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바바리아의 샤를르 7세

정준극 2018. 4. 12. 10:50

바바리아의 샤를르 7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와중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


샤를르 7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 대한 이야기를 꾸려 나가는 중에 갑자기 샤를르 7세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샤를르 7세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3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군림했기 때문이다. 잘 아는 대로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6세 황제는 자꾸 나이가 들어가서 언제 요단강을 건널지 모르는 입장이 되자 후계자가 없어서 고민고민하였다. 샤를르 6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고 딸만 셋이 있었다. 그중에서 큰 딸이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샤를르 6세는 생각다 못해서 딸도 황제가 될수 있다는 내용의 국사조치를 일찍이 1713년에 공포했다. 그런 조치를 선포했을 때에는 샤를르 6세의 권세가 막강해서인지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들이 별로 반대 의견을 내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사실상 따지고 보면 유럽에서는 고래로부터 살리카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딸은 왕위를 승계하거나 영토로 상속받지 못하다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었다. 그러다가 1740년에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 과거에는 아무 말도 못하던 선제후들이 '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면서 반대의사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제후들은 그러면 누가 좋겠느냐고 의논했다.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Charles Albert)가 적당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샤를르 알베르를 샤를르 7세라고 해서 대관식을 가지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삼았다. 그것이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난지 2년 후인 1742년의 일이었다. 그 2년 동안은 이른바 공위였다. 그런데 세상이치는 공평한 것인지, 또는 무심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샤를르 7세는 3년 후인 1745년에 통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우여곡절을 거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츠 슈테판(프란시스 스테판) 대공이 프란시스 1세로서 1745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프란시스 1세는 명목상의 황제였으며 실질적인 정사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주관하였다. 아무튼 샤를르 7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신성로마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기 전까지 잠시나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있었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양반인지 알아 둘 필요가 있어서 소개하는 바이다. 어쨋든 그는 서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었다.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샤를르 7세인 샤를르 알베르는 1697년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17년에 태어났으므로 샤를르 7세가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20년이나 나이가 많았다. 샤를르 알베르는 1742년 1월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어서 1745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3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샤를르 7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출신이 아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과거 3백년 이상이나 합스부르크 가문이 전담해 왔다. 그러다가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연고권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샤를르 7세 이후에는 합스부르크-로레인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맡아 왔으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프란시스 1세로부터는 순수 합스부르크 출신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혈통이므로 그의 후손들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도 합스부르크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다시 샤를르 7세로 돌아가서, 그는 독일의 비텔스바흐(Wittelsbach) 가문의 멤버였다. 그러므로 샤를르 7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의 즉위는 합스부르크가 막을 내리고 다른 가문에서 황제를 배출한 첫번째 케이스가 된다. 물론 샤를르 7세도 혈연이나 결혼을 통해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비엔나의 밤. 비엔나는 수백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샤를르 알베르의 아버지는 바바리아 선제후인 막시밀리안 에마누엘 2세(Maximilian II Emanuel)였고 어머니는 폴란드 왕 존 조비에스키 3세(John III Sobieski: 1629-1696)의 딸인 테레자 쿠네군다 조비에스키(Theresa Kunegunda Sobieski)였다. 존 조비에스키 폴란드 왕이라고 하면 오스트리아의 역사에서 터키의 2차 비엔나 공성 때에 폴란드군을 이끌고 터키군을 공격하여 비엔나가 터키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구해준 인물로서 기억되고 있다. 그러므로 샤를르 알베르는 오스트리아와 전혀 무관한 사이가 아니었다. 샤를르 알베르의 가족들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때에 헤어지게 되었고 샤를르 알베르를 비롯한 일부 가족은 오스트리아에 잡혀서 몇년이나 연금생활을 했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란 것은 1700년에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국왕인 펠리페 2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립 5세를 후계자로 지명함으로서 촉발된 전쟁이었다. 다만, 필립 5세는 프랑스의 왕좌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루이는 그같은 조건을 무시하고 자기의 손자가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대공인 레오폴드는 '무슨 소리냐? 스페인은 합스부르크가 통치해 온 나라인데 프랑스의 부르봉이 차지하겠다니 말도 안된다'라고 주장하며 그의 아들 샤를르를 스페인의 새로운 왕으로 선정했다. 결국 두 진영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블렌하임 전투. 1701-1712


