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바그너 소프라노와 알토

정준극 2013. 1. 25. 19:10

바그너 소프라노(Wagnerian sopranos)와 바그너 알토(Wagnerian altos)

금세기의 위대한 헬덴 소프라노와 알토 

 

소프라노 중에서 드라마틱 소프라노(또는 소프라노 로부스토: Soprano robusto)는 강력하고 풍부하며 감정이 담겨있는 음성을 말한다. 드라마틱 소프라노는 풀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뚫고 나갈만한 소리를 낼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반 소프라노에 비하여 낮은 소리를 더 낼수 있어야 한다. 음역의 폭이 넓어야 한다는 것이다.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음역은 대략 중간 C(C4)로부터 하이 D(D6)까지라고 보면 된다. 드라마틱 소프라노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특별히 바그너 소프라노라고 부른다. 음량이 대단히 풍부하여서 예를 들어 8관 편성의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소리까지도 뚫고 나갈수 있는 소프라노를 말한다. 바그너 오페라의 주역으로서 적합한 소프라노이다. 바그너 소프라노는 영웅 소프라노(Helden soprano)라고도 부른다. 영웅과 같은 빛나는 음성을 내기 때문이다. 금세기를 빛낸 위대한 바그너 소프라노로서는 어떤 성악가들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대표적인 바그너 소프라노 몇명만 소개한다.

 

●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

 

마리아 칼라스

 

세계적으로 위대한 바그너 소프라노를 분류할 때에는 대체로 마리아 칼라스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칼라스라고 하면 '노르마'나 '청교도'와 같은 이탈리아 벨 칸토 오페라의 대표적인 소프라노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 실로 칼라스는 빈센초 벨리니 또는 게타노 도니체티의 잘 알려지지 않은 벨 칸토 오페라들을 리바이벌 했던 소프라노로서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칼라스의 레퍼토리는 바그너와도 깊은 관계에 있다. 칼라스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뛰어나게 해석했던 성악가 중의 하나였다. 1947년부터 1950년의 기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보여준 위업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1949년의 '파르지팔'도 뛰어난 것이었다. 1949년에는 또한 '발퀴레'에서 브륀힐데를 여섯 번이나 맡았던 일이 있다. 칼라스가 벨리니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역할을 맡게 된 데에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걸려 있다. 칼라스는 1949년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발퀴레'에 출연하고 있었다. 칼라스는 며칠 후에 같은 무대에서 공연될 '청교도'에 관심이 많아서 잠시 쉬는 시간에 '청교도'의 스코어를 보며 엘비라의 아리아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휘자 툴리오 세라핀의 부인이 지나가다가 보았다. 세라핀의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며칠후 공연되는 '청교도'의 프리마 돈나가 갑자기 아프기 때문에 공연에 큰 어려움에 처하여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소프라노 마르게리타 카로시오가 엘비라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세라핀의 부인은 급히 남편을 불러 무대 뒤의 한쪽 구석에서 쉬는 시간에 '청교도'를 연습하고 있는 칼라스를 만나보라고 했다. 툴리오 세라핀은 칼라스에게 어떤 연유로 '발퀴레'의 공연 중에 '청교도'의 스코어를 연습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칼라스는 언젠가 '청교도'의 엘비라를 맡을 것으로 생각해서 연습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칼라스는 마르게리타 카로시오의 대타로서 '청교도'에 전격 기용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칼라스의 첫 '청교도' 무대는 대성공이었다. 그로부터 칼라스는 벨리니와 도니체티의 벨 칸토 오페라의 최고 소프라노로서 새로운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후로 칼라스는 바그너를 다시 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칼라스 초기에 바그너에 출연했던 음반이 남아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칼라스가 부른 바그너는 독일어가 아닌 이탈리아로 취입되었다.

 

● 제인 이글렌(Jane Eaglen: 1960-)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제인 이글렌

 

