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바그너 테너 - 헬덴 테너

정준극 2013. 1. 28. 09:45

바그너 테너 - 헬덴 테너

Wagnerian Tenor - Helden Tenor

금세기 최고의 바그너 테너들의 면모를 소개한다.

 

 

■ 플라치도 도밍고(Placido Domingo: 1941-)

 

'파르지팔'에서 플라치도 도밍고

 

플라치도 도밍고는 20세기에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 알프레도 크라우스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테너 중의 한 사람이다. 도밍고는 오페라의 어떤 역할이든지 훌륭하게 소화할수 있는 성악가이다. 도밍고는 마드리드에서 사르수엘라(스페인 스타일의 오페레타) 배우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다. 아마 도밍고의 오페라적 재능은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것일 것이다. 그는 여덟살 때에 부모를 따라 멕시코로 갔으며 멕시코시티음악원에서 성악, 피아노, 지휘를 공부했다. 그래서 혹자는 도밍고를 멕시코의 테너라고 주장하지만 오리지널은 스페인이다. 도밍고는 멕시코시티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로서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였다. 그후 2년 반동안은 이스라엘국립오페라에 전속되어 12개의 역할로서 280회의 공연을 가졌다. 1966년에는 뉴욕시티 오페라에서 알베르토 지나스테라의 '돈 로드리고'의 타이틀 롤로서 미국 데뷔를 장식하였고 1968년에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아리아드네 르쿠브러'의 마우리치오로서 메트로폴리탄에 입성하였다. 이후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서 1970년대에는 세계 최고의 오페라 테너로서 손색없는 위치를 차지하였다. 도밍고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오페라를 정복하고나서 바그너에 집중하였다. 도밍고는 로엔그린과 탄호이저를 불렀고 이어 지그문트와 파르지팔로서 바그너 테너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도밍고는 아직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부르지 않았으나 그는 이미 바그너 테너로서 가장 힘들다는 역할들을 맡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EMI레코드는 도밍고를 내세워 바그너의 오페라 전집을 녹음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금세기에 있어서 도밍고만큼 오페라의 모든 역할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테너는 찾아보기 힘들다. 2012/2013년 시즌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테너가 아닌 바리톤의 역할을 맡아 다시한번 찬란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 벤 헤프너(Ben Heppner: 1956-)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의 벤 헤프너

 

벤 헤프너는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출신이다. 벤 헤프너는 오늘날 가장 인기있는 바그너 테너로서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벤 헤프너는 캐나다의 자랑이다. 아마 마니토바 출신의 데아나 더빈 이후 캐나다가 가장 자랑하는 음악가일 것이다. 헤프너는 브리티시 콜럼비아 음악원을 졸업하고 1979년에 캐나다방송협회가 주관하는 탈렌트 페스티벌에 출연하여 우승을 차지하여 오페라 테너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장 훌륭한 드라마틱 테너로서 인정받고 있는 그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로엔그린'에서부터 베르디의 '오텔로', 베를리오즈의 '이니아스'(트로이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간직하고 있다. 헤프너의 유럽 데뷔는 스톡홀름 왕립오페라극장에서 로엔그린으로였다. 오늘날 그는 메트로폴리탄, 코벤트 가든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비엔나 슈타츠오퍼, 파리 국립오페라, 시카고 리릭 오페라 등에 자주 출연하는 최고의 테너가 되었다. 그가 메트로폴리탄에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발터 폰 슈톨칭을 맡은 것은 역사상 가장 훌륭한 발터라는 평을 들었다. 헤프너의 메트로폴리탄 공연은 모두 마에스트로 제임스 르바인의 지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 지그프리트 예루살렘(Siegfried Jerusalem: 1940-)

 

