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16 자녀를 생산한 어머니

정준극 2012. 6. 9. 08:07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족

16명의 자녀를 생산한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그림에는 11명만 등장하지만 실은 모두 16명의 자녀를 생산하였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여러 자녀가 생후 얼마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맨 왼쪽의 사람은 이들의 아버지인 프란시스 스테픈(프란시스 1세 황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왕자는 대공(Archducke)라는 호칭을 주고 공주는 대공비(Archduchess)라는 호칭을 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20여년의 세월동안 16명의 대공과 대공비를 출산하였다. 그중에서 13명이 유아시절을 잘 견디고 생존하였다. 아무튼 다산여왕이다. 거의 매년 임신하고 출산하는 일정을 반복하였다. 첫째인 마리아 엘리자베트(1737-1740)이었다. 겨우 3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첫 아이가 딸이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크게 실망했다. 그런데 둘째도 딸이었다. 둘째인 마리아 안나(1738-1789)는 51세까지 살았으므로 대단히 장수한 셈이었다. 셋째도 딸이었다. 태어난지 1년이 조금 넘자 그만 세상을 떠났다. 머리아 카롤리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을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또 다시 임신하자 거의 매일처럼 제발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과연, 아들이 태어났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아버지인 성요셉의 이름을 따서 요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총애하는 자녀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25회 생일날 태어났다. 엄마와 아기의 생일이 같은 것은 특별한 기쁨이다. 그래서 가장 애지중지했던 모양이다. 자녀들중 5명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중에 태어났다. 큰 딸인 마리아 엘리자베트를 비롯하여 마리아 크리스티나, 샤를르,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드, 마리아 카롤리나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로서는 진실로 쉴날이 없었다. 출산이 끝나면 곧이어 임신을 하는 형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한편으로 전쟁을 치루어야 하고 한편으로 무거운 몸으로 출산을 해야 했다. 다섯명의 자녀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과 7년 전쟁 사이의 평화시대에 태어났다. 마리아 테레지아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리아 요한나,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그리고 저 유명한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뚜아네트)이다. 마지막 아이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39세 때에 태어났으며 7년 전쟁 기간 중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주위 사람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다. "짐이 임신중이 아니라면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갔을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왕비는 1750년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33세 때였다. 그로부터 4년 후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정교사 겸 보모 겸 친구인 마리 카롤리네 폰 푹스 몰라르트 백작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푹스 백작부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를 합스부르크 왕족이 아니면 들어갈수 없는 카이저그루프트(제국영묘)에 안치되도록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들이 성장하자 곧이어 결혼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큰 아이들부터 어서어서 결혼해서 내보내던지 또는 며느리를 들이는 일을 착수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한편으로는 전쟁을 치루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임신하고 출산하면서도 큰 아이들의 혼사를 위해 사절들을 이리저리로 보내며 서둘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고 돌보았지만 어떤 때는 나라를 위해 아이들의 행복을 희생시켜가면서 결혼정책을 추진하였다. 말하자면 아이들을 왕조의 게임에서 체스의 졸(卒)처럼 사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느냐하면 그 바쁜 와중에서도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모두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그리고 자녀들이 나이가 얼마이며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상관하지 않고 자녀들의 보호자 겸 감독자의 역할을 엄정하게 행세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67년 5월, 50세 생일을 지낸지 며칠 후에 천연두에 걸렸다. 아주 병세가 심각했었다. 며느리인 바바리아의 마리아 요제파로부터 옮긴 병이었다. 며느리는 큰 아들 요셉2세에게 시집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시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살아났지만 며느리인 마리아 요제파는 병마와의 싸움에서 져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며느리의 나이는 28세였다. 자녀는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에도 마리아 요제파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며느리인 마리아 요제파가 세상을 떠나자 우정 딸 마리아 요제파를 데리고 카이저그루프트(제국영묘)의 며느리 관을 찾아가 함께 기도를 드렸다. 며느리의 관은 아직 뚜껑을 덮지 않은 상태였다. 그게 잘못이었다. 딸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에 전염되었다. 결국 며칠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때 딸 마리아 요제파는 18세의 꽃다운 나이로서 나폴리 공국의 페르디난트 4세와 결혼키로 되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나머지 평생동안 자기가 잘못해서 두 마리아 요제파를 죽게 했다고 하면서 자책하며 지냈다. 지금은 천연두 정도는 쉽게 치유할수 있는 병이지만 당시에는 인큐베이터를 사용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었다. 딸 마리아 요제파의 바로 아래 동생인 마리아 카롤리나가 세상 떠난 언니를 대신하여 나폴리 공국의 페르디난트 4세와 결혼하였다.

 

바바리아의 공주로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큰 아들 요셉 2세에게 시집와서 비엔나에 살던 중 천연두에 걸려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리아 요제파 왕비. 요셉 2세에게 자녀가 없어서 결국 나중에 그의 동생인 레오폴드가 황제가 되었다.

