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미주와 아시아

모턴 펠드맨(Morton Feldman)

정준극 2012. 11. 25. 07:54

불확정 음악의 선구자

뉴욕 출신의 모턴 펠드맨(Morton Feldman)

 

모턴 펠드맨

 

모턴 펠드맨(1926-1987)은 뉴욕에서 태어난 20세기 미국의 작곡가이다. 펠드맨은 이른바 '불확정 음악'(Interminate music)의 선구자이다. 불확정 음악은 실험적인 뉴욕학파에 속한 작곡가들이 개발한 새로운 음악장르이다. 존 케이지, 크리스티안 월프(Christian Wolff), 얼 브라운(Earle Brown) 등이 20세기 불확정 음악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팰드맨의 작품들은 기보법(記譜法)을 혁신한 것으로 특정지을수 있다. 자기 자신만의 특성적인 소리를 창조하기 위해 기보법을 혁신하였던 것이다. 리듬은 자유스럽고 떠돌아 다니는 것 같이 보이도록 했다. 피치의 농암은 부드럽게 포커스가 맞추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일반적으로 조용하고 천천히 발전하는 음악이었다. 비대칭의 패턴이 계속 되풀이 되는 음악이었다. 1977년 이후의 그의 후기 작품들도 지속적인 기간의 극단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잠시 음악에 있어서 '불확정'(Indeterminacy: Indetermination)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간략히 설명코자 한다. 음악 작품의 어느 파트이던지 만일 그것이 우연히 선택된 것이라면 '불확정 음악'이라고 규정할수 있다. 이것을 작곡의 불확정이라고 말한다. 또는 만일 연주에 있어서 정확한 지시사항이 없으면 그것도 '불확정 음악'이라고 할수 있다. 이 경우에는 '연주의 불확정'이라고 말한다. '불확정 음악'은 20세기 초반 챨스 아이브스(Charles Ives)의 음악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어 1930년대에 헨리 카웰(Henry Cowell)에 의해 계속되었으며 그의 제자로서 실험적 음악의 작곡가인 존 케이지(John Cage)가 1951년부터 적극 수행함으로서 음악계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2001년 존 케이지의 그리피스(Griffiths)는 대표적인 '불확정 음악'이다. 따라서 오늘날 얘기되고 있는 음악에서의 '불확정'은 존 케이지를 중심으로 주로 미국에서 발전한 음악형태의 하나라고 말할수 있다. 존 케이지를 중심으로 한 그룹들을 뉴욕 학파(New York School)이라고 부르며 여기에는 얼 브라운, 모턴 펠드맨, 크리스티안 월프 등이 포함된다. 한편, 영국에서 1970년대에 반짝했던 '스크랫치 오케스트라'(Scratch Orchestra)라는 것도 이에 속한다. 일본의 작곡가인 토시 이치야나기(Toshi Ichiyanagi: 1933-)의 작품도 '불확적' 음악에 속한다.

 

불확정 음악을 주도적으로 작곡한 존 케이지

 

펠드맨은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키에프에서 이민 온 러시아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동복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펠드맨은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의 피아노 선생이었던 베라 마우리나 프레스라는 사람은 펠드맨에게 '무언가 흥분하고 설레이며 진동하는 음악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펠드맨의 첫 작곡 선생들은 아놀드 쇤버그의 첫번째 미국 추종자라고 하는 월링포드 리거(Wallingford Riegger), 그리고 독일 출신의 유태인으로서 프란츠 슈레커와 안톤 베베른에게서 배운 슈테판 볼페(Stefan Wolpe)였다. 그중에서도 펠드맨은 선생인 볼페와 만나면 작곡 공부는 제쳐놓고 그저 음악과 예술에 대하여 열띤 토론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펠드맨이 평생의 친구인 존 케이지를 만난 것은 1950년대 초였다. 어느날 펠드맨은 뉴욕필이 연주하는 안톤 베베른의 교향곡 21번을 들으러 갔다. 베베른의 교향곡 연주가 끝나자 청중들으 베베른의 작품에 대하여 심한 야유를 보냈다. 펠드맨은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 연주회장을 떠나려고 했다. 그때 우연히 로비에서 존 케이지를 만났다. 그로부터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얼마후 펠드맨은 존 케이지가 살고 있는 아프트의 2층으로 이사를 갔다. 펠드맨은 케이지를 통해서 조각가인 리챠드 리폴드(Richard Lippold), 화가 조니아 세쿨라(Sonia Sekula),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작곡가로서는 헨리 카웰(Henry Cowell), 버질 톰슨(Virgil Thomson), 조지 엔틸(George Antheil) 등을 만나 친분을 다지며 지냈다.