영국의 링컨이란 곳에서 태어난 제인 이글렌은 다섯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하여 16세까지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이글렌의 피아노 선생이 이글렌에게 피아노보다는 성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이글렌은 런던의 길드홀학교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성악을 공부하려고 했으나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입학하지 못했다. 이글렌은 만체스터에 있는 왕립음악학교로 가서 조셉 워드(Joseph Ward) 교수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오디션을 보았다. 워드교수는 이글렌의 잠재적인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제자로서 받아 들였다. 이글렌은 24세가 되던 해에 잉글리쉬 내셔널 오페라(ENO)의 단원이 되었다. 이글렌은 ENO에서 '마술피리'의 첫번째 부인,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하녀인 베르타와 같은 단역을 맡으며 지냈다. 그러다가 그의 실력을 높이 인정한 음악감독이 그를 '일 트로바토레'에서 레오노라를 맡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서 산뚜짜를 맡았다. 이글렌의 산뚜짜는 관중들의 열광적인 박수를 받은 것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글렌은 1996년에 시카고 리릭 오페라가 공연한 '링 사이클' 전편에서 브륀힐데를 맡아 그야말로 놀라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글렌은 브륀힐데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글렌은 1999년 여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브륀힐데를 다시 맡았고 이어 2000년 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브륀힐데를 맡아 이제는 세계적인 바그너 소프라노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이글렌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도 눈부신 역할을 보여주었다. 이글렌은 2013년 현재 시애틀에서 살고 있다.

 

●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Kirsten Flagstad: 1895-1962)

 

'신들의 황혼'에서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

 

노르웨이의 하마르(Hamar)에서 태어났으며 18세에 오슬로에서 처음으로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이후 플라그슈타드는 노르웨이의 여러 도시 뿐만 아니라 스웨덴, 덴마크 등에서 오페라와 오페레타에 출연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그러다가 1933년에 바이로이트에서 출연할 기회를 가졌다. 그때에는 단역이었지만 어쨋든 플라그슈타드의 빛나는 음성은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플라그슈타드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초청을 받았다. 플라그슈타드는 1935년에 메트로폴리탄에서 '발퀴레'의 지글린데를 맡아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플라그슈타드는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기 전까지 당대에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바그너 소프라노로서 명성을 얻으며 군림하였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에서만 이졸데를 73회나 불렀다. 아직까지 그만한 기록은 없다. 73회의 이졸데 중에서 63회는 테너 로리츠 멜키오르(Lauritz Melchior)와 함께 부른 것이었다. 당시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시즌마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 방송을 통해서 오페라를 소개하였다. 플라그슈타드와 멜키오르는 무려 7개 시즌동안 함께 출연하여 바그너의 오페라를 소개하였다. 플라그슈타드는 1941년에 전쟁의 기운이 짙어지자 가족과 함께 지내기 위해 고국인 노르웨이로 돌아가고 사실상 오페라 무대에서의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팬들이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전쟁후 플라그슈타드는 다시 미국을 방문하여 1949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발퀴레'를 불러 훌륭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때 그는 54세였다. 그런데 그때 플라그슈타드가 전쟁 중에 나치에 협조했다는 의혹이 나왔다. 메트로폴리탄은 그런 의혹이 있는 플라그슈타드를 초청하지 않고 있다가 1951년에야 겨우 다시 무대로 불렀다. 얼마후 플라그슈타드는 정말로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하였고 노르웨이로 돌아가서 1959년에 노르웨이국립오페라의 단장이 되었다. 플라그슈타드는 1962년 오슬로에서 세상을 떠났다.

 

● 크리스타 루드비히(Christa Ludwig: 1928-)

 

이졸데 역의 크리스타 루드비히

 

크리스타 루드비히는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널리 알려진 테너 안톤 루드비히였으며 어머니는 콘트랄토로 유명한 에우게니 베살라 루드비히(Eugenie Besalla-Ludwig)였다. 크리스타 루드비히는 어머니로부터 폭넓은 성악 레슨을 받았다. 루드비히는 18세 때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박쥐'의 오를로브스키로서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여 1952년까지 그곳에서 활동했다. 그후 1955년부터는 비엔나의 슈타츠오퍼에 전속되어 무려 30년 이상을 지냈다. 루드비히는 1954년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케루비노를 맡은 이래 1981년까지 잘츠부르크를 빛나게 만들었다. 루드비히의 미국 데뷔는 1959년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 도라벨라를 맡은 것이었다. 이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초청을 받아 1959년부터 1990년까지 메트로폴리탄의 프리마 돈나로서 대단한 명성을 얻으며 지냈다. 루드비히가 메트로폴리탄에서 맡았던 역할들은 염색장이의 부인, 디도, 오르트루트, 쿤드리, 마샬린, 샬로테, 발트라우테, 프리카, 클리템네스트라 등이었다. 루드비히는 1968년에 코벤트 가든에 모습을 보였다. 암네리스(아이다)로였다. 루드비히는 몇년후에 카르멘으로서 다시 코벤트 가든을 찾았다. 루드비히는 함부르크, 샌프란시스코, 뮌헨, 라 스칼라, 파리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루드비히의 역할은 주로 메조소프라노였지만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역할도 포함하였다. 크리스타 루드비히는 1957에 베이스 바리톤인 발터 베리(Walter Berry)와 결혼하였으나 1971년에 이혼하였다.

