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바그너 지휘자

정준극 2013. 2. 7. 08:52

바그너 지휘자

 

바그너 작품의 해석에 뛰어났던 전설적인 거장 지휘자들을 소개한다. 위대한 지휘자들의 평생활동을 단 몇 줄의 글로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우선 그분들에 대한 필자의 조사연구가 미흡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역량을 감히 평론한다는 것은 당연히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게다가 본 블로그의 스페이스가 한정되어 있으니 글자그대로 약력으로나마 양해를 구할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본 블로그에서 바그너 지휘자들을 소개하는 취지는 그런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소개 순서는 이름의 알파벳 순서이다.

 

■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

 

아르헨티나 출신의 다니엘 바렌보임

 

다니엘 바렌보임은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계 유태인이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다섯 살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일곱살 때에는 처음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식적인 피아노 콘서트를 가졌다. 바렌보임의 가족은 1952년에 조상들이 살았던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2년후인 1954년 여름, 바렌보임의 부모는 바렌보임의 음악적 재능을 본격 육성하기 위해 그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데려갔다. 바렌보임은 잘츠부르크에서 거장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를 만나 레슨을 받고 지휘자가 되려는 꿈을 키웠다. 그렇다고 당장 지휘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1955년에는 파리에서 나디아 불랑제로부터 화성악을 공부하는 등 기본축적을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바렌보임은 전문 피아니스트로서 1952년에 데뷔하였고 1954년에는 첫 레코딩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작 지휘자로서 데뷔한 것은 1967년이었다. 바렌보임의 지휘는 명쾌하고 철저한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바이로이트 데뷔는 1981년이었다. 바렌보임은 바이로이트에서 1999년까지 지휘를 했다. 바렌보임은 1991년 이래 게오르그 솔티 경의 뒤를 이어 시카고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을 맡았으며 1992년부터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바렌보임은 2001년 7월 7일에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페스티벌에 베를린의 슈타츠카펠레를 이끌고 참가하여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다. 무대 공연이 아니라 콘서트 형식이었다. 연주회가 끝나자 군중들의 항의가 난리도 아니었다. 바그너의 음악은 이스라엘에서 금기사항이었는데 유태계인 바렌보임이 바그너의 음악을 지휘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렌보임을 파치스트로 매도하기도 했다. 유태인들이 바그너 음악을 타부로 여기는 것은 히틀러가 바그너가 쓴 반유태주의 글에 영감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바렌보임은 그가 바그너의 음악을 지휘한 것은 유태인들의 바그너에 대한 타부를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음악을 사상이나 정치와 연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바렌보임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을 때 핸드폰 하나가 울렸다. '발퀴리의 비행'이라는 음악이 신호 음악으로 나오는 핸드폰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바렌보임은 '핸드폰 음악으로는 사용하면서 왜 콘서트에서는 연주하면 안되느냐?'고 말했다. 그 후로 이스라엘에서도 바그너의 음악이 간혹 연주되었다.

 

■ 칼 뵘(Karl Böhm: 1894-1981)

 

칼 뵘

 

모차르트 해석의 최고 권위자인 칼 뵘은 바그너의 음악에서도 뛰어난 해석으로 존경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태어난 칼 뵘은 그라츠음악원을 나오고 이어 비엔나음악원에서 에우제비우스 만디체브스키(Eusebius Mandyczewski)에게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했다. 칼 뵘은 1920년에 그라츠 오케스트라의 선임음악감독이 되었으며 1927년에는 다름슈타트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그는 1931년부터 34년까지 함부르크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러는 중에 1933년 비엔나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처음 지휘하여 바그너의 전당에 입문하였다. 이후 드레스덴 오페라에서 추방당한 프리츠 부슈(Fritz Busch)의 뒤를 이어 이 오페라의 단장이 되었다. 그는 이 직책을 1934년부터 1942년까지 맡았다. 이 기간은 칼 뵘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왜냐하면 이 기간 중에 처음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지휘했기 때문이었다. 칼 뵘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해석은 마치 모차르트를 해석하는 것과 같아서 감미롭고 우아했다. 칼 뵘의 바이로이트 데뷔는 전쟁이 끝난지 한참 후인 1962년이었다. 그는 바이로이트와 1970년까지 인연을 맺으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그리고 빌란트 바그너에 의한 링 사이클의 마지막 제작을 지휘했다. 칼 뵘이 1966년에 지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바이로이트 공연실황은 음반으로 나왔다. 비르기트 닐슨, 볼프강 빈트가쎈, 크리스타 루드비히가 주역을 맡은 공연이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평을 받았다. 칼 뵘은 여러가지 영예를 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64년에 초대 오스트리아 국가음악총감독이 된 것이었다. 칼 뵘은 잘츠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 1925-)