전쟁은 1701년에 일어나서 1714년까지 계속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영국, 더치 공화국, 포르투갈, 그리고 스페인에서 레오폴드 황제의 아들인 샤를르에게 충성하는 세력, 그리고 아라곤으로 구성된 대연맹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그의 손자 필립 5세의 세력과 기나긴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바바리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프랑스편에 붙어서 신성로마제국와 오스트리아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바바리아는 사실 10년이 넘게 전쟁에 참여했던 것이 아니라 1704년까지만 참전했었다. 그나저나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자 바바리아도 곤혹을 치루어야 했다. 그래서 샤를르 알베르의 가족이 일부이지만 오스트리아에 잡혀서 지냈던 것이다. 샤를르 알베르의 가족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끝난 후인 1715년에야 겨우 가족들과 재회할수 있었다. 아무튼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존재이지만 유럽의 거의 모든 왕실들이 그렇듯이 한치 건너 두치만 되어도 사촌간이 되기 때문에 크게 고생하지 않고 지낼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후 바바리아는 어쨋든 합스부르크에 순종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샤를르 알베르는 1716-18년에 있었던 오스트리아-터키 전쟁에 바바리아 지원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그나마 전공을 세웠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의 퐁트니 전투. 1745


샤를르 알베르는 1722년, 25세 때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아말리아와 결혼하였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요제프 1세의 막내 딸이었다. 두 사람은 비엔나의 궁전에서 만나 인연이 이어졌다. 샤를르 알베르는 합스부르크에 잘 보여야 자기의 자리도 온전히 보전될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프랑스와의 관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일례로서 1725년에는 베르사이유에서 거행된 루이 15세의 결혼식에 참석해서 프랑스 궁정과 친밀감을 강화하였다. 그러는데 1726년에 아버지 막시밀리안 에마누엘 2세가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 알베르가 뒤를 이어 샤를르 7세로서 바바리아 공작이 되었고 아울러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가 되었다. 샤를르 7세는 합스부르크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합스부르크와 껄끄러운 사이인 프랑스와도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따지고 보면 합스부르크 사람들은 이리저리해서 친척 아니면 사둔관계였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유대강화로 말하자면 선왕의 정책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샤를르 7세는 바바리아의 국방을 굳건히 해야겠다는 생각의 일환으로 로텐버그 요새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로텐버그 요새는 오늘날 프랑코니아 슈나이타흐의 로텐버그 산중에 있는 요새이다.


로텐버그 요새의 폐허


샤를르 7세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에마누엘이 비록 바바리아 공작이었지만 항상 더 높은 위상을 추구했던 것을 잊지 않고서 그 꿈을 이루고자 했다. 더 높은 위상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합스부르크가 독식하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샤를르 7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요제프 1세의 사위였다.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 샤를르 7세는 샤를르 6세가 선포했던 '국사조치'(Pragmatic Sanction of 1713)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거부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조가 장악하고 있는 독일 내의 영토들을 바바리아 왕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샤를르 7세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와 한판 붙을 생각으로 다른 나라들과의 동맹을 추진하였다. 결과, 1741년 7월의 님펜부르크 조약은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샤를르 7세의 바바리아와 프랑스, 스페인의 동맹을 가능케 만든 것이었다. 오스트리아가 처가집이면서도 국익을 위한다는 명목아래 반기를 든 것이었다. 마침내 1741년부터 이른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샤를르 7세의 바바리아 군은 전쟁이 일어나자 마자 오베르 외스터라이히를 공격했다. 샤를르 7세는 내친 김에 비엔나까지 점령코자 했다. 그러는데 동맹국인 프랑스의 군대가 바바리아와 함께 비엔나를 공격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프랑스 군의 총사령관인 드 벨르 일 공작(Duc de Belle-Isle: Charles Louis Auguste Fouquet)이 비엔나로 행군하지 않고 대신에 프라하로 발길을 돌렸다. 그래서 샤를르 7세의 비엔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고 반면에 프랑스군은 1741년 11월에 프라하를 정복했다.


샤를르 7세는 1741년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프라하성의 위용.