 

● 마르타 뫼들(Martha Mödl: 1912-2001)

 

'신들의 황혼'에서 마르타 뫼들

 

마르타 뫼들은 전후에 독일 오페라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성악가로서 찬사를 받은 인물이다. 뫼들은 오페라 성악가로서 어느 누구보다도 오랜 경력을 엔조이한 사람이다. 1942년에 시작하여 거의 50년을 무대를 빛나게 했다. 뫼들은 1950년대에 바이로이트에서 맡았던 역할들로서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다. 뫼들은 바이로이트에서 브륀힐데, 이졸데, 무엇보다도 쿤드리로서 강력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뫼들은 바그너의 새로운 바이로이트 스타일로서 가장 이상적인 성악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뫼들은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는 역할을 하여 찬사를 받았다. 아마 당시에 그런 역량이 있는 성악가는 라이발이라고 할수 있는 아스트리드 바르나이(Astrid Varnay) 뿌닝었을 것이다. 뫼들은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나서 28세가 되기까지 경리사원과 비서로서 일하였다. 그러나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주위의 권유를 받아 들여 뉘른베르크 음악원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성악공부를 하였다. 뫼들이 처음 맡았던 오페라의 역할은 1942년 독일의 렘샤이트(Remscheid)에서 헨젤(헨젤과 그레텔)과 아주체나(일 트로바토레)였다. 곧이어 바그너의 역할들이 뒤따랐다. 함부르크에서 비너스(탄호이저)를 맡았고 1950년에는 라 스칼라에서 푸르트뱅글러의 지휘아래 쿤드리(파르지팔)를 맡아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뫼들이 바이로이트와 인연을 맺게 된것은 1951년 바이로이트의 재개관 때에 빌란트 바그너의 감독으로 쿤드리를 맡은 것이었다. 뫼들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쿤드리이지만 1950년대에는 이졸데와 브륀힐데를 맡았던 모습도 볼수 있었다. 1955년에 슈투트가르트 오페라단의 런던 공연에서 특히 그러했다. 뫼들의 음성은 레코드로서 영원히 남아 있다. 1951년 바이로이트에서 크나퍼츠부슈의 지휘로 쿤드리를 부른 것과 1952년 폰 카라얀의 지휘로 이졸데를 부른 것, 그리고 푸르트뱅글러가 EMI를 위해 '링 사이클' 전편을 녹음한 것에서 브륀힐데를 맡은 것이다.

 

● 비르기트 닐슨(Birgit Nilsson: 1918-2005)

 

'탄호이저'에서의 비르기트 닐쓴

 

비르기트 닐슨은 바그너 소프라노의 대명사이다. 금세기에 가장 위대한 바그너 소프라노로서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닐슨은 스웨덴 출신이다. 바그너 소프라노로서 당대에서 또 하나의 가장 위대한 인물인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는 노르웨이 사람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바그너 소프라노들이 독일에서가 아니라 스캔디나비아에서 나왔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하기야 발퀴레도 북구의 신화에 나오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비르기트 닐슨은 1918년 스웨덴의 배스트라 카룹스(Västra Karups)에서 태어났다. 닐슨은 스톡홀름의 왕립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했으며 1946년에 스톡홀름의 왕립오페라극장(Operan)에서 아가테(마탄의 사수)로서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였다. 1951년에는 글린드본 음악제에서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에서 엘렉트라를 맡아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어 1954-55년 시즌에 뮌헨에서 링 사이클의 브륀힐데를 모두 맡아 선천적인 재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닐슨의 바이로이트 데뷔는 1959년 엘자(로엔그린)로였다. 이후 닐슨은 1970년까지 바이로이트 축제에 고정적으로 출연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미국 데뷔는 1956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였다. 이어 메트로폴리탄에 이졸데로서 데뷔하여 바야흐로 국제적인 최고의 오페라 스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닐슨은 바그너 오페라를 많이 취입하였다. 주로 게오르그 솔티의 지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닐슨이 남긴 레코딩으로는 엘리자베트(탄호이저), 레오노레(휘델리오), 투란도트, 엘렉트라, 살로메 등이 있다. 닐슨은 1984년 무대에서 은퇴하여 스웨덴에서 지내다가 2005년 12월 25일 향년 87세로서 크리스마스 날에 세상을 떠났다.