 

피에르 불레즈

 

피에르 불레즈는 프랑스의 몽브래송(Montbrison)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리옹에서 수학을 공부하다가 파리음악원에서 올리비에 메시앙과 앙드레 보라부르(Andrée Vaurabourg)의 문하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작곡을 공부한 그는 메시앙의 영향을 받아서 후기 안톤 베베른의 병렬주의 스타일의 무조음악을 작곡하여 관심을 끌었다. 지휘자로서 그는 20세기 후반 작품들의 해석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특히 클로드 드비시, 구스타브 말러,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놀드 쇤버그, 벨라 바르토크, 에드가 바레스 등의 작품 해석에서 뛰어났다. 그는 1971년부터 77년까지 뉴욕필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고 바이로이트에는 1970년에 첫 연관믈 맺어 '파르지팔'을 지휘했다. 볼프강 바그너는 불레즈의 '파르지팔' 해석을 높이 평가하여 패트리스 슈러(Patrice Chereau)가 제작하는 링 사이클 1백 주년 기념 공연에 다시 초청하였다. 당시의 링 사이클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연혁에 있어서 대단한 논란을 불러 일으킨 것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현대적 해석의 링 사이클에 대하여 거친 비평을 아끼지 않았다. 불레즈는 2004년에 '파르지팔'을 위해 또 다시 바이로이트의 초청을 받았다. 크리스토프 슐링겐지프(Christoph Schlingensief)가 제작한 이 '파르지팔' 역시 대단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불레즈는 그러한 논쟁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그너 해석의 현대적인 선구자라는 찬사도 받았다.

 

■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 1886-1954)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고고학자로 유명한 아돌프 푸르트뱅글러의 아들인 빌헬름 푸르트뱅글러는 그의 아버지가 뮌헨 대학교에서 강의를 했기 때문에 젊은 시절을 주로 뮌헨에서 보냈다. 그는 안톤 베르 발트브룬(Anton Beer-Waldbrunn)과 요제프 라인버거(Joseph Rheinberger)로부터 사사했다. 1920년, 그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뒤를 이어 베를린오페라의 오케스트라 감독을 맡았다. 그는 그로부터 한 두해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어 라이프치히 게봔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1928년에는 펠릭스 봐인가르트너의 뒤를 이어 비엔나 필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슈타츠오퍼 감독으로의 취임은 거절하였다. 그는 1931년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함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그는 바이로이트에 있으면서 여러 명의 유태인 예술가들을 채용하였다. 나치가 이를 강하게 비판하였음은 물론이었다. 그는 세계 각지로부터 주로 바그너의 작품을 지휘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필라델피아, 뉴욕, 비엔나는 그에게 오페라극장의 총감독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독일을 떠날수 없다고 하며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1936년에는 뉴욕필이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후임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 거절할수 없는 조건이었다. 나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떠날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AP 통신의 베를린 지사에서 이상한 기사가 흘러 나왔다. 푸르트뱅글러가 베를린 오페라의 음악감독직을 수락했다는 식의 보도였다. 그 보도를 접한 뉴욕필의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뉴욕의 제안을 거절할수 밖에 없었다. 그해에 그는 1931년 이래 처음으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했다. 이어 1937년, 1943년, 1944년에도 지휘했다. 사람들은 그가 나치와 동조하고 있다고 보았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46년 12월에 그는 그간의 모든 소문들을 정식으로 부인하고 그가 오로지 독일에 남아 있으면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한 것은 오로지 바그너 음악을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빌란트 바그너는 그를 바이로이트의 재개관에 초청하여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지휘토록 했다. 아마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 이외의 작품이 연주된 것은 그것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 허버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08-1989)

 

허버트 폰 카라얀

 

