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풍운아 바그너

바그너 바리톤과 베이스

정준극 2013. 2. 4. 10:19

바그너 바리톤과 베이스

 

■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 1925-2012)

 

'신들의 황혼'에서의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베를린 출신의 알베르트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는 실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위대한 베이스 바리톤이다. 오페라와 가곡에서 그의 뛰어난 재능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역정은 평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43년 독일 국방군(Wehrmacht)에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했다가 1945년 종전에 즈음하여 이탈리아에서 포로로 잡혔다. 그는 2년동안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어 독일로 돌아온 그는 베를린음악원에서 본격적인 성악공부를 하였다. 성악가로서 그의 데뷔는 특이한 것이었다. 1947년에 바덴바일러(Badenweiler)에서 브람스의 독일진혼곡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베이스를 맡은 성악가가 연주회 직전에 사정이 있어서 돌연 출연하지 못하게 되었다. 피셔 디스카우가 즉석에서 대타로 기용되었다. 피셔 디스카우는 독일진혼곡을 한번도 연습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초견으로 연주회를 마쳤다. 모두들 그의 아름답고도 서정적인 음성에 박수를 보냈다. 그는 1948년에 베를린 시립오페라(Städtische Oper)의 주연급 리릭 바리톤으로 고용되었다. 그후 그는 비엔나와 뮌헨에서 놀랄만한 재능을 보이며 오페라 무대를 장식하여 금세기 최고의 베이스 바리톤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1949년 이래 콘서트 베이스 바리톤으로서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순회공연하였다. 바이로이트에는 1954년부터 1961년까지 고정적으로 출연하였고 1956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정기적으로 출연했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는 오페라에서뿐만 아니라 가곡의 연주로서 세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 페르디난트 프란츠(Ferdinand Frantz: 1906-1959)

 

'발퀴레'에서의 페르디난트 프란츠

 

독일의 카셀에서 태어난 페르디난트 프란츠는 바그너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베이스 바리톤의 역할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었다. 어떤 평론가는 그의 저음이 마치 커다란 닻을 해저 깊숙히 던져 넣은 것과 같고 그의 고음은 날카로운 창끝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바 있다. 그것이야 말로 바그너가 요구하였던 음질이었다. 사람들은 프란츠와 같은 베이스 바리톤은 과거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란츠는 이 시대의 마지막 헬덴 베이스 바리톤이었다. 프란츠의 음성은 과거의 베이스 바리톤에 비하여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이었다. 페르디난트 프란츠는 바그너가 원하는 역할들을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충실하게 표현하였다. 대표적인 역할은 '발퀴레'에서 보탄일 것이다. 다행히 그는 그의 음성을 레코딩으로 남겼다. 그것으로나마 바그너 헬덴 베이스 바리톤의 진면목을 느껴볼수 있을 것이다. 프란츠는 유럽에서 주로 비엔나의 슈타츠오퍼, 드레슨덴의 젬퍼오페라극장,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밀라노의 라 스칼라, 코벤트 가든의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바그너 역할을 맡았다. 프란츠의 메트로폴리탄 데뷔는 1949년 12월 12일이었다. 보탄을 맡아 놀라운 감동을 주었다.

 

■ 한스 호터(Hans Hotter: 1909-2003)

 

'지그프리트'에서 한스 호터

 

한스 호터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던 베이스 바리톤이다. 그의 음성은 고귀하고 웅장했다. '니벨룽의 반지'에서 보탄,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한스 작스는 대표적인 역할이었다. 그는 세계를 주도했던 바그너 베이스 바리톤이었다. 한스 호터는 뮌헨에서 마토이스 뢰머(Matthäus Roemer)로부터 음악을 공부하여 1930년 오스트리아제국의 슐레지아에 있는 트로파우에서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그전에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와 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했다. 이후 그는 표준적인 바리톤 역할들을 맡으며 브레슬라우, 프라하, 함부르크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의 첫 보탄은 1937년 뮌헨에서였다. 그로부터 한스 호터는 보탄의 대명사처럼 되어 평생동안 지냈다. 메트로폴리탄 데뷔는 1950년으로서 화란인이었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에서 4개 시즌에 13개 역할을 맡으며 35회의 공연을 가졌다. 대단한 재능이었다. 한스 호터는 바이로이트와 인연이 깊다. 1952년부터 시작하여 12년 동안 바이로이트에 출연했다.