 

1770년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망내 딸인 마리아 안토니아가 프랑스의 왕세자인 루이와 결혼했다. 공식 결혼식은 신랑의 대리가 참석한 가운데 비엔나의 성아우구스틴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원래는 마리아 안토니아를 프랑스의 왕실에 시집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프랑스가 마리아 안토니아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내 딸 마리아 안토니아에게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생활하기 위한 교육을 주입하였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제 마리 앙뚜아네트라고 불리는 마리아 안토니아에게 거의 매일 같이 편지를 보내어 이런저런 자문을 하였다. 말이 자문이지 실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게으름과 경솔함을 꾸짖는 것이었으며 결혼한후 아이가 없는데 대하여 걱정하는 내용이 전부였다.

 

마리아 안토니아(프랑스의 루이왕세자와 결혼하고서는 마리 앙뚜아네트라고 부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음.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레오폴드이 매사에 우유부단하면서도 성격이 차갑다고 하며 좋아하지 않았다. 나폴리로 시집간 마리아 카롤리나에게는 제발 지나치게 정치활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페르디난트에 대하여는 준비성도 없고 해야할 일을 민첩하게 하지 못한다고 꾸지람을 주었다. 마리아 아말리아에 대하여는 프랑스어 실력이 형편 없음을 한탄하고 너무 잘난체 한다고 꾸짖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꾸지람을 하지 않은 유일한 자녀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였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다. 그래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었으며 항상 옆에 함께 있기를 바랬다. 다만, 한가지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어머니를 실망시킨 것은 소생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최대 소망은 손자손녀들을 최대한 많이 거느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자기가 낳은 자녀들의 숫자보다도 적은 겨우 12명 정도의 손주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손녀들 중에서 큰 손녀들에게 모두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이름을 주었다. 예외가 있다면 파르마 공국으로 시집간 마리아 아말리아의 큰 딸로서 그냥 카롤리나라고 불렀다.

 

이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의 명단을 간단히 적어보도록 한다.

 

1. 마리아 엘리자베트(Maria Elizabeth): 1737. 2. 5-1740. 6. 6. 세살 때에 세상을 떠남.

2. 마이아 안나(Maria Anna): 1738. 10. 6-1789. 11.9. 미혼으로 51세에 세상을 떠남.

3.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740. 1. 12-1741. 1. 25. 생후 1년 좀 지나서 세상을 떠남.

4. 요셉 2세(Josepf II): 신성로마제국 황제. 1741. 3. 13-1790. 2. 20.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국의 지위를 가짐,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178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오스트리아 영토의 공동 통치자였음. 첫 결혼은 1760년에 파르마의 이사벨라 공주였으며 두번째는 1765년 1월 23일 바바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공주였다. 마리아 요제파는 비엔나에 온지 2년만에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두 왕비 사이에서 생존한 자녀가 없다.

5.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hristina): 1742. 5. 13-1798. 6. 24. 1776년에 테셴(Teschen)공작인 작소니의 알베르트 왕자와 결혼함. 자녀가 없음.

6. 마리아 엘리자베트(Maria Elisabeth): 1743. 8. 12-1808. 9.22. 55세에 미혼으로 세상을 떠남.

7. 샤를르 요셉(Charles Josepf): 1745. 2. 1-1761. 1. 18. 천연두로 16세에 세상을 떠남.

8. 마리아 아말리아(Maria Amalia): 1746. 2. 26-1804. 6. 9. 1769년에 파르마의 페르디난트 왕자와 결혼함. 페르디난트는 1802년에 세상을 떠남. 자녀가 있음.

9. 레오폴드 2세(Lepolod II): 신성로마제국 황제. 1747. 5. 5-1792. 3. 1. 1765년에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와 결한함. 자녀가 있음.

10.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1748. 9. 17-1748. 9. 17. 태어난 날 세례를 받은 후 세상을 떠남.

11. 마리아 요한나(Maria Johanna): 1750. 2. 4-1762. 12. 23. 천연두로 12세에 세상을 떠남.

12. 마리아 요제파(Maria Josepha): 1751. 3. 19-1767. 10. 15. 천연두로 16세에 세상을 떠남.

13.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1752. 8. 13-1814. 9. 7. 마리아 테레지아의 열번째 자녀인 마리아 카롤리나가 태어난 날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함. 1768년에 나폴리-시실리의 페르디난드 4세와 결혼함. 자녀가 있음.

14. 페르디난트(Ferdinand): 1754. 6. 1-1806. 12. 24. 1771년에 브라이스가우(Breisgau)와 모데나의 왕위계승자인 마리아 베아트리체와 결혼함. 자녀가 있음. 아들이 오스트리아-에스테의 군주가 됨.

15.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 1755. 11. 2-1793. 10. 16.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1770년에 결혼함. 루이 16세와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됨. 그때 마리 앙뚜아네트는 38세였고 루이 16세는 39세였음.

16. 막시밀리안 프란시스(Maximilian Francis): 1756. 12. 8-1801. 7. 27. 쾰른대주교 및 선제후. 자녀가 없음.

 

마리아 테레지아의 큰 아들로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요셉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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