금세기 최고의 지휘자인 허버트 폰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인 에른스트 폰 카라얀은 외과의사로서 잘츠부르크 주립병원에서 근무했다. 허버트 폰 카라얀은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는 네살 때에 프란츠 레드빈카(Franz Lledwinka)에게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1916년에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 입학하였고 1926년에는 비엔나에 와서 비엔나음악원에 들어갔다. 지휘자로서의 데뷔는 1928년, 그가 20세 때였다. 처음 지휘자 생활을 시작한 곳은 독일의 울름이었다. 이어 1935년에는 보다 규모가 큰 아헨에서 지휘를 맡았다. 당시에 허버트 폰 카라얀은 독일에서 가장 젊은 음악감독이었다. 1937년에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 데뷔하였고 이듬해인 1938년에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지휘하였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해였다. 전쟁이 끝나자 폰 카라얀이 나치에 협조했다는 등의 구설수가 있었지만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음악만을 위해 활동했던 것이었다. 폰 카라얀은 1951년 바이로이트가 재개관되었을 때 빌란트 바그너가 선정한 지휘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1955년에 베를린필의 종신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폰 카라연은 베를린필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교향악단으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그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주관 아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베를린필의 연결을 성사했으며 이어 비엔나 필, 런던 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등을 연계하는 사업을 펼쳤다. 폰 카라얀은 '유럽의 음악총감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잘츠부르크에서 무대에 올린 링 사이클은 빌란트 바그너의 시각적 스타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허버트 폰 카라얀은 그 시대의 유럽 최고의 지휘자였다. 그는 1989년 7월 16일 잘츠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 한스 크나퍼츠부슈(Hans Knappertsbusch: 1888-1965)

 

한스 크나퍼츠부슈

 

한스 크나퍼츠부슈는 20세기 중반에 가장 높은 명성을 차지하고 가장 사랑을 받은 지휘자 중의 하나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 소실이 풍부하였으나 그의 부모들은 그가 음악가보다는 다른 직업을 택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크나퍼츠부슈는 본(Bonn)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1908년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쾰른 대학교에 들어가서 지휘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910-12년에 뮐하임 루르극장의 지휘자를 지내다가 고향인 엘버펠트(Elberfeld)에서 오페라 감독을 맡음으로서 음악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크나퍼츠부슈는 특별히 바그너에 몰입하였다. 그래서 몇년 동안 여름이면 바이로이트에 가서 지그프리트 바그너와 지휘자인 한스 리히터를 돕는 일을 하며 바그너와 더욱 친숙해 지려고 노력했다. 나치가 집권하자 나치는 크나퍼츠부슈에게 나치를 위한 지휘를 하라고 요구했다. 크나퍼츠부슈는 1936년에 결국 엘버펠트의 평생직장에서 해고되었다. 그렇다고 지휘를 계속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두드러진 지휘는 1936년과 1937년에 런던의 초청을 받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를 지휘한 것이었다. 크나퍼츠부슈는 독일의 이곳저곳에서도 지휘를 했지만 아무래도 나치 치하에서 숨을 죽이고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나서부터 그의 진가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크나퍼츠부슈는 바그너의 스코어를 정말로 꼼꼼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는 리허설을 대단히 싫어했다. 세상에 리허설이 없는 연주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크나퍼츠부슈는 리허설을 싫어했으며 만일 한다고 해도 중간에서 끊고 그만하자고 말하기가 일수였다. 그러한 그였지만 바그너 해석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에 1951년 바이로이트가 재개관했을 때 빌란트 바그너는 우정 크나퍼츠부슈를 초청하여 함께 일했다. 크나퍼츠부슈는 여러 레코딩을 남겼지만 가장 뛰어난 것은 바이로이트의 무대에서 '파르지팔'을 지휘한 것이었다.

 

■ 제임스 르바인(James Levine: 1943-)

 

제임스 르바인

 

제임스 르바인은 1943생이다. 그러므로 2013년으로 어느덧 70세가 되었다. 항상 젊음 재기에 넘쳐 있고 에너제틱한 르바인이지만 어느덧 70이 넘은 노년에 접어 들었다. 르바인은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났다. 음악적이며 지성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어릴 때에 피아노를 공부했다. 10살 때에 신시나티 교향악단의 협연으로 피아노 연주를 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르바인은 뉴욕의 줄리아드로 가서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했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오페라 데뷔는 1971년 푸치니의 '토스카'를 메트로폴리탄에서 지휘한 것이었다. 26세 때였다. 2년후에는 메트로폴리탄의 주임 지휘자가 되었고 1976년에는 음악감독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 메트로폴리탄에서 르바인의 바그너 해석은 너무나 뛰어나서 하나의 전설로 남아 있다. 특히 '파르지팔'은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수 없는 것이었다. 르바인은 1982년 바이로이트에 데뷔한 이래 매년 '파르지팔'을 지휘했다. 1982년은 '파르지팔'의 1백 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이기도 했다. 그는 바이로이트의 간절한 요청으로 1993, 1994, 1998년에 링 사이클을 지휘했다. 논란이 많았던 알프레드 키르흐너(Alfred Kirchner)의 연출에 의한 공연이었다. 그는 현재에도 메트로폴리탄의 음악감독으로서 메트로폴리탄 사단을 이끌고 있다.