 

■ 허버트 얀센(Herbert Janssen: 1892-1965)

 

'지그프리트'의 허버트 얀센

 

허버트 얀센은 원래 법학을 공부했다. 1차 대전 중에는 장교로서 참전했다. 그후 베를린에서 오스카르 다니엘(Oskar Daniel)로부터 성악 레슨을 받았고 1922년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데뷔하였다. 그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 1938년까지 있으면서 주로 바그너 역할로서 명성을 떨쳤다. 물론 베르디와 프랑스 오페라의 역할들도 맡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 있으면서 비엔나와 멀리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초청을 받아 출연했다. 허버트 얀센은 바그너의 가벼운 바리톤 역할로서 뛰어났다. 그가 주로 맡은 역할은 쿠르베날, 볼프람, 암포르타스, 군터, 텔라문트 등이었다. 그는 1926년부터 1939년까지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자주 모습을 보였으며 1930년부터 1937년까지는 바이로이트에도 모습을 보였다. 나치가 권력을 잡자 그는 독일을 떠나야 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39년에 필라델피아 오페라 하우스에서 '지그프리트'의 보탄으로 미국 데뷔를 기록하였다. 그는 곧이어 메트로폴리탄과 계약을 맺어 1939년부터 1952년까지 활동했다. 1943년에는 프리드리히 쇼르가 은퇴하는 바람에 보탄이나 한스 작스와 같은 무거운 역할들을 대신 맡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역할 들은 그의 음성에 적합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 조지 런던(George London: 1920-1979)

 

'라인의 황금'의 조지 런던

 

조지 런던은 캐나다의 몬트리얼에서 러시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얼마후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자랐으며 1942년에 할리우드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의사(Dr Grenvil)로서 오페라에 데뷔하였다. 그는 뉴욕에 가서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뮤지컬에 자주 출연하였다. 1947년에는 테너 마리오 란자, 소프라노 프란시스 옌드(Frances Yeend)와 함께 '벨 칸토 트리오'로서 미국 순회 공연을 가졌다. 1949년에는 칼 뵘이 그를 비엔나 슈타츠오퍼와 계약을 맺도록 주선하였다.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의 첫 역할은 '아이다'에서 아모나스로였다. 이어 갈리츠키, 에스카미요, '호프만의 이야기'에서 네 명의 악역, 보리스 고두노프 등을 맡았다. 조지 런던은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캄머쟁거로 임명되었다. 캐나다 출신의 성악가로서는 대단한 영광이었다. 1951년에는 바이로이트에 데뷔하여 1964년까지 매년 바이로이트에서 여러 역할을 맡았다. 1951년에는 또한 메트로폴리탄과 계약을 맺었다. 그는 돈 조반니, 스카르피아, 보리스 고두노프 등을 맡아 찬사를 받았다. 조지 런던은 1950년대 중반에 모스크바의 초청을 받아 보리스를 불렀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악가로서는 처음으로 공산 모스크바에 가서 오페라에 출연하는 기록을 세웠다. 조지 런던은 1961년 음성에 이상이 생겨 무대에서 은퇴할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콘서트에서는 1965년까지 노래를 불렀다.

 

■ 제임스 모리스(1947-)

 

'발퀴레'의 제임스 모리스

 

미국의 제임스 모리스는 오늘날 가장 뛰어난 바그너 베이스 바리톤이다. 그의 대명사는 보탄이다. 볼티모어 출신인 그는 오페라의 전설인 로사 폰셀레(Rosa Ponselle)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그는 23세 때에 메트로폴리탄과 계약을 맺었다. 메트로폴리탄의 연혁에 있어서 가장 연소한 베이스 바리톤이었다. 그는 2000년에 메트로폴리탄 30주년을 축하하였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에 있으면서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비엔나, 런던, 파리에서도 자주 공연하였으며 뮌헨과 베를린에서는 정규적인 솔리스트로 활동해 왔다. 그의 역할로서는 '돈 카를로'에서 필립 2세, 벤자민 브리튼의 '빌리 버드'에서 클라가트,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 '토스카'에서 스카르피아, '오텔로'의 이아고 등이었다. 바그너 역할로서는 '방랑하는 화란인'에서 화란인, '링 사이클'에서 보탄과 방랑자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한스 작스도 레퍼토리에 추가하여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 르네 파페(Rene Pape: 1964-)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의 르네 파페

 

르네 파페는 오늘날 젊은 세대의 성악가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바그너 베이스 바리톤일 것이다. 그는 1988년부터 베를린의 도이치 오퍼의 멤버로서 중요한 베이스 역할들을 맡으며 활동했다. 1994년에 볼프강 바그너가 그를 바이로이트로 초청하여 제임스 르바인이 지휘하는 '라인의 황금'에서 파솔트를 맡도록 했다. 그로부터 그는 바이로이트와도 깊은 인연을 맺으며 활동했다. 1995년에는 제임스 르바인의 주선으로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하였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제임스 르바인의 지휘로 하인리히왕(로엔그린), 마르케왕(트리스탄과 이졸데), 로코(휘델리오), 그리고 에스카미요(카르멘)을 고정적으로 맡았다. 에스카미요는 그가 메트로폴리탄에서 처음 시도한 역할이었다. 1999년에는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포그너로 데뷔하였고 2000년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마르케 왕을 맡았다. 그는 2001년에 뮤지컬 어메리카 잡지가 선정한 '올해의 성악가'가 되었다.