'파르지팔'의 지그프리트 예루살렘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은 이름부터가 특이하다. 지그프리트는 바그너 오페라의 주인공의 이름이다. 예루살렘은 성지 예루살렘이다. 독일의 오버하우젠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바순(파곳) 연주자였다. 그러다가 세계에서도 뛰어난 당대의 헬덴 테너가 되었다. 바순을 불던 그가 테너가 된 사연은 이렇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집시 남작'의 레코딩이 계획되어 있었다. 그런데 타이틀 롤인 테너 프랑코 보니솔리가 무슨 문제가 있어서 갑자기 레코딩을 할수 없게 되었다.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은 스튜디오에서 다른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예루살렘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오케스트라의 동료들이 그를 프랑코 보니솔리의 대타로서 추천하였다. 지휘자인 쿠르트 아이히호른이 당장 오디션을 가졌다. 지휘자는 예루살렘의 아름답고도 힘찬 음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더구나 예루살렘은 지성적이며 호감을 주는 이미지였다. 예루살렘은 1주일 동안 집시남작을 연습하고 레코딩에 임하였다. 훌륭했다. 예루살렘은 이미 30대에 바순주자가 아니라 테너로서 새로운 음악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로엔그린을 2주만에 배우고 독일 각지 극장을 찾아다니며 오디션을 보았다. 결과, 아헨에서 로엔그린을 부르게 되었고 이후 함부르크, 베를린, 뮌헨, 바이로이트에 출연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메트로폴리탄, 라 스칼에도 진출하였다. 그는 바이로이트, 비엔나, 파리, 함부르크에서 파르지팔을 불렀고 또한 바이로이트에서 트리스탄을 맡았다. 오늘날 그는 헬덴테너의 시기를 뒤로하고 바그너 역할들의 캐랙터테너에 집중하고 있다. '라인의 황금'의 로게는 대표적인 캐랙터테너의 역할이다.

 

■ 로리츠 멜키오르(Lauritz Melchior: 1890-1973)

 

트리스탄의 로리츠 멜키오르

 

로리츠 멜키오르는 덴마크의 국민적 영웅이다. 그의 힘차고도 아름다운 테너 음성은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특히 포르테시모와 피아노시모의 경지를 놀라운 테크닉으로서 보여주어 감동을 주었다. 1930년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트리스탄을 노래한 것은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다. 토스카니니는 멜키오르를 '트리스타니시모'라고 부르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코펜하겐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 집에 세들어 살고 있는 사람이 성악교사라서 어릴 때부터 성악 레슨을 받을수 있었다. 그는 눈이 먼 누이와 함께 오페라 구경을 자주 갔었다. 그는 오페라를 구경하면서 그의 누이가 보이는 반응을 보고 사람의 음성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될수 있는지를 배웠다. 그는 다른 바그너 테너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바리톤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의 첫 오페라 경력은 1912년에 어떤 작은 순회오페라단에서 제르몽을 부른 것이었다. 그러다가 1918년에 코펜하겐 왕립 오페라에서 탄호이저로서 테너로서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코벤트 가든 데뷔는 1924년에 지그문트로서였다. 그해에 그는 바이로이트의 지그프로트 오디션에 합격하여 바그너 테너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바이로이트 데뷔는 파르지팔로서였다. 그는 바이로이트에서 주역을 맡으면서 경력을 쌓아갔다. 1930년, 토스카니니의 트리스탄도 그 때에 맡은 역할이었다. 메트로폴리탄 데뷔는 1926년이었다. 탄호이저였다. 그후 그는 1950년에 이르기까지 메트로폴리탄의 고정 출연자로 활동했다. 루돌프 빙이 메트로폴리탄의 음악총감독으로 부임하자 어쩐 일인지 그는 멜키오르의 재계약을 거부하였다. 멜키오르는 무대에서 은퇴를 결심하였다. 로리츠 멜키오르는 위대한 바그너 테너였다.

 

■ 게르하르트 슈톨체(Gerhard Stolze: 1926-1979)

 

지그프리트의 게르하르트 슈톨체

 

