트의 모습도 보인다. 비엔나 시내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러 군주들의 기념상이 있다. 프란시스 1세, 요셉 2세, 프란츠 요셉 1세 등등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이 광장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기념상이 가장 화려하고 장대하다. 기념상이 있는 장소도 위치적으로 가장 의미있는 곳에 있다. 앞에는 영웅광장(헬덴플라츠)와 호프부르크가 장대하게 펼쳐 있으며 우측에는 미술사박물관, 좌측에는 자연사박물과, 뒤쪽에도 역시 박물관구역이 마치 마리아 테레지아를 옹위하듯 둘러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제국의 영화가 응집된 장소이다. 세계 역사에서 위대한 여군주로서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제정러시아의 카테리나 여왕 등이 있지만 아무래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가장 위대한 군주라고 할수 있다.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는 우선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영향권 아래에 두었던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유럽에서 대제국을 건설한 경우로는 로마제국도 있지만 여자가 통치한 일은 없다. 오직 마리아 테레지아 만이 여군주로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대제국을 통치하였다. 그것이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면 과연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떤 여인이었는가?  미인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같은 여인이었다.

 

비엔나의 국립미술관(미숡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의 사이에 있는 광장의 이름은 마리아 테레지엔 플라츠이다. 이곳에 위 사진에서 보듯이 유명한 기념상이 있다. 아래쪽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봉사한 위대한 장군들이며 사방의 벽면에 조각되어 있는 인물들은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뛰어난 기여를 했던 사람들의 모습이다. 모차르트도 포함되어 있다.

 

