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개혁, 개혁, 개혁...

정준극 2012. 6. 9. 21:57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혁정책

 

마리아 테레지엔 플라츠의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

                             

[정치]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수적이었다. 국사에서도 그렇고 신앙생활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개혁하였고 정부의 관료행정을 개혁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혁 일선에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하우그비츠 백작이 있었다. 그는 군대의 제도뿐만 아니라 무기도 현대화하고 병력도 10만 명 이상으로 증강하였다. 돈은 어디서 났는가? 각 영지에서 갹출한 1천 4백만 굴덴으로 그런 엄청난 사업들을 추진하였다. 하우그비츠는 귀족들로부터도 세금을 받아냈다. 전에는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행정개혁 중 가장 괄목할만한 것은 1749년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의 수상부를 통합한 것이다. 전에는 각각 별도였다. 그래서 비엔나에 보헤미아 수상부가 별도로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국가재정을 위해 세금을 배로 거두었다. 하지만 성직자들과 귀족들에 대한 세금부과는 별로 커다라 소득을 얻지 못했다. 아무튼 재정개혁으로 국가경제는 크게 신장되었다. 1760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국가자문위원회를 창설하였다. 수상과 귀족대표 3인과 기사대표 3인으로 구성하였다. 이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여러 분야에서 자문활동을 하였다. 그점에 있어서는 프러시아보다 앞섰다.

 

[의료]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동생인 마리아 안나가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나자 비엔나에 종합병원을 설립키 위해 네덜랜드에서 게라르트 반 슈비텐(Gerard van Swieten)을 초청하였다. 반 슈비텐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인 주치의로 활동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반 슈비텐에게 어떻게 하면 오스트리아에서 유아 사망율을 줄일수 있는지 연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반 슈비텐의 권고에 의해 오스트리아에서 모든 사망자는 부검을 의무적으로 실시토록 하고 우선 오스트리아 제2의 도시인 그라츠부터 실시토록 하였다. 부검을 하는 이유는 사망의 원인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라츠의 부검 보고서는 오늘날 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부검 보고서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에서는 지금도 유아의 사망시 부검을 시행하고 있다. 당시에 천연두(우두)는 유아 사망율의 주범이었다. 그때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가 종두법을 개발하여 실시하기 시작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우선 자기의 자녀들에게 종두를 접종토록 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의사들의 종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바꾸어 놓았다. 1767년 어느날 마리아 테레지아는 최초로 종두접종을 한 어린이 65명을 쇤브룬 궁전으로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도 우두를 접종했다. 사족이지만, 게라르트 반 슈비텐의 동생인 고트프리트 반 슈비텐은 모차르트를 ㅣ비롯하여 하이든, 베토벤 등에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다. 말하자면 음악가를 돕는 파트론이었다. 그는 특히 모차르트에게 여러 도움을 주었으며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장례식까지 주관한 사람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설립한 비엔나 종합병원 구건물(Alters AKH)

 

[민권]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러 개혁 중에서 Codex Theresianus라는 것이 있다. '테레지아 법전'이라고 번역할수 있다. 민권에 대한 법전이다. 1752년에 착수하여 14년 후인 1766년에 완성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1776년부터 마녀재판을 금지하고 이들에 대한 고문과 화형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역사상 처음으로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강제노역으로 대신하였다. 이 제도는 실행까지 시간이 필요하여서 당장 실시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런 제도를 도입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교회] 마리아 테레지아는 교회묘지의 신규운영을 금지하였다. 부득이 교회묘지를 확장하려면 정부의 허락을 받도록 했다. 그렇게 하여 불필요하게 땅을 사용하는 일과 비위생적인 매장관습이 사실상 억제되었다. 마이라 테레지아는 교외 공동묘지의 확장을 권장하였다.

 

[교욱] 마리아 테레지아의 주치의이기도 한 반 슈비텐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요청에 의거, 오스트리아의 교육 시스템을 검토하고 개혁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6세부터 12세까지의 모든 어린이가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도록 했다. 프러시아에서는 이미 이같은 제도를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작정했다. 하지만 지방에서의 반발이 거셌다. 아이들은 노동력이므로 의무적으로 취학한다면 손해가 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다지 성공을 보지 못했다. 19세기에 오스트리아의 문맹률은 인구의 절반에 가까웠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비가톨릭 학생도 대학교에 입학할수 있게 하였으며 대학에서는 법률과 같은 신학 이외의 학문도 가르치도록 했다. 대학이라고 하면 의례껀 신학공부를 하는 곳으로 알고 있던 터에 그로부터 대학에서 신학의 위상이 축소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1746년에 설립한 테레지아눔. 화보리텐슈트라쎄 15번지. 오스트리아 교육법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