게르하르트 슈톨체는 빌란트 바그너가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를 다시 시작하면서 구성한 성악가 세대에 속한다. 그는 아스트리드 바르나이, 마트타 뫼들, 루드비히 베버, 볼프강 빈트가쎈 등 당대의 빛나는 성악가들과 함께 '새로운 바이로이트'의 중심적인 인물로서 1951년의 파르지팔과 마이스터의 오리지널 제작에 참여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의 독특한 테너 음성과 놀라운 연기력은 그를 1960년대와 60년대에 가장 기억에 남는 캐랙터테너(Charactertenor)로 만들었다. 어떤 평론가는 그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개가 짖는듯하다는 악평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맡은 역할이 살아 있도록 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의 노래를 실제로 들었던 사람들은 그로부터 강력한 인상을 받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은 레코드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게오르그 솔티가 지휘하는 런던/데카 음반에서 미메를 맡아 어찌보면 냉담한 음성을 들려주었던 것은 가장 잊지 못할 것이다. 바그너 이외의 레퍼토리로서 뛰어난 것으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있다. 비르기트 닐슨의 상대역으로 런던에서 역시 게오르그 솔티의 지휘로 레코딩한 것은 뛰어나다.

 

■ 자크 울루스(Jacuques Urlus: 1867-1935)

 

발퀴레에서의 자크 울루스

 

1935년에 자크 울루스가 네덜란드의 노루드위크(Noordwjik)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온 나라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어느 국왕의 죽음보다도 더 절실한 애도를 받았다. 자크 울루스는 그만큼 네덜란드 국민들의 한결같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놀랄만큼 뛰어난 재능과 인품으로 존경을 받은 당대의 테너였다. 자크 울루스는 엑스 라 샤플르(Aix-la-Chapellle)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네덜란드인이었다. 엑스 라 샤플르는 현재의 독일의 아헨(Aachen)이며 네덜란드어로서는 아켄(Aken)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울루스는 청년시절에 인근의 우트레헤트와 틸부르크에서 제철공장 직공으로 일했다. 그러면서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에 마을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다. 1892년, 그가 25세 때에 우연히 네덜란드국립오페라(Dutch National Opera)의 음악감독을 만났다. 울루스는 정규 음악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당장 네덜란드국립오페라의 단원으로 피컵되었고 2년 후에는 팔리아치의 베페를 맡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1988년에 지그프리트 바그너의 초청으로 바이로이트에 가서 바그너의 오페라를 독일어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울루스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네덜란드어로만 불러왔었다. 그러나 울루스는 바이로이트에만 묶여 있을수가 없어서 다른 곳으로 역할을 찾아 떠났다. 그가 바이로이트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것은 1차 대전이 일어나던 해인 1914년이었다. 그로부터 그는 유럽의 주도적인 헬덴테너로서 베를린, 비엔나, 런던에서 모습을 보였다. 그전인 1912년에 그는 메트로폴리탄에서 트리스탄을 맡아 큰 성공을 거둔 일이 있었다. 그가 미국으로 다시 간 것은 1922년이었다. 그가 트리스탄을 마지막으로 맡은 것은 63세일 때로서 바르셀로나의 테아트로 리체오에서였다.

 

■ 욘 비커스(Jon Vickers: 1926-)

 

발퀴레에서의 욘 비커스

               

당대의 바그너 테너였던 욘 비커스는 캐나다의 자랑이었다. 캐나다의 사스카치완 주에 있는 프린스 알버트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비커스는 음악을 좋아했지만 음악가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비즈네스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22세 때에 성악을 하는 친구가 그에게 성악을 해 보라고 설득하였다. 비커스는 토론토의 왕립음악원에서 스칼라쉽을 받아 성악공부를 시작했다. 왕립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캐나다에서 음악활동을 하며 지냈다.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1956년 런던 코벤트 가든의 로열오페라하우스의 데이빗 웹스터경으로부터 오디션을 받은 것이었다. 비커스는 베르디의 '가면무도회'에서 리카르도를 맡아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그후 그는 두가지 중요한 역할을 맡아 세계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사람들'에서 이니아스와 베르디의 '돈 카를로'에서 타이틀 롤이었다. 비커스는 메트로폴리탄에 진출하여 루돌프 빙의 배려를 받았다. 루돌프 빙은 코렐리나 터커와 같은 이탈리아 테너들은 있지만 독일 레퍼토리를 소화할수 있는 테너들은 없는 것을 감안하여 비커스에게 독일 레퍼토리에 집중하도록 권면했다. 그로부터 비커스는 트리스탄, 플로레스탄, 파르지팔, 지그문트 등과 같은 굵직한 독일 테너 역할을 맡으며 메트로폴리탄을 빛냈다. 이와 함께 오텔로, 삼손(헨델과 생생), 피터 그라임스(브리튼)의 역할도 맡아 그의 재능을 높이 보여주었다.