 

● 어네스틴 슈만 하인크(Ernestine Schumann-Heink: 1861-1936)

 

'라인의 황금'에서 어네스틴 슈만 하인크

 

어네스틴 슈만 하인크는 누구도 따를수 없었던 금세기에 가장 위대한 바그너 콘트랄토였다. 어네스틴은 1961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여 있던 보헤미아의 프라하 부근 리벤(Lieben: Liben)에서 태어났다. 어네스틴은 진취적이며 도전적인 성격의 소요자였다. 그러면서도 강한 의지의 여자였다. 아마도 그런 성격은 기병대장교였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 아닌가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어네스틴은 부드럽고 친절한 성격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마 그것은 음악을 사랑하였던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성격일 것이다. 어네스틴은 어머니로부터 성악 레슨을 받았다. 한때 이탈리아 북부에 가서 살았던 어네스틴은 여러 선생으로부터 음악공부를 하였는데 예를 들면 당대의 성악교사인 조반니 바티스타 람페르티(Giovanni Battista Lamperti)도 어네스틴을 가르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어네스틴은 1878년, 불과 17세 때에 드레스덴에서 아주체나(일 트로바토레)를 맡아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에른스트 하인크와 결혼한 그는 함부르크에 정착하여 1897년까지 지냈다. 어네스틴은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구스타브 말러의 지휘아래 에르다, 프리카, 발트라우테, 브랑게네 등을 맡아 찬사를 받았다. 어네스틴은 1893년에 에른스트 하인크와 이혼하고 배우인 파울 슈만(Paul Schumann)과 결혼하였다. 이후 1896년부터 1914년까지 바이로이트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 코지마 바그너는 어네스틴의 예술성을 대단히 존경하고 찬미하였다. 어네스틴은 1898년부터 1903년까지 메트로폴리탄의 정규 멤버로서 활약하였다. 어네스틴 슈만 하인크는 일곱 자녀를 두었다. 그러면서도 오페라 무대에 소홀함이 없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성실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아닐수 없다. 어네스틴은 미국에서 전국순회 공연을 시도하였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어네스틴의 전국순회 공연은 오늘날까지도 전설로서 남아 있다. 어네스틴은 생전에 무려 150 역할을 소화하였다. 아마 오페라 성악가 중에서 이만한 역할을 소화한 사람은 어네스틴이 유일할 것이다. 그의 영국과 미국 무대에서의 역할은 주로 바그너의 작품에서였다. 어네스틴 슈만 하인크의 마지막 오페라 출연은 1932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였다. 에르다(지그프리트)를 맡은 것이었다. 에르다는 아마 그의 가장 대표적인 역할일 것이다. 어네스틴은 할리우드에서 백혈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 헬렌 트라우벨(Helen Traubel: 1899-1972)

 

'발퀴레'에서의 콘트랄헬렌 트라우벨

 

세인트 루이스의 독일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헬렌 트라우벨은 1923년, 24세 때에 세인트 루이스 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음악계에 데뷔하였고 이후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다가 마침내 메트로폴리탄에 입단하게 되어 오페라 성악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트라우벨은 비너스(탄호이저)의 역할을 제안받았지만 지글린데(발퀴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비너스를 거절하였다. 메트로폴리탄은 트라우벨에게 그러면 그만두라고 하였지만 트라우벨의 고집이 하도 세어서 결국 1939년에 지글린데를 맡도록 했다. 상대역은 당대의 소프라노인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였다. 2차 대전 중에 메트로폴리탄에 있던 독일계 성악가들은 대부분 여러 이유로서 출연하지 않았다. 트라우벨은 그 기간 동안에 거의 모든 바그너 레퍼토리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트라우벨은 메트로폴리탄에서 176회의 공연에 출연했다. 그중에서 168회가 바그너의 작품이었다. 트라우벨은 메트로폴리탄의 새로운 음악감독으로서 루돌프 빙이 부임하자 그와 의견이 맞이 않아 무대를 떠나야 했다. 트라우벨은 나이트 클럽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주장이었고 루돌프 빙은 메트로폴리탄의 품위를 위해서 그건 하용할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트라우벨은 메트로폴리탄과 재계약을 하지 못했고 1953년 이졸데로서 마지막 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곧이어 헬렌 트라우벨의 이름이 적힌 포스터가 뉴욕의 코파카바나 클럽, 라스 베가스의 사하라 호텔 틀럽, 마이아미의 클로버 클럽에 걸리기 시작했다. 트라우벨은 TV 쇼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였다. 주로 그라우초 막스(Groucho Marx), 레드 스켈튼(Red Skelton), 제리 루이스(Jerry Lewis)의 쇼에 출연하였다. 트라우벨은 영화에도 출연하였으며 로저스와 햄머슈타인의 히트 뮤지컬인 Pipe Dream 에도 모습을 보였다. 트라우벨은 무대에서 은퇴하여 산타 모니카에서 지내다가 그곳에서 1972년,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 아스트리드 바르나이(Astrid Varnay: 1918-2006)