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마리아 테레지아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스트리아의 여제(女).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카를) 6세의 딸. 신성로마제국 황제을 이어받은 프란츠1세의 부인. 16 자녀를 낳은 어머니.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결혼한 마리 앙뚜아네트의 어머니.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인 7년전쟁의 주역. 수도원의 영지를 몰수하고 교육제도를 개혁하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보인 군주. 신앙심이 깊고 도덕성을 강조한 여인. 두 아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요셉 2세, 레오폴드 2세)가 된 어머니. 이질적인 나라들이 모여 있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통일성을 부여한 여걸. 결론적으로 유럽의 대부분을 약 7백년동안 통치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가장 인간적인 인물. 그리고 어린 모차르트의 후원자였다. 이렇게 설명하면 무어가 무언지 갈피를 잡을수 없을 것이므로 우선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이력서를 소개하고 이어 서양사공부를 하는 셈치고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코자 한다. 그보다도 우선 사람들은 그를 여제(Empress)라고 부르는데 그러면 실제로 황제였다는 말인지 궁금할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아니었다. 다만, 황제에 못지 않는 실권을 가지고 통치를 하였다. 남편 프란츠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지만 그건 명목상이며 실제로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든 정치를 수행하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큰 아들인 요셉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역시 마찬가지로 비록 아들이 황제가 되었지만 실권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지고 통치하였다. 말년에 가서는 아들에게 많은 부분을 이양하였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역할은 황제 이상이었다. 그러므로 여제라고 해도 아무런 하자가 없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17년 3월 13일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1717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는 장희빈으로 유명한 숙종 시대였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세살 때에 숙종이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는 샤를르(카를) 6세였고 어머니는 독일 출신의 크리스티네 공주였다. 샤를르 6세와 크리스티네 왕비는 4 자녀를 두었다. 첫째인 아들은 7개월인가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둘째가 딸로서 마리아 테레지아이며 셋째도 딸로서 좋은 집으로 시집을 갔으나 첫 아이를 낳다가 그만 스믈 몇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넷째도 딸이지만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대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샤를르 6세에게는 후사가 딸 마리아 테레지아 밖에 없었다. 그에 관한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다시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력서로 돌아가 보면 그는 아버지인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난 1740년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으로 즉위하였으며 1745년부터는 자신이 '로마 여제'(Roman Empress)라고 호칭하였다. 로마 여제라는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여제라는 것을 의미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36년 2월 12일에 비엔나의 아우구스틴교회에서 로레인의 프란츠 스테픈 공작(Duke Franz Stephen of Lorraine)과 결혼식을 올렸다. 이어 1740년에 부왕인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실질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로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왕관을 쓰려니 반대가 많았다. 그리하여 1745년부터 남편 프란츠 스테픈을 프란츠 1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도록 했다. 당시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형식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섭정으로서 프란츠 1세를 대신하여 모든 정치를 수행하였다. 그후 남편 프란츠 1세가 세상을 떠나고  1764년에 큰 아들인 요셉이 요셉 2세로서 로마왕(신성로마제국 황제이지만 교황르로부터 대관식을 받지 않은 경우)이 되자 이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여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떤 일들을 했나? 합스부르크 제국의 현대화를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행정을 개혁했고 군대를 재편하였다. 그는 비너 노이슈타트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였고 퇴역장병들을 위해서는 연금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농부들의 생활을 보다 편하게 해주었다. 예를 들면 부역을 가볍게 해 주는 것 등이었다. 또한 국민교육을 위해서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처음으로 시작하였고 고문제도도 없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특히 교회의 권한이 너무 비대해 진것을 경계하여 교회의 영향을 축소하였다. 그리고 1773년에는 비엔나에서 예수회의 활동을 폐지하였다. 또한 사회의 도덕함양을 위해 여러 제도를 추진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 자녀 생산이지만 당시에는, 특히 왕실에서는 왕실의 번영을 위해 다산정책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말이 16명이지 그러면 결혼후 계속 잉태와 출산을 반복한 셈이니 딱하기도 하다. 16명 자녀 중에서 다섯 명만 아들이고 나머지 11명은 딸이었다. 그중에서 3명은 아주 어릴 때에 숨을 거두었고 3명은 10대 때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아들 중에서 두명은 황제가 되었다. 두 딸과 막내 아들은 결혼하지 않고 지냈다. 어린 시절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활달했고 감정이 풍부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릴 때부터 충분한 교육을 받았다. 하기야 대제국의 황제의 딸로서 아쉬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 테레지아는 음악, 미술, 연극, 문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라틴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어를 능숙하게 말하였으며 독일어는 비엔나 악센트를 섞어서 말하여 누구든지 듣고는 '아하, M.T.(마리에 테레지아의 약자)구나!'라고 알아 모셨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어서 그 많은 자녀들에게 모두 음악을 가르쳤고 결과 자녀들은 음악적인 소양이 풍부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서 큰 아들인 요셉 2세도 피아노 치고 작곡도 했다고 한다. 모차르트에게 '후궁에서의 도주'를 독일어 대본으로 작곡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요셉 2세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도박도 즐겼다. 하기야 땀 흘려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지만 도박도 땀 흘려서 하면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자녀들과 함께. 오른쪽 끝이 요셉 2세. 왼쪽으로부터 두번째가 레오폴드 2세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앙심이 깊었다. 그의 신앙은 오스트리아 바로크 가톨릭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말이 무어냐 하면 예수회, 또는 프란치스코회와 같은 수도회의 신앙과는 다르다는 의미이다. 그는 교회에 많은 기부를 했고 고아원을 짓는 등 자선사업에도 앞장 섰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인 관용에 대하여는 별고 관심이 많지 않았다. 예컨대 '원수를 사랑하라'라든지 '너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가르침에는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음란하고 저속한 것을 배격하였다. 생활에서도 그랬지만 오페라와 같은 공연에서도 음란하고 외설적인 내용을 제재했다. 이를 위해 Commission against Immoral Conduct(비도덕정 행위 제재 위원회)를 운영하였다.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비엔나에 만연했던 매춘을 금지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카니발과 같은 충동적인 행사를 중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제국의 영광을 보여주는 군사퍼레이드와 같은 것은 무척 좋아했다.

 

