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

정준극 2012. 7. 2. 08:54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國事詔勅)

Progmatic Sanction of Emperor Charles VI

1713년 4월 19일

 

마리아 테레지아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Progmatic Sanction)은 신성로마제극 황제인 샤를르 6세가 1713년에 작성한 것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합스부르크의 관할 아래에 있는 모든 왕국들과 영토들은 합스부르크의 정통 계승자에게만 계승된다는 내용이다. 과거에는 국왕이 세상을 떠나면 영토를 후손들에게 나누어주어 통치토록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샤를를 6세는 그러한 영토분할을 방지하기 위해 국사조칙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은 영토의 분할을 방지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적장자가 없는 경우에 딸이 통치를 계승한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어서 의의가 있다. 즉, 국사조칙에 의하면 합스부르크가 통치하는 제국과 영토는 샤를르 6세의 적장자에게 계승되지만 만일 적장자가 없을 경우에는 적장녀(딸)이 계승하며 만일 그 딸에게도 후사가 없으면 샤를르 6세의 남동생인 요셉1세의 자녀가 계승하되 그쪽에도 아들이 없으면 딸에게 제국이 계승된다는 내용이다. 결국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은 그의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가 통치하는 모든 영토를 승계한다는 목적을 담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한때 결혼 얘기가 있었던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 그래서인지 마리아 테레지아와는 평생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다.

 

샤를르 6세는 결혼후 자녀가 없다가 몇 년후에 아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태어난지 얼마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 후로 태어난 두 아이들은 모두 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1717년에, 마리아 안나가 1718년에 태어났다.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칙은 1713년에 작성되었지만 공포되기는 1720년이었다. 즉,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난 후에 정식으로 공포되었던 것이다. 국사조칙은 공포된 이후에 제국에 속한 국가들의 개별적인 인준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샤를르 황제의 통치 말기에 오스트리아의 외교는 제국에 속한 모든 국가들로부터는 물론 유럽의 강대국들로부터 국사조칙을 인정받는 업무에 치중되었다. 그리하여 샤를르6세의 형이었던 요셉1세의 딸들과 그의 배우자들(작소니와 바바리아의 선제후들), 제국의회(The Diet of the Empire), 러시아, 스페인, 영국, 프랑스, 프러시아, 네덜랜드, 덴마크, 사르디니아가 국사조칙을 승인하는 나라에 포함되었다.

 

샤를르 6세가 1740년 10월 20일에 세상을 떠나자 국사조칙을 이미 승인했던 나라들 중에서 두 대국이 당장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이었다.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는 샤를르6세의 형인 요셉1세의 큰딸의 남편이었다. 그로 인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에게 실레지아의 대부분을 넘겨 주어야 했고 아울러 밀라노 공국의 일부,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국의 일부를 빼앗겼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의 나머지 영토들을 인계받았고 그의 남편인 프란시스 스테판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인정을 받아 프란시스 1세로 호칭되었다.

 

프란시스 1세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다른 항목에서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코자 한다. 하지만 그래도 기억을 새롭게 하는 의미에서 간략이 재탕코자 하니 양해 바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1740년에 시작하여 1748년에 마무리 된 8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여러 전쟁이 복합된 것으로 그 중에서 두 전쟁은 샤를르 6세의 서거로 인하여 직접 야기된 것이지만 다른 전쟁들은 간접적으로 일어난 것들이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는 프랑스의 역할이 컸다. 프랑스는 뜻밖에도 바바리아, 작소니, 스페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분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나라들이다. 프랑스는 특히 바바리아의 선제후인 샤를르 알베르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겠다는 주장을 지지하였다. 샤를르 알베르는 샤를르 6세 황제의 형인 요셉 1세의 큰 딸의 남편이었다. 프랑스는 왜 바바리아 등의 후원했을까? 불구대천의 원수인 오스트리아를 파멸시키기 위해서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부군인 프란시스 1세(왼쪽) 그리고 자녀들. 가운데 키큰 남자가 나중에 요제프 2세가 된 큰아들. 제일 오른쪽이 나중에 레오폴드 2세가 된 셋째 아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기간 중의 두번째 시리즈 전쟁은 실레지아 전쟁이다. 두 차례에 걸쳐 일어 났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의 소유의 실레지아를 공격하고 차지한 전쟁이다. 첫번째 실레지아 전쟁은 1740년부터 1742년까지였고 두번째는 1744년부터 1745년까지였다. 세번째 시리즈의 왕위계승 전쟁은 의외로 영국과 프랑스로 번진 것이다. 북미에서의 식민지 관할을 놓고 전쟁을 벌인 것이다.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를 오스트리아의 여제로 앉히려는데 따르는 전쟁들이 대륙을 건너서 신대륙인 아메리카까지 확대된 것이다.