 

브륀힐데 역의 아스트리드 바르나이

 

20세기 중반에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을 받은 바그너 소프라노인 아스트리드 바르나이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헝가리 출신의 성악가들이었다. 바르나이는 어린 시절을 노르웨이에서 보냈다. 그후 부모를 따라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갔고 마지막으로 미국에 정착하였다. 바르나이는 1941년 12월 6일에 지글린데로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혜성과 같이 데뷔하였다. 그때 지글린데는 당대의 소프라노인 로테 레만(Lotte Lehmann)이 맡기로 되어 있었지만 갑자기 아픈 바람에 대타로서 바르나이가 선정되어 무대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바르나이는 그 이전에도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가벼운 소프라노의 역할들을 맡은 일이 있지만  지글린데를 맡아 무거운 소프라노의 역할도 훌륭하게 해 낼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날의 공연은 전국에 방송되었다. 바르나이를 들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바르나이야 말로 바그너의 큰 역할을 맡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글린데를 맡았던 날로부터 엿새 후에 이번에는 브륀힐데를 맡게 되었다.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 소프라노로서는 가장 큰 역할이었다. 그후 바르나이는 바이로이트의 중심인물로서 무려 17개 시즌동안 출연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바르나이는 1951년 바이로이트 극장이 재개관될 때 빌란트 바그너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바그너 소프라노 중의 하나였다. 바르나이의 전설적인 음성은 1951년 한스 크나퍼츠부슈가 지휘한 '신들의 황혼'에서 브륀힐데를 맡아 취입한 음반에 남아 있다. 가장 위대한 브륀힐데라는 찬사를 받은 것이었다.

 

● 데보라 보이그트(Deborah Voigt: 1964-)

 

'발퀴레'에서의 데보라 보이그트

 

데보라 보이그트는 시카고 부근에서 태어났으며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자랐다. 1988년 파바로티 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 1990년에 차이코브스키 경연대회에서 골드 메달을 받은 그는 1991년에 메트로폴리탄에서 아멜리아(가면무도회)로서 데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과 놀라움을 주었다. 이후 보이그트의 빛나는 음성은 미국 뿐만 아니라 유럽의 주요 극장에서 들을수 있게 되었다. 근년에 이르러 보이그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바그너의 작품으로서 존재감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제임스 르바인의 지휘로 크리소테미스, 지글린데(플라치도 도밍고의 상대역으로), 엘자(로엔그린)를 맡았으며 코벤트 가든과 바덴 바덴 페스티벌에서는 크리스티안 틸레만의 지휘 아래 '이집트의 헬렌'의 타이틀 롤을, 메트로폴리탄에서 '왕비'(그림자 없는 부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다나에의 사랑'의 타이틀 롤, 그리고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지글린데, 엘리자베트, 비너스, 이졸데를 맡아 한없는 찬사를 받았다.

 

**************** 그밖의 바그너 소프라노들 *******************************************************

 

● 마리아 예리차(Maria Jeritza: 1887-1982)

 

'로엔그린'의 엘자를 맡은 마리아 예리차

 