비엔나의 그라벤에서의 군사퍼레이드.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마를 타고 지나가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시스 스테픈(프란츠 1세)에게 헌신적이었다. 프란츠 1세는 현재 프랑스 동부 낭시(Namcy) 출신이다. 로레인은 독일과의 접경 지역에 있던 공국이었다. 그곳에서 비엔나에 와서 지내자니 말도 다르고 물도 달라서 적잖이 심심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프란츠 1세는 돈 후안의 제자처럼 행동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런 남편을 인내로서 내조하였다. 프란츠 1세가 1765년 8월 18일 세상을 떠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후로부터 줄곧 검은 상복을 입고 검약한 생활을 하며 지냈다. 프란츠 1세는 카푸친교회의 지하에 있는 제국영묘(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남편의 묘지를 자주 찾아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죽는 날까지 책임감과 신뢰성과 근면으로 지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소녀시절부터 잘 먹어서인지 또는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약간 비대한 편이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걷는데에도 불편할 정도로 비대하였다. 쇤브룬 궁전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남편의 관이 있는 카이저그루프트에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들에게 정성이었다. 당시는 유아 사망율이 높았으므로 아이들이 병에 걸리지 않고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가지는 자녀들에게 천연두 접종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처음 시도되는 치료법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같은 새로운 의료방법을 국민들에게 확산하기 위해 자기의 자녀들에게 접종하여 시범을 보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들이 좋은 혼처를 만나 시집을 잘 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았다. 그래서 여러모로 신부수업을 시키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마리 크리스틴,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안 안토니아(마리 앙뚜아네트)등은 모두 다른 나라의 왕실로 시집을 갔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유럽의 왕가들과 결혼정책을 통하여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였다. 모두 제국을 위한 조치였다. 그래서 혹자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유럽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80년 11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오스트리아의 백성들은 별로 애도할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그런가보다라고 했다. 무려 40년이라는 세월동안 군주의 자리에 있었던 여인이었으므로 세상을 떠났다고 해도 별다른 감동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와 합스부르크를 대표하는 강력한 힘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국민들의 마음에 훌륭한 어머니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마리아 테레지아도 생전에도 자기의 위상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신경을 썼다. 예를 들면 관공서는 물론이고 궁전이나 수도원에도 초상화를 걸도록 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가 통치하는 지역에 자기의 동상을 세우도록 했다. 비엔나만 해도 마리아 테레지엔 플라츠를 비롯하여 벨베데레 궁전, 비엔나대학교 대강당, 비너 노이슈타트 사관학교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기념상이 있으며 나아가 클라겐푸르트 등 지방도시에도 기념상을 세웠다. 제국영묘인 카이저그루프트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합장 관에도 두 사람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카이저그루프트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합장 관. 상단에는 두 사람이 마치 아침에 깨어나서 인사를 나누는 듯한 모습의 조각이 있다.

 

사족이지만, 어떤 때는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라고 하고 또 어떤 때는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라고 하는가? 그건 간단하다. 영어 표현이 테레사이고 독일어 표현이 테레지아이다. 그럼 테레지엔(Theresien)은 무엇인가? 테레지아의 형용사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은 독일어로 Maria Theresien Platz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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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Wolfenbüttel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황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Elisabeth Christine: 1691-1750)는 제국의 황비로서 손색이 없는 여인이었다. 엘리자베트는 묘한 매력이 있는 여인이었다. 미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잘 생긴 얼굴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지성적이고 영리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사격의 명수이고 음악을 좋아했으며 정치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엘리자베트는 신성로마제국 샤를르 6세 황제의 황비로서 역사에 기억되지만 그보다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어머니로서 높이 기억되고 있다. 또 한가지 기억되는 것은 그가 마리 앙뚜아네트의 외할머니라는 것이다. 물론 엘리자베트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채어나기 5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서로 만난 일은 없지만 그래도 엄연히 프랑스 왕비의 외할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59세라는 비교적 길지 않은 생을 살으면서 아들을 낳지 못해서 고통을 겪은 것은 여인이기에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독일 브룬스비크 공국의공주로 태어났다. 공식 타이틀은 브루스비크 볼펜뷔텔(Brunswick-Wolfenbüttel)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공주이다. 아버지는 브룬스비크 뤼네부르크(Brunswick-Lüneburg)의 공작인 루이 루돌프였고 어머니는 외팅겐의 크리스틴 루이제 공주였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브룬스비크 공국의 왕이었다. 그러므로 엘리자베트는 유럽의 정통 왕가 출신이다. 엘리자베트는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6세 황제와 결혼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비, 독일 국가의 왕비, 보헤미아 및 헝가리의 왕비, 오스트리아 대공비 등의 호칭을 갖게 되었다. 엘리자베트 황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비로서는 가장 오래 유지해온 인물이다. 엘리자베트는 13세 때에 앞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될 샤를르와 정혼하였다. 엘리자베트의 할아버지가 뜻한바 있어서 그렇게 주선해 놓았다. 여기에 샤를르의 천제가 되는 빌헬미나 아말리아 황비의 역할도 컸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개신교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로마 가톨릭의 샤를르와 결혼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결국 로마 가톨릭을 개종하였다. 그후로 엘리자베트는 시어머니가 될 샤를르의 어머니로부터 로마 가톨릭에 대한 교리 등을 배웠다. 장래 시어머니는 엘리자베트에게 특별히 마리아 숭배사상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1706년에 마리아첼 순례교회에 함께 순례를 가기도 했다. 엘리자베트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마리아첼 순례교회를 다녀온 후였다. 엘리자베트는 결혼 전에 황실 주치의로부터 세밀한 건강검진을 받았다. 그리고 샤를르의 고해신부에게도 그동안의 생활에 대하여 자세하게 얘기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렇게 하는 것은 엘리자베트가 황실을 위해 후손을 생산해야 하는 임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샤를르는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는 즈음에 스페인 왕위계승권 문제로 프랑스 태생의 필립 5세와 투쟁을 하고 있었다. 필립 5세는 자기가 스페인 왕위의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이미 대관식을 가진 후였다. 샤를르는 스페인의 남부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필립 5세와 계속 왕위 계승권에 대하여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엘리자베트는 결혼식을 위해 브룬스비크로부터 바르셀로나로 왔다. 결혼식은 1708년 8월 1일 바르셀로나의 산타 마리아 델 마르(Santa Maria del Mar)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샤를르의 라이발인 필립 5세는 이미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샤를르는 자기도 어서 아들이 있기를 바랬다. 엘리자베트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을수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결혼하고나서 해를 넘겼는데도 아들을 낳지 못해서 상대적으로 합스부르크 황실 내에서 발언권이 약해졌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트의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에서 어떤 지위를 얻고자 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엘리자베트로서 아버지를 위해 무어라고 주장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엘리자베트와 샤를르가 결혼식을 올린 바르셀로나의 산타 마리아 델 마르(카데드랄 마르)

