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미완성 오페라

리어 왕(Re Lear)

정준극 2012. 6. 12. 17:58

베르디의 미완성 오페라 '리어 왕'(Re Lear) - King Lear

마스카니도 추진하지 못했다

 

베르디에게도 미완성 오페라가 있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리어 왕'을 오페라로 만들려고 생각했다가 생각으로만 그치고 완성하지 못했다. 베르디는 생전에 26편이라는 많은 오페라를 완성하였다. 그런 베르디가 마음만 먹으면 열심히 노력해서 '리어 왕'을 완성할수도 있겠는데 결국 자신과의 투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평생의 숙제로 남겨 놓아야 했다. 베르디는 그의 작곡 생활의 후반부에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여서 셰익스피어에 집중하였다. 말하자면 셰익스피어의 열렬 팬이 된 것이다. 베르디는 셰익스피어에 대하여 '어떻게 이토록 훌륭한 극본을 쓸수 있을까? 인생은 어차피 한 편의 연극이라고 했지만 정말 우리 인간들의 심정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대단하다.'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매료한 베르디는 '오텔로' '막베스' '활슈타프'를 불후의 오페라들을 만들었다. 이어 '리어 왕'의 극본을 읽은 베르디는 이 작품이야말로 오페라로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하여 구상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베르디와 오랜 콤비인 대본가인 살바도레 카마라노(Salvadore Cammarona)에게 의뢰하여 오페라 대본을 쓰도록 했다. 살바도레 카마라노는 베르디의 '루이자 밀러' '일 트로바토레' '알치라'(Alzira), '레냐노 전투'(La battaglia di Legnano)등의 대본을 쓴바 있다.

 

청년시절의 베르디

 

그러나 살바도레 카마라노는 '리어 왕'의 대본을 완성하지 못한채 1852년에 세상을 떠났다. '리어 왕'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베르디는 당대의 극작가인 안토니오 솜마(Antonio Somma: 1809-1864)에게 대본의 완성을 의뢰하였다. 안토니오 좀마는 베르디를 위해 '가면무도회'(Un ballo in maschera)의 대본을 제공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안토니오 좀마와 베르디는 '리어 왕'에 대한 주제를 어떤 것으로 삼느냐는 것을 놓고 의견이 맞지 않았다. 베르디가 오페라 '리어 왕'을 완성한다면 그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인 메시지는 무엇이 될 것이냐는 것에 대하여 의견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베르디는 좀마가 제시한 인물의 설정에 대하여도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베르디는 리어왕과 딸 코르델리아(Cordelia), 에드가(Edgar)와 에드먼드(Edmund) 형제, 그리고 광대(Fool)에만 초점을 두고 등장인물로 삼고자 했다. 고네릴(Goneril)dhk 레간(Regan), 켄트(Kent) 등은 그저 잠시만 등장하는 조연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좀마는 세 딸을 모두 주연급으로 삼고자 했다.

  

극 '리어 왕'에서 광대와 함께. 타이틀 롤은 피오트르 세마크(왼쪽)

 

베르디와 좀마의 어려운 인연은 '가면무도회'가 빌미를 던져준 것이었다. '가면무도회'의 오리지널 타이틀은 '구스타보 3세'(Gustavo III)였다. 그러나 당국의 사전검열에서 국왕을 암살하는 내용과 국왕이 신하의 부인과 불륜관계에 있는 듯이 묘사한 부분 등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혁명 이후 왕정제의 타파와 공화제의 창설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움직임으로 몹시 난처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므로 '구스타보 3세'에서 공화제를 열망하는 신하가 국왕을 암살하는 스토리는 당국의 공연허가를 받기가 어려웠다. 대본을 스웨덴이 아니라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보스턴으로 고쳐써야 했고 타이틀로 '가면무도회'로 바꾸는 소동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베르디는 매우 곤혹스럽고 만족치 못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한 때에 대본가와 충돌하며 '리어 왕'을 추진하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리어 왕'은 베르디의 영원한 숙제로 남게 되었다.

 

리어 왕의 세딸. 그중에서 아버지보다는 남편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겠다고 말한 코르델리아(가운데)만이 리어 왕이 곤경에 처하여 있을 때 제일 먼저 달려와서 아버지를 돌보았다.

 

일반적으로 미완성이라고 하면 거의 완성하다가 마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 '리어 왕'은 대본은 완성되어 있지만 음악이 어느 정도 추진되었는지는 모른다. 일부의 멜로디를 스케치해 놓았는지 조차 모른다. 아직까지 알려진바에 의하며 베르디는 '리어 왕'의 음악을 구상은 했지만 오선지에는 그려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상 미완성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대본이 완성되어 있고 베르디가 작곡할 의사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미완성 오페라라고 불러도 상관없다는 견해이다. 그런데 아마 베르디는 '리어 왕'을 완전히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1896년, 베르디는 세상을 떠나기 약 5년 전에 '리어 왕'의 대본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일약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피에트로 마스카니에게 주고 오페라를 작곡해 보라고 당부한 일이 있다. 그래서 마스카니가 베르디에게 '마에스트로, 어찌하여 선생님께서 직접 작곡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베르디는 잔잔한 음성으로 '리어 왕이 황야에서 혼자 있는 장면이 자꾸만 머리에서 나를 두렵게 만들어서 그렇다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스카니도 '리어 왕'을 오페라로 작곡할 생각만 했을 뿐, 실현하지 못했다.

 

비바람 부는 황야에서 눈이 먼채 울부짖는 리어 왕과 그를 유일하게 따라온 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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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현대음악 작곡가인 아리베르트 라이만(Aribert Reimann)이 '리어'(Lear)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작곡한 것이 있다. 1978년 7월 9일 뮌헨의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되었다. 라이만은 이 오페라를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를 주역으로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 실제로 피셔 디스카우는 일찍이 1968년에 라이만에게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오페라로 만들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일이 있다. 그후 1975년에 바바리아 슈타츠오퍼가 라이만에게 정식으로 작곡을 의뢰하여 작곡에 착수했고 1978년에 완성하였다. 당연히 타이틀 롤은 피셔 디스카우가 맡았다. 라이만의 '리어'는 1981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바이벌 되었으며 1982년에는 파리에서, 1989년에는 런던에서 리바이벌되었다. 라이만의 '리어'에서 한가지 특기할 사항은 어릿광대가 노래를 부르지 않고 대사만으로 진행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원작과는 달리 오페라에서는 켄트와 에드먼드의 역할이 대단히 축소되었다.

 

아리베르트 라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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