뛰어난 음성과 미모를 자랑하는 마리아 예리차는 모라비아 출신이다. 모라비아의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현재는 체코공화국에 속해 있는 도시이다. 마리아 예리차는 모라비아 출신이기 때문에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그를 '모라비아의 천둥번개'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단시간에 얻은 명성과 뛰어난 아름다움, 그리고 급격한 성격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예리차는 비엔나의 슈타츠오퍼와 오랜 인연을 맺고 오페라와 오페레타에 출연했다. 1912년부터 1935년까지 20년 이상을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프리마 돈나로 활약했다. 메트로폴리탄과도 오랜 인연이 있다. 1921년부터 1932년까지 10년 이상이나 메트로폴리탄의 무대를 빛나게 했다. 예리차는 1951년에도 메트로폴리탄의 무대를 빛냈었다. 예리차는 23세 때에 올로무츠(Olomouc)에서 '로엔그린'의 엘자를 맡아 오페라에 데뷔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셉 황제가 예리차의 노래를 듣고 당장 비엔나의 제국오페라극장(현재의 슈타츠오퍼)에 초청하여 계약을 맺도록 지시하였다. 예리차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빛나는 활약을 했다.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예리차는 킨츨의 오페라 Dere Kuhreigen(1911)에서 블랑슈플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Ariadne auf Naxos(1912)에서 아리아드네, 역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Die Frau ohne Schatten(1919)에서 엠프레스의 이미지들을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엠프레스의 역할은 1921년 11월 메트로폴리탄에서의 데뷔 역할이기도 했다.

 

1926년 11월 16일, 예리차는 푸치니의 '투란도트'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다. 메트로폴리탄에서였다. 북미에서는 첫 투란도트 공연이었다. 예리차는 메트로폴리탄에서 레오스 야나체크의 Jenufa(1924), 볼프 페라리의 '성모의 보석'(I gioielli della Madonna: 1925), 코른골트의 Violanta(1927),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이집트의 헬렌나'(1928), 프란츠 폰 주페의 '보카치오'(1931)과 '돈나 화니타'(1932)의 타이틀 롤, 또는 리딩 소프라노의 역할을 창조하였다. 예리차는 비엔나에서 어떤 사람과 결혼하여 2년을 지내다가 이혼하고 오스트리아의 귀족과 결혼하였으나 두번째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세번째로 할리우드의 대재벌인 윈프리드 쉬언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였으나 그도 1945년에 세상을 떠났다. 예리차는 1948년에 뉴저지의 기업과인 어빙 시어리라는 사람과 네번째로 결혼하여 뉴저지의 뉴아크 부근에 있는 포레스트 힐의 저택에서 살았다. 예리차는 1982년 94세를 일기로 뉴저지의 오렌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 에미 데스틴(Emmy Destinn: 1878-1930)

 

'탄호이저'에서의 에미 데스틴

 

뛰어난 스핀토 음성의 에미 데스틴은 1878년 2월 26일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곳이었다. 데스틴은 처음에 바이올리니스타 되고자 했다. 그러다가 10대의 소녀일 때에 데스틴의 풍부한 음성에 감동한 사람들이 성악가가 되라고 권유하여 성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에밀레 파블리나 키틀로바였다. 데스틴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것은 13세 부터 성악을 가르쳐준 마리 폰 드레거 뢰베 데스틴(Marie von Dreger Löwe-Destinn)을 존경하여서였다. 데스틴은 1898년 7월 베를린 궁정오페라에서 산뚜짜(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데뷔하였다. 데스틴의 존재는 너무나 뚜렷하여서 베를린 궁정오페라의 감독은 그 자리에서 데스틴과 계약을 맺었다. 그때 데스틴은 겨우 19세였다. 그러나 데스틴의 놀라운 음성과 뛰어난 연기력은 베를린 사람들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데스틴은 베를린에서 1909년까지 활동하였다. 데스틴은 54편의 오페라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중에는 12편의 초연이 포함되어 있다. 초연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1906년 12월의 살로메(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것이었다.

 

데스틴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01년 바이로이트에 초청되어 젠타(방랑하는 화란인)을 맡은 것으로부터였다. 사람들은 데스틴을 신비한 존재라고 불렀다. 런던 데뷔는 1904년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돈나 안나(돈 조반니)를 맡은 것이었다. '나비부인'의 런던 초연에서는 카루소와 함께 출연했다. 메트로폴리탄 데뷔는 1908년에 이루어졌다. 아이다로였다.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2년후에는 메트로폴리탄에서 '황금서부의 아가씨'(푸치니)의 초연에서 미니를 맡아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상대역은 역시 카루소였으며 토스카니니의 지휘였다. 데스틴은 카르멘과 같은 프랑스 오페라, 아이다 또는 나비부인과 같은 이탈리아 오페라에 적합하였지만 역시 그의 폭넓은 스핀토 음성은 바그너의 대형 주역에 더 적합하였다. 데스틴의 경력은 1차 대전의 발발로 일대 전환점을 마지하게 되었다. 데스틴은 1914년 전쟁이 터지자 조국인 체코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제국은 데스틴이 체코 지하저항세력과 연통했다는 이유로 데스틴의 여권을 무효화했다. 데스틴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의 저택에서 연금되다시피하며 지내야 했다. 전쟁이 끝난후 데스틴은 1919년 뉴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예전과 같지 않았고 더구나 메트로폴리탄의 무대는 신예 성악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데스틴은 다시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갔다. 1926년, 데스틴은 무대에서 은퇴하였고 4년 후인 1930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에미 데스틴은 재능있는 예술가였다. 그는 위대한 성악가로서 뿐만 아니라 시인, 작가, 극작가로서도 재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물론 성악가로서 그의 이름은 영원히 전해 내려오고 있다.

