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화제의 300편

케루비니의 '로도이스카' - 11

정준극 2012. 12. 4. 08:26

케루비니의 '로도이스카'(Lodoiska)

구원오페라 장르의 초석을 놓은 작품

시몬 마이르, 조아키노 로시니 도 같은 내용의 오페라 작곡

 

루이지 케루비니

 

오페라의 장르에 '구원오페라'(Rescue Opera: Rettungs- oder Befreiungsstuck)라는 것이 있다. 18-19세기에 프랑스와 독일에서 유행하였던 장르이다. 구원오페라는 글자그대로 위기에 처한 사람을 극적으로 구원해 내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고귀한 인간애가 최후의 승리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구원오페라'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구원오페라'는 프랑스 혁명기간 중에 특히 인기를 끌었다. 정치범으로 구속되어 처형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뜻밖의 사태로 극적으로 구원된다는 내용이 대중들의 환호를 받았던 것이다. '구원오페라'의 발판을 놓은 작품이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루이지 케루비니(Luigi Cheribini: 1760-1842)의 '로도이스카'(Lodoiska)이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791년에 파리에서 초연된 오페라이다. 프랑스어 대본은 장 바티스트 루베 드 쿠브레(Jean-Baptise Louvet de Couvrai)의 소설인 Les amours du chevalier de Faublas(포블라의 사랑)를 바탕으로 클로드 프랑수아 피예트 로로(Claude-Francois Fillette-Loraux)가 작성했다. 3막의 '로도이스카'는 Comedie heroique(연애극)의 형태를 취하고 있느나 초기 로망스 오페라의 하나라고 불리고 있다. 물론 케루비니는 기본적으로 고전주의 작곡가이다. 평론가들은 케루비니의 '로도이스카'를 "심리적인 내면을 깊숙히 들여다 볼수 있는 작품이며 아울러 극적인 긴장감과 음악적인 깊이가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케루비니의 '로도이스카'의 한 장면

 

'로도이스카'는 1791년 7월 18일 파리의 테아트르 페이도(Theatre Feydeau: 페이도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대단한 환영을 받아서 초연 이후 200 회에 이르는 공연이 있었다. 이 오페라는 너무나 인기가 있어서 초연 이후 약 30년 만인 1819년에 페이도 극장에서 리바이벌 되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독일의 여러 곳에서 자주 공연되었고 비엔나에서는 1805년에 케루비니가 참석한 중에 무대에 올려졌다. 뉴욕에 처음 소개된 것은 1826년이었고 런던의 첫 공연은 파리에서 초연된지 3년 후인 1794년에 영어 대본으로 번역되어서였다. 로도이스카(Lodoiska: S)는 알타노의 공주이며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 플로레스키(Floreski: T) 백작이다. 그리고 사악한 성주는 두를린스키(Dourlinski: Bar)이다. 무대가 17세기의 폴란드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모두 폴란드인이다.

 

시몬 마이르

 

케루비니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독일 출신의 이탈리아 작곡가인 시몬 마이르(Simon Mayr: 1763-1845)가 이탈리아어 대본으로 '로도이스카'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든 것이 있다. 제목은 La Lodiska(라 로도이스카)라고 했다. 이탈리아어 대본은 프란체스코 고넬라 데 페라리(Francesco Gonella De Ferrari)라는 사람이 썼다. '라 로도이스카'는 마이르의 두번째 오페라로서 1796년 1월 26일 베니스의 라 페니체(La Fenice)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라 페니체에서의 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그래서 그 시즌에만 13회의 공연이 있었다. 이 오페라의 스토리와 음악은 로렌초 판치에리(Lorenzo Panzieri)라는 사람이 발레 작품으로 안무했다. 제목은 역시 '라 로도이스카'라고 했으며 1797년 1월에 라 페니체에서 초연되었다. '라 로도이스카'는 1798년 11월에 리스본의 테아트로 레알 데 산 카를로스(Teatro Real de Sao Carlos)에서 스페인의 칼로타 호아키나 공주의 명명일을 기념하여 공연되었다.

