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도빅 알레비(Ludovic Halévy)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대본 대부분 완성
앙리 메일락과 함께 '카르멘' 대본도 작성
루도빅 알레비
루도빅 알레비(Ludovic Halévy)는 1834년 파리에서 태어나서 1908년, 향년 74세로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루도빅 알레비는 주로 오펜바흐에게 오페레타의 대본을 제공한 재능있는 대본가 겸 작가였다. 알레비는 아슈케나지(Ashkenazi) 유태계라고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알레비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기독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하프 아슈케나지라고 할수 있다. 그의 아버지인 레옹 알레비는 프랑스 정부의 공무원이면서 창작활동에 재능이 있어서 산문시, 운문시, 보데밀 대본, 연극 대본, 역사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집필을 하였다. 하지만 성공한 작가는 아니었다. 알레비의 삼촌인 프로멘탈 알레비(Fromental Halévy: 1799-1862)는 유명한 작곡가로서 대표작은 '유태여인'(La Juive)이다. 프로멘탈 알레비은 마지막 오페라인 '노아'(Noe)를 미완성으로 남겨둔채 세상을 떠났다. 오페라 '노아'는 그의 제자이며 사위인 조르즈 비제가 완성했다. 그러므로 루도빅 알레비와 조르즈 비제는 대단히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루도빅 알레비는 당대의 대본가인 앙리 메일락과 함께 비제의 '카르멘'의 대본을 완성했다. 아무튼 루도빅 알레비는 아버지와 삼촌 등의 영향으로 젊은 시절부터 극장과 관련을 맺으며 지냈다.
루도빅 알레비와 엑토르 크레뮤가 공동으로 대본을 쓴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지옥에 간 오르페오'의 한 장면. 뉴욕시티오페라 공연
알레비는 18세 때에 정부 행정관청의 직원으로 들어갔으며 그후 여러 직분을 맡으며 지냈다. 공직자로서 그가 맡았던 마지막 직분은 프랑스 의회에 속한 기구의 고위직이었다. 그로인하여 알레비는 프랑스의 여러 상류층 인사들과 교류를 다지며 지낼수 있었다. 그러면서 알레비는 30세의 청년작가로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결국 그는 젊은 시절에 공직을 사임하고 극작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실상 그는 20대의 젊은 시절에 이미 오펜바흐와 친분을 맺으며 지냈다. 오펜바흐가 샹젤리제에 자기 소유의 작은 극장을 운영하게 되자 오펜바흐와 콤비가 되어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알레비가 20대의 젊은 시절에 오펜바흐의 '바 타 클란'(Ba-ta-clan)의 대본을 쓴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 알레비는 쥘르 세리비르(Jules Servires)라는 필명으로 대본을 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그렇게 젊은 청년인줄을 몰랐다. 알레비의 이름이 처음으로 극장의 프로그램에 나온 것은 1856년 1월 1일이었다. 얼마 후에 알레비가 엑토르 크레뮤(Hector Cremieux)와 공동으로 대본을 쓴 '지옥에 간 오르페오'(Orphée aux enfers)는 공전의 인기를 끌어서 그로부터 알레비의 이름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바 타 클란'의 한 장면. 비엔나 캄머오퍼 공연
당대의 대본가인 앙리 메일락(Henri Meilhac: 1831-1897)과 알레비의 관계는 우연찮게 이루어졌다. 1860년 봄에 알레비는 바리에테극장의 매니저로부터 연극 극본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단, 보데빌 작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던 랑베르 티부(Lambert Thiboust)와 합동으로 써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랑베르 티부가 갑자기 다른 일 때문에 극본을 쓸수 없다고 말했다. 알레비는 어찌할줄을 모르고 당황하였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바리에테극장의 계단에서 앙리 메일락을 만나게 되었다. 앙리 메일락은 루도빅 알레비라는 청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이 잘 되느라고 그랬는지 알레비가 무조건 앙리 메일락에게 대본을 함께 쓰자고 제안하자 앙리 메일락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선뜻 승낙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20년이나 넘게 계속되었다. 사실상 두 사람의 협동으로 덕을 본 것은 파리의 소극장들이었다. 훌륭한 대본들을 그저 어렵지 않게 완성해서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협동으로 나온 대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아름다운 엘렌'(La belle Hélène: 1864), '푸른 수염'(Barbe Bleue: 1866), '게롤슈타인 대공부인'(La Grande-Duchesse de Gérolstein: 1867), '라 페리숄레'(La Périchole: 1868), 그리고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인 '박쥐'의 소스가 되었던 '한 밤중의 만찬'(Le Réveillon) 등이다. 두 사람이 만든 대본들은 주로 당시 사회상을 풍자하는 것이어서 일반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의 무대. 루도빅 알레비와 앙리 메일락이 공동으로 쓴 '한밤중의 만찬'(Le Reveillon)을 바탕으로 '박쥐'의 대본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풍자'에 대한 대중들의 기호가 달라졌다. 대중들은 '풍자'(패러디)나 익살(화스)보다는 사실주의적인 내용을 선호하였다. 알레비와 메일락의 '풍자' 일변도 대본은 점차 사양길에 접어 들었다. 오페라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패러디를 듣는 것보다는 노래를 듣고자 했다. 이 기간에 두 사람이 합심하여 나온 대본 중의 하나가 비제를 위한 '카르멘'이었다. 하지만 '카르멘'의 대본은 두 사람에게는 빅 딜이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가 쓴 대본일 뿐이었다. 알레비와 메일락의 특징은 아무래도 파리인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린 것이었다. 예를 들면 Les Sonnettes(초인종), Madame attend Monsieur(마담이 무슈를 기다리다), Toto chez Tata(타타의 집에 있는 토토), Le Roi Candaule(칸다울레 왕)등은 파리인의 생활을 그린 것으로 두 사람의 전성기를 말해 주는 대본들이다. 알레비의 마지막 소설은 Kari Kari(카리 카리)로서 1892년에 나왔다. 알레비는 1908년 5월 7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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