 

● 헬레네 빌트브룬(Helene Wildbrunn: 1882-1972)

 

브륀힐데의 헬레네 빌트브룬

 

비엔나에서 태어난 헬레네 빌트브룬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바그너 소프라노 중의 하나이다. 그의 음성은 폭이 넓어서 고음과 저음을 완벽하게 소화한다. 그의 음성은 드라마틱하며 창조적이다. 그의 노래 스타일은 센스가 있다. 빌트브룬은 1907년 도르트문트 시립극장에서 콘트랄토로서 데뷔하였다. 이후 그는 콘트랄토와 메조소프라노의 역할을 맡아하면서 레퍼토리를 넓혔다. 그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슈투트가르트 궁정오페라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1919년부터 1925년까지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활동했고 1925년부터 1932년까지는 베를린 시립오페라에 출연했다. 이와 함께 1919년부터 1932년까지 비엔나의 슈타츠오퍼에 출연했다. 1932년부터 1950년까지는 오페라보다는 콘서트에 출연했고 비엔나음악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빌트브룬은 도르트문트에서 활동할 때에 한 시즌에 23개의 각각 다른 역할을 소화할 정도로 역량이 뛰어났다. 1913년 시즌에 링 사이클의 에르다, 프리카, 그리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브랑개네를 맡았던 것은 그의 명성을 굳건하게 해 준 것이었다. 데스틴은 동료 성악가인 칼 빌트브룬과 결혼하고 슈투트가르트로 자리를 옮겨 정착했다. 데스틴은 이곳에서 소프라노로서 레치아(오베론), 아멜리아(가면무도회), 레오노레(일 트로바토레), 브륀힐데(지그프리트와 신들의 황혼), 발렌틴(위그노), 쿤드리, 마샬린(장미의 기사)를 맡아 그의 폭넓은 재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데스틴은 1972년, 향년 90세로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데스틴은 비엔나의 노이슈티프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 로테 레만(Lotte Lehmann: 1888-1976) 

 

전설적인 바그너 소프라노인 로테 레만. 지글린데.

 

샬로테 '로테' 레만(Charlotte 'Lotte' Lehmann)은 특별히 독일 오페라의 해석에 뛰어난 전설적인 독일의 소프라노이다. 로테 레만은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베토벤, 그리고 푸치니, 모차르트, 마스네의 오페라에서 잊지 못할 연주를 보여주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역할은 '장미의 기사'에서 마샬린, '발퀴레'에서 지글린데, 그리고 '휘델리오'에서 타이틀 롤이었다. 로테 레만은 오랜 경력을 통해 약 5백회의 레코딩 기록을 갖고 있다. 그의 레코딩 중에서 독일 가곡은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로테 레만은 브란덴부르크 지방의 페를레버그(Perleberg)에서 태어났다. 베를린에서 성악공부를 한 그는 1910년 함부르크 오페라에서 로엔그린으로 데뷔하였다. 4년후인 1914년에는 비엔나 궁정오페라(현재의 슈타츠오퍼)의 초청으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에바로 출연할 만큼 인정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로테 레만은 1916년에 비엔나 궁정오페라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이후 그는 엘리자베트(탄호이저), 엘자(로엔그린) 등으로 비엔나 궁정오페라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사랑을 받는 스타가 되었다. 로테 레만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들의 초연에 출연하여 주인공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예를 들면 1916년 '낙소스의 아리아드네'에서 작곡가, 1919년 '그림자 없는 부인'에서 염색장이의 부인, 1924년 '인터메쪼'에서 크리스티네, 1933년 '아라벨라'에서 타이틀 롤 등이다.