 

마이르는 원래 3막의 '라 로도이스카'를 2막으로 수정하였다. 그렇지만 음악은 오리지널 3막에서보다 더 많이 포함하였다. 새로운 2막의 버전은 1799년 12월 26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마이르의 오페라로서는 라 스칼라에서 처음으로 공연되는 작품이었다. 라 스칼라의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이후 라 스칼라를 비롯하여 밀라노의 다른 오페라 극장들이 마이르에게 작곡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1818년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공연될 때에는 타이틀 롤을 유명한 소프라노로서 나중에 로시니의 부인이 된 이사벨라 콜브란(Isabella Colbran)이 맡았다. '라 로도이스카'는 당시에 대인기였으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 최근 다시 조명을 받게 되었다. 마이르는 비엔나 고전주의와 이탈리아 벨칸토 시기를 연결해준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그는 모차르트를 특히 존경하였다. '라 로도이스카'의 서곡이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의 서곡과 흡사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마이르의 '라 로도이스카'는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를 연상케 한다. 다만, 다른 점은 '후궁...'의 무대가 터키인데 반하여 '라 로도이스카'는 폴란드-타르타르 국경지대라는 것이다.

 

로도이스카(S)는 폴란드의 공주로서 로빈스키(Lovinski)를 사랑한다. 로빈스키(소프라노 카스트라토)는 폴란드의 귀족으로서 시베노(Siveno)라는 가명을 쓰고 나중에 로빈스키 공주를 구원하러 간다. 로도이스카의 아버지인 시게스키(Sigeski: B)는 나라의 정세가 혼란하므로 딸 로도이스카를 오스트로폴의 영주인 볼레슬라오(Boleslao: T)에게 보내 보살핌을 받도록 한다. 음흉하고 포악한 볼레슬라오는 아름다운 로도이스카와 결혼코자 하지만 로도이스카는 단연코 그의 청혼을 거절한다. 얼마후 로빈스키는 로도이스카의 아버지인 시게스키의 부탁을 받고 로도이스카를 데려 오기 위해 볼레슬라오가 있는 성으로 간다. 단, 자기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시베노라는 이름으로 찾아간다. 볼레슬라오는 로도이스카를 돌려 보내기를 거절한다. 그러자 로도이스카의 아버지인 시게스키가 직접 찾아와 볼레슬라오와 대면한다. 포악한 볼레슬라오는 부하들을 시켜 시게스키와 시베노(로빈스키)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다. 볼레슬라오는 이 참에 젊은 연인인 로빈스키와 로도이스카를 함께 처형할 생각이다. 그때 타타르의 용맹한 왕자인 기스카노(Giskano: B)가 병사들을 이끌고 볼레슬라오의 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모두를 구출한다. 그리고 물론 볼레슬라오는 체포된다. 로빈스키는 전에 기스카노 왕자의 목숨을 구해준 일이 있었다. '구원 오페라'의 전형이다.

 

조아키노 로시니

 

조아키노 로시니의 드라마 세미세리오인 '토르발도와 도를리스카'(Torvaldo e Dorliska)도 케루비니나 마이르의 로도이스카 이야기가 다를바가 없다. 로도이스카 스토리를 오페라로 만든 사람으로는 케루비니와 마이르 이외에도 영국의 스테픈 스토레이스(Stephen Storace: 1762-1796)이 있다. 로시니의 2막 오페라인 '토르발도와 도를리스카'의 이탈리아어 대본은 세자레 스테르비니(Cesare Sterbini)가 썼다. 그는 로시니를 위해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대본을 제공한바 있다. 로시니의 '토르발도와 도를리스카'는 세미세리오이면서도 오페라 부파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부포 역할이 포함되어 있다. 로시니의 '도둑까지'(La gazze ladra)의 경우과 같다. '토르발도와 도를리스카'sms 1815년 12월 26일 로마의 테아트로 발레에서 초연되었다. 그 이후에도 이탈리아의 여러 곳에서 심심찮게 공연되었지만 그렇다고해서 대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토르발도와 도를리스카'에서 도를리스카(S)는 토르발도(T)의 부인으로 등장한다. 이밖에 오드로프 공작(B), 오르몬도(B), 성의 경비병인 조르지오(Bar), 그의 누이동생인 칼로타(MS)등이 나온다.

 

케루비니의 '로도이스카'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