 

■ 프리츠 라이너(Fritz Rainer: 188801963)

 

프리츠 라이너

 

프리츠 라이너는 헝가리 출신이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립헝거리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왕립헝가리아카데미는 바르토크, 코다이, 도나니, 조지 첼(George Szell: György Széll), 유진 오르만디(Eugene Ormandy), 게오르그 솔티, 안탈 도라티(Antal Dorati) 등 이름만 들어도 존경심을 가지게 되는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을 길러난 음악원이다. 라이너는 또한 부다페스트대학교에서 법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는 21세 때에 부다페스트 오페라의 합창지휘자가 되었고 2년 후에는 부다페스트 폭스오퍼의 지휘자가 되었다. 1914년부터 1922년까지는 드레스덴 왕립오페라의 수석 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는 드레스덴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함께 일했다. 그래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초기 오페라들을 지휘했다. '그림자 없는 부인'(Die Frau Ohne Schatten)의 독일 초연도 지휘했다. 그는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나치가 정식으로 권력을 잡기 전에 미국 시민이 될수 있었다. 1922년에 신시내티 교향악단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간 것이 계기였다. 그는 1928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1932년에는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원으로 가서 오페라 및 오케스트라과를 이끌었다. 이어 1938년부터 48년까지 10년 동안은 피츠버그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했고 그 후에 메트로폴리탄과 합류하였다. 메트로폴리탄에서의 바그너 해석은 뛰어난 것이었다. 1953년에는 시카고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이 되어 이 교향악단을 세계 정상으로 올려 놓았다. 시카고 교향악단은 라이너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자 1962년에 제발 현직에서 은퇴하여 건강을 살피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그저 시간이 있으면 간혹 도와주기만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러한 제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라이너는 이듬해인 1963년에 세상을 떠났다.

 

■ 안톤 자이들(Anton Seidl: 1850-1898)

 

안톤 자이들

                       

안톤 자이들도 헝가리 출신이다. 1850년에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20세 때인 1870년, 그는 음악의 길을 선택하여 라이프치히음악원에 들어갔다. 라이프치히음악원에는 2년 동안 다녔다.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사보가로 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오리지널 '니벨룽의 반지'의 스코어를 정확하고 깨끗하게 사보하여 찬사를 받았다. 말이 사보이지 그건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혹시 작곡자가 실수로 잘못 악보를 그려 놓았으며 그걸 알아내어 고치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바그너와 자이들은 1872년부터 1876년까지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일했다. 자이들이 187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첫 회에 참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기간에 바그너는 자이들에게 메모를 보내어 '여보게, 좀 더 무대에 집중하게나, 나의 연출 지시를 잘 따르게나, 그러면 음악을 통해서 작품의 길이 보인다네'라고 말했다. 바그너는 그만큼 자이들을 아꼈다. 얼마후 바그너는 젊은 자이들을 라이프치히 시립극장의 지휘자로 추천하였다. 자이들은 그곳에서 1882년까지 활동했다. 그후 안젤로 노이만의 '니벨룽의 반지 오페라단'와 함께 유럽 순회공연을 떠났다. 그해 6월 런던의 여왕폐하극장에서의 공연은 자이들의 지휘로 큰 찬사를 받은 것이었다. 이듬해인 1883년, 자이들은 노이만과 함께 브레멘으로 갔다. 자이들은 브레멘에 정착할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2년후, 레오폴드 담로슈(Leopold Damrosch)의 후임으로 뉴욕의 독일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초청을 받았다. 1885년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입성하였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의 독일 오페라 시즌에서 대부분의 중요한 독일 오페라들의 초연을 지휘했다. 그는 1886년에 바이로이트로 돌아갔다. 그때에는 젊은 사보가가 아니라 이미 유명해진 지휘자로였다. 안톤 자이들은 다시 미국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1898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 게오르그 솔티(Georg Solti: 1912-1997)

 

게오르그 솔티 경

 