 

실레지아의 마을

                   

아무튼 집합적으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1740년 12월 16일에 시작되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가 오스트리아가 지배하는 실레지아를 공격한 것이다. 실레지아는 합스부르크의 지방 중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었다. 해가 바뀌어 1741년이 되었다. 프레데릭의 군대는 1741년 4월 몰비츠(Mollwitz)라는 곳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대파하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몰비츠 전투이다.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 군대를 단번에 무찌르자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합스부르크가 그정도 밖에 안되느냐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그래서 '나도 합스부르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 이길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 되었다. 몰비츠 전투가 있은지 한 달 후에 프랑스의 샤를르 루이 오귀스트 푸케(Charles-Louis-Auguste Fouquet) 백작(나중에 공작 및 원수로 격상)이 바바리아 및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합스부르크를 치자고 제안하였더. 푸케 백작은 외교적 재능이 뛰어나서 이어 프러시아 및 작소니와도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를 쳐부수자고 제안하였다. 오스트리아의 통치자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젊은 나이에 정치 경험도 일천하여서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결국 가닥을 잡은 것이 바다건너 영국과 손을 잡기로 하였다. 영국은 만일 프랑스가 대륙에서 헤게모니를 잡을 것 같으면 상업과 식민지 활동에 큰 위협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여 프랑스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은 서곡이고 실은 프랑스와 영국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이 전쟁의 본막으로 1689년부터 1815년까지 지속된 양국간의 전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실레지아의 광산

                  

바바리아와 손을 잡은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와 바바리아 군대의 연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한 전투경험들이 없어서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침공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까지 프랑스 및 바바리아 군대와 합동하여 전선을 구축한다면 곤란하므로 우선 프러시아를 잠자코 있게 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기왕에 실레지아를 침공하여 주둔하고 있는 프러시아 군대를 용인하였다. 이와 함께 오스트리아-보헤미아는 1742년에 프랑스와 바바리아 동맹군을 몰아내고 내친 김에 바바리아까지 진격하여 바바리아의 상당부분을 점령하였다. 바바리아가 프랑스와 함께 군세를 재정비하여 반격에 나섰지만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인 영국, 하노버, 헤스가 1743년 7월에 바바리아의 데팅겐전투에서 바바리아-프랑스 동맹군을 격퇴하여 승승장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743년 9월에는 사보이가 오스트리아의 편에 가담하였다. 사보이는 국경을 넘어 쳐들어온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고 국경을 원상대로 유지하였다. 그러한 와중에서 해가 두어번이나 바뀌어 1745년에 오스트리아를 대항하는데 가장 앞장을 섰던 바바리아의 샤를르 7세(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가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 7세의 뒤를 이어 바바리아의 국왕에 오른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는 샤를르 7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요구했던 것을 철회하고 프란시스 스테판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을 인정하였다. 다만, 그 조건으로 오스트리아 군대가 바바리아에서 철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일이 이렇게 전개되자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은 오스트리아의 힘이 커지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잠시 소강상태에 있던 실레지아를 다시 공략하였다. 오스트리아로서는 프러시아의 막강한 군대를 막을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그해 12월에 드레스덴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프러시아가 실레지아를 소유한다는 것을 확정하였다. 오스트리아로서는 뼈아픈 조치였지만 프러시아와 승산이 없는 전쟁을 벌여 손실을 보느니보다는 실레지아를 넘겨 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746년부터 1748년까지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영국은 대륙에 건너온 군대가 바다 건너 되돌아 갔다. 영국에서는 어린 챨스 에드워드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토록 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를 프랑스가 후원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