 

■ 프리드리히 쇼르(1889-1953)

 

한스 작스의 프리드리히 쇼르

 

한스 작스의 대명사인 프리드리히 쇼르는 헝가리 출신이다. 오스트리아, 독일, 체코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나 후반에는 나치의 압박을 받아 어쩔수 없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으로 귀화하고 주로 메트로폴리탄에서 활약했다. 프리드리히 쇼르를 아돌프 로빈슨(Adolf Robinson)에게서 성악공부를 했고 오페라 데뷔는 1912년 그라츠에서 '발퀴레'의 보탄으로였다. 그후 잠시 그라츠, 프라하, 쾰른에서 활동하다가 1923년부터는 베를린의 슈타츠오퍼에 자리를 잡고 7년 동안 무대에 섰다. 그는 여러 역할을 맡았지만 아무래도 제격은 바그너의 베이스 바리톤 역할이었다. 그는 바이로이트에서 1925-31년간 노래를 불렀고 코벤트 가든에서는 1925-33년간 불렀으며 메트로폴리탄에서는 1924-43년을 불렀다. 프리드리히 쇼르는 한스 작스 이외에도 보탄으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진정한 바그너 베이스 바리톤이었다. 그의 한치의 결점도 없는 웅장한 음성과 실수가 없는 아름다운 음성은 전설로 되어 있다.

 

■ 허만 우데(Hermann Uhde: 1914-1965)

 

'발퀴레'의 허만 우데

 

독일의 베이스 바리톤인 허만 우데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미국인 어머니는 유명한 바리톤인 칼 샤이데만텔(KKarl Scheidemantel)에게서 성악 레슨을 받았다. 그래서 허만 우데도 처음에는 베이스로서 훈련을 받았다. 브레멘의 오페라학교에서 필립 크라우스(Philipp Kraus)로부터였다. 허만 우데는 1936년 브레멘에서 파르지팔의 티투렐로서 오페라 무대에 처음 데뷔하였다. 그후 프라이부르크와 뮌헨에서 베이스로서 활동하다가 1942년에 하그의 독일극장에서 바리톤 역할을 맡았다. 그로부터 그는 베이스보다는 바리톤을 더 많이 맡게 되었다. 2차 대전이 터지자 그는 독일군으로 참전하였다가 전쟁의 막바지인 1945년 4월에 연합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1946년 2월에 석방되었다. 그가 다시 오페라 무대에 서기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였다. 주로 함부르크, 비엔나, 뮌헨에서 오페라에 출연했다. 바이로이트에는 1951년부터 1960년까지 고정 출연하였다. 화란인, 클링조르, 군터, 돈너, 보탄, 텔라문트, 멜로트 등 폭넓은 역할들을 맡았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 초연에 출연하였다. 영어로 노래를 불렀다. 그로부터 그는 1955년부터 61년까지, 그리고 1954년에 메트로폴리탄에 정기적으로 출연했다. 그는 1965년 코펜하겐에서 닐스 비고 벤촌(Niels Viggo Bentzon)의 '파우스트 3'(Faust III)을 공연하는 도중, 무대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

 

■ 안톤 반 로이(Anton van Rooy: 1870-1932)

 

'발퀴레'의 안톤 반 로이

 

화란의 안톤 반 로이는 당대에 가장 위대한 바그너 남성 성악가로 간주되었다. 그는 1897년 코지마 바그너의 적극적인 주장에 의해 바이로이트에 처음 출연하여 놀라운 재능을 선보였다. 그는 바이로이트에서 1902년까지 활동하며 보탄, 화란인, 한스 작스를 포함한 바그네 베이스의 대부분을 맡았다. 그의 매려적이고도 웅장한 음성을 삽시간에 세계 각지로 번져서 1898년에는 코벤트 가든에 모습을 보였고 이어 메트로폴리탄에서도 모습을 보였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의 뜨거운 환영으로 1908년까지 머물렀으며 코벤트 가든에는 1913년 은퇴할 때까지 출연하였다. 반 로이의 활동 중에서 한가지 기록에 남는 것은 1903년 메트로폴리탄에서 '파르지팔'을 공연한 것이었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바이로이트 이외에서는 절대로 공연하지 못하도록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 놓았다. 물론 바그너 사후에 코지마도 그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였다. 그런데 메트로폴리탄에서 말하자면 금주시대의 밀주제조처럼 '파르지팔'을 바이로이트와 사전 협의 없이 무대에 올렸다. 세상에 비밀이란 있을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코지마 바그너는 대단히 흥분해서 안톤 반 로이는 앞으로 절대로 바이로이트의 무대에 서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뿐만 아니라 안톤 반 루이가 바이로이트에 구경오면 입장치 못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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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의 위대한 바그너 베이스 바리톤들

 

■ 에밀 쉬퍼(Emil Schipper: 1882-1957) -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헬덴바리톤 

 

'로엔그린'의 에밀 쉬

 

■ 테오도르 샤이들(Theodor Scheidl)

 

'파르지팔'의 테오도르 샤이들 

 

■ 리하르트 마이르(Richard Mayr)

 

리하르트 마이르

 

■ 빌헬름 헤슈(Wilhelm Hesch)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빌헬름 헤슈

 

■ 발터 조머(Walter Soomer)

 

'파르지팔'의 발터 조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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