 

펠드맨은 케이지의 격려를 받아서 과거의 작곡 시스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 펠드맨은 전통적인 하모니 또는 병렬주의적 기법으로부터의 제약에서 벗어난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비표준적 기보 시스템을 실험적으로 실시했다. 간혹 스코어에 그리드(격자처럼 생긴 방안지)를 시용하였고 어떤 특정 시간에 얼마나 많은 음표가 연주되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여 적어 놓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음표를 그렇게 연주해야 하는지는 표시해 놓지 않았다. 펠드맨이 작곡에 있어서 전조(轉調)의 사용을 실험적으로 추진하자 나중에 케이지가 오히려 펠드맨의 기법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역(易)의 음악'(Music of Changes)이라는 작품을 썼다. 중국 역경(易經: 이칭)의 원칙에 의해 연주해야 하는 음악이다.

 

펠드맨은 잭 가핀(Jack Garfein)이 감독한 1961년도 영화'섬싱 와일드'(Something Wild)의 음악을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주인공인 캐롤 베이커(Carroll Baker)가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이다. 케롤 베이커는 잭 가핀의 부인이었다. 잭 가핀은 펠드맨이 작곡한 첫 장면에서의 음악을 듣고 나서 즉시 펠드맨의 음악을 취소하고 대신 아론 코플랜드의 음악을 사용하였다. 누가 왜 그랬느냐고 묻자 잭 가핀은 '내 마누라가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인데 그 친구는 첼레스타의 음악을 썼소이다'라고 말했다. 첼레스타는 종소리를 내는 작은 건반악기이다. 펠드맨은 존 케이지를 통해서 추상적 표현주의 화가인 잭슨 폴락(Jackson Pollack: 1912-1956)과 필립 거스튼(Philip Guston: 1913-1980), 작가이며 시인인 프랭크 오헤어(Frank O'Hare: 1926-1966) 등 뉴욕 예술계의 여러 유명인사들과 접촉할수 있었다. 펠드맨은 이들의 추상적 표현주의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 펠드맨은 1970년대에 표현주의적인 여러 작품들을 썼다. 대개 길이가 20분이 되는 작품들이었다. 그 중에는 '로트코 채플'(Rothko Chaple: 1971)도 포함된다. '로트코 채플'은 건물의 이름이다. 러시아 출신의 유명한 추상화가인 마크 로트코(Mark Rothko: 1903-1970)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건물이다. 펠드맨은 1973년에 '프랭크 오헤어를 위하여'(For Frank O'Hare)를 썼고 1977년에는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시에 의한 '나이더'(Neither)라는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펠드맨은 '나이더'를 오페라라고 부르지 않고 드라마틱 프러덕션(Dramatic production)이라고 불렀다. '나이더'는 이른바 '앤티오페라'의 장르에 속한다. 앤티오페라는 오페라의 전형적인 규범이나 관례를 의도적으로 회피하여 작곡한 작품을 말한다. '나이더'(둘 중에서 어느쪽도 아니다라는 단어)는 펠드맨의 유일한 오페라이다. 사뮈엘 베케트의 시에서 56행을 대본으로 사용하였다. 펠드맨과 베케트는 1976년 베를린에서 만나 협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베케트는 펠드맨에게 오페라로 만드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펠드맨은 베케트의 감정과 취향에 동의하였다. '나이더'는 소프라노 솔리스트와 실내 오케스트를 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모노드라마라고 보아야 할 것이지만 펠드맨 자신도 오페라에 대하여 경멸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앤티오페라라고 표현해도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앤티오페라로 얘기되고 있는 작품들은 리게티의 '르 그랑 마카브르'(Le Grande Macabre), 마우리치오 카겔의 '국립극장'(Staatstheater), 쿠르트 봐일의 '삼문 오페라'(The Threepenny Opera) 등이 있다.

 

펠드맨은 1973년에 47세의 비교적 완숙한 나이에 버팔로대학교에서 자칭 에드가 바레스(Edgard Varese: 1883-1965) 교수가 되었다. 에드가 바레스는 프랑스 출신의 미국 작곡가로서 혁신적인 현대음악을 주도한 사람이다. 펠드맨이 직분을 가진 것은 버팔로대학교의 교수 자리가 처음이었다. 그 전에는 가족들이 경영하는 직물상점에서 풀타임으로 근무했었다. 펠드맨은 버팔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외에 산디에고의 캘리포니아대학교의 전임교수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교수로서의 생활이 안정이 되자 그는 오로지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악장이 구분되지 않고 계속 연결되는 작품들이었다. 연주시간은 한시간 반을 넘거나 넘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예를 들면 '바이올린과 현악 4중주'(1985. 약 두시간), '필립 거스튼을 위해'(For Philip Guston: 1984. 약 4시간), 그리고 가장 대단한 것은 1983년의 '현악 4중주 II'로서 연주시간은 휴게시간 없이 6시간이나 걸리는 것이었다. 이 작품들은 전형적으로 대단히 느린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대부분 대단히 조용한 음향을 내야하는 것들이다. 펠드맨은 조용한 음향이야 말로 자기가 가장 선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펠드맨은 독신으로 지내다가 세상 떠나기 직전에 캐나다 출신의 작곡가인 바바라 몽크(Barbara Monk)와 결혼하였다. 펠드맨은 1987년에 석달여에 걸친 암투병을 한후 향년 61세로 뉴욕주 버팔로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피아노 앞에서 작곡에 몰두하고 있는 모턴 펠드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