20세기 최고의 지휘자인 게오르그 솔티도 헝가리 출신이다. 부다페스트의 프란츠 리스트 아카데미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했다. 졸탄 코다이와 벨라 바르토크와 함께 공부했다. 어릴 때부터 음악의 신동으로 알려진 솔티는 열두살 때에 처음으로 피아노 협연을 했다. 그리고 부다페스트오페라에서는 1930년, 18세 때부터 음악조수로 일했다. 그후 1934년부터 39년까지는 음악감독을 지냈다. 나치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그 전인 1936-37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조수로 일했다. 잘츠부르크에서 토스카니니와의 만남은 젊은 솔티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이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그는 취리히로 이민을 갔다. 취리히에서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할 생각이었다. 솔티는 1942년 제네바국제경연대회에서 1등을 차지할 정도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솔티의 경력은 비로소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솔티는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뮌헨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지냈고 1952년부터 1961년까지는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지냈다. 코벤트 가든에는 1961년부터 1981년까지 10년 동안 음악감독으로 있었다. 잘츠부르크에서 지휘한 것은 1951년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에 비엔나필과 함께 처음으로 바그너를 취입했다. 1960년대에 비엔나필과 함께 '링 사이클'의 전편을 스테레오로 취입한 것은 20세기 레코딩의 역사에서 랜드마크였다. 그는 1969년부터 시카고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되어 지휘자로서 제2의 시기를 시작하였다. 그는 시카고에 1991년까지 있으면서 시카고교향악단을 세계정상으로 올려 놓았다. 한편, 1972-75년에는 파리오케스트라의 감독을 겸임하기도 했다. 1973년에 롤프 리버만(Rolf Liebermann)은 솔티를 파리오페라의 음악자문으로 임명하였다. 1983년에는 바그너 서거 1백주년을 기념하여 바이로이트에서 링 사이클 전편을 지휘했다.

 

■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20세기 최고의 지휘자였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첼리스트였다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1886년, 우리나라에서는 배재학당이 비로소 문을 연 해에 그는 리우데자네이로에서 갑자기 '아이다'의 지휘를 맡게 되었고 그로부터 지휘자로서 세계 정상의 인물이 되었다. 토스카니니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토스카니니는 세상 모든 지휘자의 대명사였다. 토스카니니는 1867년 이탈리아의 파르마에서 태어났다. 파르마는 베르디가 태어난 지방이기도 하다. 토스카니니는 아홉살 때에 파르마음악원에 입학하여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작곡도 공부했다. 그는 1885년, 18세 때에 파르마음악원을 최우수 상을 받고 졸업했다. 1년후,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리우데자네이로 순회공연에서 첼로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아이다'를 공연키로 되어 있는 날에 지휘자가 갑자기 아퍼서 지휘를 할수 없게 되었다. 토스카니니가 급히 대타로 나서게 되었다. 토스카니니는 순전히 암기로서 '아이다'를 훌륭하게 지휘했다. 대성공이었다. 그후 토스카니니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계속 지휘를 하였다. 이같은 운명의 바뀜으로서 토스카니니는 수십년 동안 세기의 지휘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게 되었다.

 

토스카니니는 1887년부터 1896년까지 거의 10년 동안 밀라노, 로마, 토리노 등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에서 오페라를 지휘했다. 그리고 여러 오페라단들의 순회공연에서도 지휘를 했다. 1908년에 토스카니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가서 메트로폴리탄의 지휘를 맡기 시작했다. 바이로이트 데뷔는 1926년이었다. 독일인이 아닌 지휘자로서 바이로이트에서 지휘하기는 토스카니니가 처음이었다. 그러다가 1933년에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바이로이트를 떠나서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유럽에서 파치스트 정권이 득세를 하고 유태인들을 박해하자 우정 새로 조직된 팔레스타인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았다. 나중에 이스라엘 필하모닉이 된 오케스트라였다. 1937년에 뉴욕은 토스카니니를 위해 특별히 NBC 교향악단을 조직하였다. 토스카니니는 파치스트가 싫어서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는 그로부터 17년 동안 NBC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처음에는 라디오를 통해, 나중에는 텔리비전으로 전국에 NBC 교향악단의 연주를 방송하였다. 토스카니니는 87세의 나이에 은퇴하였다. 그는 1957년 1월 16일 브롱스의 리버데일에 있는 자택에서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계가 애도하였다. 그의 시신은 이탈리아로 옮겨저 밀라노의 기념묘지(Cimietero Monementale)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1926년 그가 '투란도트'의 초연을 지휘했을 때 바톤을 놓고 관중들을 향해 했던 말이 적혀 있다. Qui finisce l'opera, perche a questo punto il maestro e morto(여기에서 오페라가 끝납니다. 이 시점에서 마에스트로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이다.

 

밀라노의 기념묘지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