아무튼 그래서 샤를르 7세도 비엔나에 입성하지 못하고 프라하로 방향을 바꾸었고 점령지 프라하에서 1741년 12월 19일에 보헤미아의 새로운 왕으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보헤미아 왕국은 합스부르크의 우산 아래에 있던 나라였다. 그 보헤미아 왕국을 바바리아에 빼앗겼던 것이다. 그렇다고 합스부르크가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보헤미아를 점령한 샤를르 7세의 기세는 등등했다. 이듬해인 1742년 1월에는 '로마 왕'으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영국의 조지 2세까지도 샤를르 7세를 지지하는 표를 던졌다. 로마 왕으로 선출된 

샤를르 7세는 내친 김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화려하게 치루고 싶었다. 말타면 경마잡히고 싶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로마왕으로 선출된지 두달 후인 1742년 2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여기서 잠시 로마왕은 무엇이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또 무엇이냐고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같은 것이다. 굳이 분간하자면 독일왕으로 선출된 후에 로마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가지게 되면 그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사용할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왕과 로마 교황간에 간혹 다툼이 있어서 로마왕들이 교황에 의한 대관식을 갖지 않고 그냥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샤를르 7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질 때에 로마 교황에 의한 대관식을 갖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쾰른 선제후(Kurfürst)인 클레멘스 아우구스트가 대관식을 집전하였다. 클레멘스 아우구스트는 샤를르 7세의 동생이었다. 클레멘스 아우구스트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로레인을 지지하였으나 형인 샤를르 7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니까 발벗고 나서서 샤를르 7세편을 들었다. 이로써 샤를르 7세는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루이 4세 이후로 두번째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인물이 되었다.


1742년 1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대관식을 갖는 샤를르 7세


샤를르 7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세를 올리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가 가만히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샤를르 7세가 황제로 즉위한 이래 샤를르 7세가 차지했던 영토들은 하나 둘씩 오스트리아에 짓밟혔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 테레지아 군대는 바바리아 왕국까지 점령하였다. 샤를르 7세는 명색이 황제인데 바바리아의 뮌헨으로부터 도망하여 프랑크푸르트의 팔레 바르크하우스(Palais Barckhaus)에서 거의 3년이나 지냈다. 뿐만 아니었다. 돌이켜보건대 샤를르 7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1742년 2월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대관식을 가졌지만 그해 12월에는 그동안 애써서 차지했던 보헤미아의 대부분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다시 내주어야 했다. 물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것은 허울만 좋을 뿐 실속이 없는 자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르 7세는 제국의 효과적으로 통솔하지도 못했고 자기 자신의 영토인 바바리아까지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능한 샤를르 7세를 보고 라틴어로 Et Caesar et nihil이라고 조롱했다. '껍데기 뿐인 황제'라는 의미이다. 군주가 무능하면 군대의 사령관이라도 유능해야 하는데 샤를르 7세 군대의 총사령관인 이그나즈 펠릭스 장군은 핀잔받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펠릭스 장군을 북에 비유하였다. 북소리는 두들겨야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펠릭스 장군도 북처럼 두드려야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겨우 알수 있다는 말이었다. 뮌헨을 떠난 샤를르 7세는 프랑크푸르트에 정부를 마련하고 군주들에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칙령을 내보냈다. 예를 들면 에얼랑겐대학교에 대한 황족들의 특례입학법, 신규 황족 임명법 등이었다.


오늘날의 프랑크푸르트


그러는 중에 바바리아군에 새로운 사령관이 임명되었다. 프리드리히 하인히리 폰 제켄도르프 장군이었다. 폰 제켄도르프 장군은 1743년 3월에 바바리아를 점령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샤를르 7세는 오랫만에 뮌헨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바바리아와 프랑스 동맹군이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여 라인까지 퇴각하였고 그 통에 바바리아는 다시 오스트리아의 수중에 들어갔다. 샤를르 7세는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피난가야 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가 바바리아 편을 들고 나섰다. 프레데릭 2세는 2차 실레지안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바바리아로 몰아냈다. 그래서 샤를르 7세는 1744년 10월에 뮌헨으로 다시 돌아올수 있었다. 샤를르 7세는 이대로 맨날 전쟁만 벌이다가는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왜 지금에 와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샤를르 7세는 오스트리아에게 화해의 제스추어를 보냈다. 오스트리아로서도 어서 안정을 찾고 싶었기 때문에 바바리아와 굳이 더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면서 스는 프랑스로부터 군사지원을 받고자 노력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는 중이지만 샤를르 7세는 다리에 염증이 생겨서 통증이 심한 통풍(痛風)에 걸려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샤를르 7세는 님펜버그 궁에서 1745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 7세의 동생인 문제의 클레민스 아우구스트는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오스트리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샤를르 7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는 마침내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할수 있었다. 바바리아와 오스트리아의 휘쎈조약(Treaty of Fussen)에 의해서 오스트리아는 샤를르 7세를 신성로마제국의 적법한 황제로서 인정하였다. 샤를르 7세는 뮌헨의 테아티너키르헤의 남골당에 안치되었다.


샤를르 7세의 관이 안치되어 있는 뮌헨의 테아티너키르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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