 

샤를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어서 1711년 비엔나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샤를르는 카탈로니아에서의 통치권도 중요하기 때문에 비엔나로 떠나면서 아무래도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엘리자베트가 바르셀로나에 남아 있도록 했다. 이를 위해 샤를르는 엘리자베트를 카탈로니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엘리자베트는 2년 동안 카탈로니아의 총독 겸 샤를르 왕의 섭정으로서 카탈로니아를 통치했다. 명목상의 총독이 아니라 실제로 통치를 했다. 우선은 카탈로니아에 남아 있는 궁신들이나 귀족들이 샤를르에 대한 충성심을 잃지 않도록 다둑거리는 일에 치중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행정업무도 책임을 맡았다. 엘리자베트는 현명하게 맡은바 임무를 수행하여 '샤를르보다 낫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엘리자베트는 1713년에 비엔나에 있는 남편 샤를르와 합류하기 위해 드디어 비엔나에 입성하였다. 엘리자베트는 비엔나 궁정에서 대단히 지성적이고 겸손하게 처신하였으며 상하의 차별을 두지 않고 친절하였고 또한 근면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 엘리자베트는 또한 스페인 궁정 프로토콜을 비엔나 궁정에도 도입하여 황실의 질서를 잡는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엘리자베트는 사냥도 즐기고 무도회도 자주 개최하였으며 아마추어 연극 활동도 했다. 또한 매일처럼 로마 가톨릭의 미사에도 열심을 보였다. 하지만 원래 개신교였기 때문에 개신교 비밀추종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왜냐하면 엘리자베트는 요한 크리스토프 바르텐슈타인과 같은 얀센주의자를 후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샤를르 6세는 엘리자베트가 비엔나에 온 후로는 일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조심을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정치가 무엇인지, 권력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자기의 처지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은밀히 각료들과 연결하여 자기의 세력을 만들어 놓았다. 엘리자베트는 특히 슈타렘버그와 가깝게 지내면서 자기 자신이 주도하는 몇가지 정책에 관여하였다. 예를 들어 1720년대에 엘리자베트는 러시아 짜르와의 협정을 북부 독일에 있는 가족들을 이용해서 무난히 마무리 지은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자기의 딸들이 스페인의 왕실과 혼인을 맺는 것을 반대하는 신하들을 포섭하여 난관이 없도록 했다.

