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지나친 애도와 말년의 생활

정준극 2012. 6. 10. 02:36

지나친 애도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과 미술사박물관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시스 1세는 1765년 8월 18일, 인스부르크에서 둘째 아들 레오폴드의 결혼식 축하 행사가 진쟁되는 중에 갑자기 쓰러졌다가 얼마후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잃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치 홀로 저 나락에 버려진듯한 느낌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떠한 악세사리도 하지 않았다. 머리는 짧게 잘랐다. 자기의 침실을 검은색으로 칠했다. 그리고 여생을 검은 상복을 입고 지냈다. 궁정행사는 물론 일반행사에도 일체 참석하지 않았다. 극장에 가지도 않았다. 남편이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은 생애 동안 매달 18일을 혼자서 자기 방에서 남편을 애도하며 지냈다. 뿐만 아니라 매년 8월 한달은 추모의 달로 정하고 남편을 추모하며 지다. 남편의 관이 안치되어 있는 카푸친교회 지하의 카이저그루프트에도 자주 갔다. 먹는 것도 별로 먹지 않았다. 잠을 충분히 자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정신건강이 쇠약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시스가 세상을 떠난 직후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내 자신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마치 짐승처럼 삶에 대한 의미나 가치를 잃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큰 아들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셉 2세. 합스부르크-로레인 왕조의 시작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시스 1세가 세상을 떠난지 한달 후인 1765년 9월 17일에 아들인 요셉 2세와 함께 공동 군주임을 선포했다. 요셉 2세가 군주가 되었을 때에는 1740년 아버지인 프란시스 스테픈이 프란시스 1세로서 군주가 되었을 당시보다 영토가 적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황제라면 더 넓은 땅을 보유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1765년에 요셉 2세와 공동 군주가 되겠다고 천명했다. 이후로 두 사람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자주 다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사상과 이념에서 그러했다. 그러던중 1766년에 마리아 테레지아를 도와 개혁일선에 있었던 하우그비츠가 세상을 떠났다. 하우그비츠는 특히 군대의 재편에 막중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로스는 큰 타격이었다. 이후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요셉 2세에게 모든 군권을 이양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떤 성품의 사람이었는가? 군주로서 보통 이상의 자격과 능력을 지닌 훌륭한 인물이라는 것이 마리아 테레지아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하지만 아들들인 요셉 2세와 레오폴드 2세보다는 지식과 지성면에서 부족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실용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남들을 동정하는 따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한 매사에 우유부단하지 않는 결단력도 있었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쇤브룬궁전에서 어린 모차르트가 마이라 체레지아와 가족들, 귀부인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인사하고 있다.

 

죽음과 전설

 

마리아 테레지아는 건강에 대하여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원래 튼튼한 체격이었으므로 잔병치레는 거의 없었다. 그는 몸이 더운 편이었다.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어놓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주치의들이 그러지 말라고 난리를 쳐도 그저 웃으면서 별것을 다 가지고 걱정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1767년 큰 며느리, 즉 나중에 요셉 2세가 된 큰 아들의 부인이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을 때 함께 천연두에 걸렸던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그때문인지 숨이 가쁘고 어지럼증이 있었으며 기침을 자주했다. 또 간혹 자기의 죽은 자녀들과 남편을 생각하여 비탄에 빠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는 시신공포증이 있었으며 불면증도 있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수종까지 있어서 몸이 점차 비대해졌다. 그래서 남편의 관이 있는 카이저그루프트에 갈때 계단이 비좁아서 결국 수제식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80년 11월 24일 병에 걸려 몸져 누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감기였다. 주치의인 스퇴르크 박사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흘 후인 11월 28일, 마리아 테레지아는 사제를 불러 마지막 병자성사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1월 29일 밤 9시 경 숨을 거두었다. 비엔나에 있는 자녀들이 임종을 지켜보았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죽음으로 인하여 오리지널 합스부르크 가문은 막을 내리고 그로부터 합스부르크 로레인 가문이 시작되었다. 요셉 2세와 레오폴드 2세도 따지고 보면 로트링거 혈통(로레인 가문)을 이어 받았다고 할수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신은 카이저그루프트(황실영묘)에 미리 마련된 남편과의 이중관에 안치되었다. 심장은 아우구스틴 교회에 보관되었으며 장기(臟器)는 슈테판대성당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카이저그루프트에 있는 프란시스 1세와의 2중 관(棺)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다음과 같은 공식 타이틀 대신에 그저 간단히 미망인(Dowager) 이라고만 적혀 있다. 평생의 적수인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은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말하였다. "위대한 남자가 이룩한 것을 이룩했다."

 

카이저그루프트(제국영묘)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프란시스 1세의 2중 관. 상단에 두 사람이 마침 잠에서 깨어나 아침 인사를 나누고 있는 듯한 느낌의 조각이 되어 있다.

                                     

아래 그림은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주화이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주화중의 하나이다. 라틴어로 M[ARIA] THERESIA D[EI] G[RATIA] R[OMANORVM] IMP[ERATRIX] HV[NGARIAE] BO[HEMIAE] REG[INA] 라고 적혀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Maria Theresa, by the Grace of God, Empress of the Romans, Queen of Hungary and Bohemia"이다. 이 주화는 1890년에 만든 것이지만 표면에는 1780년이라고 되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세상을 떠난 해이다. 그 해에 처음으로 주조된 이래 여러번 계속 주조되었지만 발행날짜는 한결같이 1780년으로 동결되어 있다. 그래서 유명하다.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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