 

비엔나 궁정오페라에서 로테 레만의 푸치니 역할은 토스카, 마농 레스꼬, 나비부인, 수녀 안젤리카, 투란도트, 미미, 조르제타(외투) 등이다. 로테 레만은 비엔나 궁정오페라에 21년 동안 활동하면서 50개 이상의 각각 다른 역할을 맡아 했다. 로테 레만이 맡았던 다른 역할들은 마리/마리에타(죽음의 도시), 알레비의 '유태여인'의 타이틀 롤, 마스네의 '마농', 마스네의 '베르테르'의 샬로테, 구노의 '파우스트'의 마르게리트, 차이코브스키의 '유진 오네긴'의 타티아나 등이다. 로테 레만은 1926년부터 1937년까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36년에 잘츠부르크에서 '트랩 가족'을 알게 되어 그들에게 대중공연을 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 '트랩 가족'은 나중에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노래가족이다.  

 

로테 레만의 미국 데뷔는 1930년에 시카고에서 '발퀴레'의 지글린데로였다. 미국에서 로테 레만의 역할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에바, '로엔그린'에서 엘자, '탄호이저'에서 엘리자베트 등이었다. '휘델리오'에서 로테 레만의 레오노레 역할은 모든 사람에 뛰어나는 것이었다. 로테 레만은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직전에 극적으로 미국으로 건너올수 있었다. 로테 레만이 입양한 아이들의 생모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위해 미국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로테 레만은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샌프란시스코와 메트로폴리탄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그후 로테 레만은 콘서트에 열중하였으나 그것도 1951년에 은퇴하고 캘리포니아의 산타 바바라에 있는 서부음악원(Music Academy of the West)에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로테 레만은 1976년 향년 88세로 산타 바바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비엔나의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안장되었다.

 

● 멜라니 쿠르트(Melanie Kurt: 1880-1941)

 

멜라니 쿠르트

 

멜라니 쿠르트는 로테 레만처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00년대 초반에 메트로폴리탄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바그너 소프라노이다. 쿠르트는 1880년 비엔나에서 태어나서 1941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쿠르트는 처음에 비엔나에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피아노를 공부했으나 성악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성악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쿠르트는 성악을 더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이곳에서 위대한 소프라노인 릴리 레만의 언니인 마리 레만으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쿠르트가 오페라 성악가로서 처음 데뷔한 것은 1902년, 22세 때에 독일의 뤼베크에서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를 부른 것이었다. 그후 한두해 동안 라이프치히 오페라에 소속되었다가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 이어 도이체 오퍼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쿠르트는 베를린에 베이스를 두고 있으면서 국제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10년 이래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역시 1910년부터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축제(Mozart-Fest:  나중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됨)에 참가하여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어 밀라노의 라 스칼라, 비엔나 슈타츠오퍼, 드레스덴 슈타츠오퍼, 바바리아 슈타츠오퍼에서도 모습을 보였다.

 

쿠르트의 경력이 정상에 오른 것은 1914년 메트로폴리탄에서 올리브 프렘스타드(Olive Fremstad)의 뒤를 이어 바그너 오페라에 출연하기 시작한 것으로부터 였다. 쿠르트는 3년 동안 메트로폴리탄을 대표하는 바그너 소프라노로서 활동하면서 이졸데를 거의 50회나 맡아했다. 이밖에도 그는 베르디의 역할들(아이다, 아멜리아 등), 베토벤의 휘델리오, 모차르트의 파미나(마술피리), 돈나 안나, 알레비의 '유태여인'에서 라헬, '장미의 기사'의 마샬린, 그리고 글룩과 헨델의 역할까지 맡아했다. 그러던 중 1917년에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키로 하자 독일 오페라의 공연이 사실상 금지되어 더 이상 출연하지 못하게 되었다. 쿠르트는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서 지내다가 전쟁이 끝난 후인 1919년에 독일로 돌아갔다. 독일로 돌아온 쿠르트는 라이프치히, 슈투트가르트, 드레스덴, 비엔나, 그리고 당시 유명했던 초포트(Zoppot)의 바그너 페스티벌에 출연했고 이어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에 참가하였다. 쿠르트는 1930년 경에 무대에서 은퇴하고 베를린에서 후진들을 양성하며 지내기 시작했다. 쿠르트는 유태계였다. 1933년에 나치가 정권을 잡고 유태인 사냥을 시작하자 쿠르트는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쿠르트는 194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뉴욕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냈다. 멜라니 쿠르트는 처음에는 미국에서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고 독일에서는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나치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등 고난의 여정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의 빛나는 음성은 모든 역경을 극복하는 원천이었다. 쿠르트는 하룻밤에 반짝하는 프리마 돈나가 아니었다. 꾸준히 노력하여 명예를 얻은 성실한 성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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