 

이렇듯 여러 면에서 뛰어난 엘리자베트였지만 아무리 지체 높은 황비라고 해도 어쩌지 못하는 일이 하나 있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엘리자베트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압력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남편인 샤를르가 은근히 자기를 멀리하는 것도 괴로움이었다. 결혼한지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궁정 의사들은 엘리자베트 황비의 임신 가능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특별 물약을 만들어서 황비에게 복용토록 했다. 이 특별 물약을 상당기간 마신 황비는 임신은 커녕 얼마후에 얼굴색이 붉게 변하더니 평생 그렇게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1725년에 임신되었다는 징조가 있었다. 샤를르는 제발 아들이 태어나라는 의미에서 황비의 침실을 미남에 에로틱하게 생긴 남자들의 그림으로 가득 채워 놓았다. 황비에게 그런 남자들을 상상토록 하면 혹시 아들이 태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황비에게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건이 있은 후 궁정의사들은 또 다시 임신을 촉진한다는 특별 식단을 만들어서 황비에게 적용토록 했다. 황비는 매일 지나치게 기름진 음식들을 먹어야 했다. 결과, 황비의 몸은 말할수 없이 비대해 졌다. 너무 비대해 져서 걸어 다니기도 힘들었고 호흡장애를 경험해야 했다. 그로 인하여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고 몸에 물집들이 생겼다. 심지어는 너무 비대해 져서 평소의 의자에 앉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의자에 앉으려면 특별 제작된 기계로 기중기처럼 앉혀야 했다.

 

이렇듯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여러가지 약을 복용하다보니 몸에 이상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르는 '제발 아들 하나만!'이라는 일념을 버리지 않았고 이에 따라 전에 엘리자베트를 외면했던 것을 뉘우치고 좀 더 다정하게 대해주기 시작했다. 일례로 샤를르는 엘리자베트를 '봐이세 리즈'(피부가 희기 때문에 붙인 애칭)이라고 부르면서 애정을 표시했고 엘리자베트의 건강에 대하여 매일처럼 걱정해 주었다. 그리고 나중에 만일을 위해서 유언장에 엘리자베트를 위한 별도의 수입을 마련해 주도록 하는 조치도 취해 놓았다. 그런데 샤를르는 결혼전부터 정부가 있었다. 당시에 왕이나 영주라고 하면 공공연히 애인이 있었고 샤를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샤를르는 바르셀로나에서 비엔나로 와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가진 이후에는 새로운 정부를 가졌다. 알트한(Althann) 백작부인이었다. 알트한 백작부인은 자기가 샤를르의 정부라는 것을 비밀로 하기 위해 엘리자베트가 비엔나에 오기 직전에 비엔나 궁전의 어떤 장관과 결혼식을 올려 자기가 엄연히 남의 부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제스추어를 쓰기까지 했다. 비엔나에 온 엘리자베트는 샤를르의 어머니, 즉 시어머니 엘레오노레와 사이가 좋게 지냈다. 뿐만 아니라 시누이가 되는 빌헬미네 아말리아와도 친자매처럼 지냈다. 이 세 여인들은 서로 도우면서 어려운 황실 생활을 슬기롭게 헤쳐나갔다. 빌헬미네 아말리아는 엘리자베트가 천연두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자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며 간호하였고 마찬가지로 엘리자베트는 시어머니 엘레오노레가 노년에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곁을 지키며 헌신적으로 간호하였다.

 

1740년에 샤를르가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트는 미망인이 되었다. 샤를르는 이미 오래전에 유언장에 자기가 죽고 난 후에 엘리자베트의 생활을 위해 상당히 풍족한 액수의 연금을 받도록 해 놓았지만 당시 국가 재정상태가 좋지 않아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제가 되고 나서 어머니인 엘리자베트가 궁정에서 편안하게 지낼수 있도록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엘리자베트와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는 좋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걸 뒷받침할 만한 기록은 없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백성들에게 아주 관대하고 친절하였다. 백성들로부터 어려운 사정을 듣고는 많이 도와주었다. 그러나 어머니 엘리자베트에게는 형식적이었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몸이 불편한 어머니 엘리자베트를 정기적으로 찾아가서 위로의 얘기를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머니 엘리자베트가 어려서부터 가르쳐 준 대로 스페인 궁정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위로를 한다든지 하는 일은 여제로서 있을수 없다고 하여 시중을 드는 귀족 부인을 통해서 안부를 묻고 돌아섰다는 것이다. 엘리자베트는 남편 샤를르가 세상을 떠난지 10년 후에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황비는 1750년 향년 59세로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큰 딸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머니 엘리자베트를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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