 

■ 라몬 비나이(Ramon Vinay: 1912-1996)

 

탄호이저의 라몬 비나이

 

라몬 비나이는 칠레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칠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비나이의 가족들은 멕시코 시티로 이사갔고 그는 이곳에서 호세 피어슨(Jose Pierson)으로부터 성악레슨을 받았다. 그의 첫 오페라 데뷔는 멕시코 시티에서 도니체티의 '라 화보리타'에서 바리톤 역할인 돈 알폰소였다. 그는 르네 메송(Renee Maison)으로부터 다시 레슨을 받고서 1944년부터 테너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돈 호세, 삼손, 카바라도시, 데그류(푸치니의 마농 레스꼬) 등이었다. 이듬해인 1945년에는 뉴욕으로 진출하여 뉴욕시티센터오페라에서 돈 호세로 데뷔하였다. 그는 뉴욕시티센터오페라에서 1961년까지 고정 멤버로서 출연하였다. 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46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RCA의 오텔로 레코딩에 그를 선정하고부터였다. 그로부터 비커스는 바그너의 헬덴테너로서 서서히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1952년부터 1957년까지 바이로이트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여 트리스탄, 파르지팔, 지그문트, 탄호이저를 불렀다. 그의 아름답고 힘이 있는 음성은 모든 사람들을 매료했다. 1962년에 그는 다시 바리톤으로 돌아와 바이로이트에서 텔라문트(로엔그린)을 불렀다. 그는 1971년 칠레의 산티아고오페라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1974년까지 콘서트에는 출연하였다. 은퇴후 그는 한때 산티아고오페라의 총감독을 맡아 지냈다. 욘 비커스는 1996년 1월 4일 멕시코의 푸에블로에서 세상을 떠났다.

 

■ 볼프강 빈트가쎄(Wolfgang Windgasse: 1914-1974)

 

'신들의 황혼'에서 볼프강 빈트가쎈

 

볼프강 빈트가쎄은 유명한 헬덴테너인 프릿츠 빈트가쎄의 아들이다. 볼프강은 1939년 슈투트가르트 슈타츠오퍼에서 데뷔하여 명실공히 아버지를 이어 세계적인 헬덴테너로서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볼프강은 1951년부터 1970년까지 바이로이트의 정규 멤버로서 활동했다. 그는 바이로이트에서 에릭으로부터 파르지팔에 이르기까지 바그너의 모든 중요한 역할을 두루 맡았다. 그러면서 세계의 주요 오페라극장에서 주로 바그너의 역할을 맡으면서 헬덴테너로서의 명성을 쌓아갔다. 그리하여 2차 대전 이후 세계에서 가장 주용한 헬덴테너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하였다. 그는 바그너의 전체 오페라를 레코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게오르그 솔티경이 지휘하여 레코딩한 링 사이클 전편에서 지그프리트를 맡은 것은 역사에 남는 일이었다. 1966년 바이로이트에서 칼 뵘의 지휘로 비르기트 닐슨과 크리스타 루드비히와 함께 트리스탄을 맡은 것도 레코딩으로 남아 있다. 클래식 레코딩으로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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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그밖의 유명 헬덴테너들

 

■ 알베르트 라이스(Albert Reiss: 독일 1870-1940)

 

 

■ 칼 에르브(Karl Erb: 독일 1877-1958)

 

칼 에르브 

 

■ 에른스트 크라우스(Ernst Krauss: 독일 1863-1941)

 

트리스탄의 에른스트 크라우스

 

■ 요아힘 자틀러(Joachim Sattler: 독일 1769-1945)

 

요아힘 자틀러

 

■ 에릭 슈메데스(Eric Schmedes)

 

'신들의 황혼'에서의 에릭 슈메데스

 

■ 루돌프 버거(Rudolf Berger: 체코 1874-1915)

 

루돌프 버거

 

■ 하인리히 크노테(Heinrich Knote: 독일 1870-1953)

 

'신들의 황혼'에서의 하인리히 크노테 

 

 

 

ü  ä  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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