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명소와 공원

제그로테(Seegrotte)

정준극 2013. 1. 29. 10:32

유럽 최대의 지하호수 제그로테(Seegrotte)

2차 대전 중 나치의 전투기 제조 장소로 이용

 

제그로테 입구

 

제그로테는 비엔나의 남쪽, 니더외스터라이히주 뫼들링의 힌터브륄(Hinterbrühl)마을에 있는 유럽 최대의 지하호수다. 제(See)는 호수라는 뜻이고 그로테(Grotte)는 동굴이라는 의미이다. 제그로테의 내부는 규모가 상상 외로 커서 2차 대전 중에는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사람들이 동원되어 나치의 비밀전투기인 He 162의 부품을 생산하고 조립하였다. 제그로테는 사람이 만든 호수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호수이다. 원래 이 동굴에는 1800년대부터 석고광산이 있었다. '힌터브륄'이라는 이름의 광산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붉은 색과 하얀 색의 석고는 품질이 좋아서 주로 이름난 건물들의 장식용 스투코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는 중에 1912년에 갑자기 동굴 안의 한쪽이 붕괴되면서 바위 사이로부터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나왔다. 산속에 숨어 있던 물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나중에 계산해 보니까 약 2천만 리터나 되는 양이었다고 한다. 석고광산은 2층 규모인데 물이 넘치는 바람에 넓은 아랫 층과 횡으로 연결된 곳들이 모두 물에 잠겼다. 그래서 유럽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지하호수가 형성되었다. 그로부터 제그로테(호수동굴)라는 명칭이 붙었다. 석고광산은 1930년대 중반에 학술팀이 제그로테에 대한 자세한 조사를 마칠 때까지 폐쇄되어 있다가 나치가 '아니, 이런 훌륭한 비밀장소가 있다니!'라면서 비밀병기 개발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연합군의 공중폭격에도 끄떡없을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제그로테의 수상관광. 전문 가이드가 자세히 설명해 준다. 배가 지나갈 때마다 조명이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잠시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마우트하우젠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이 동원되어 제그로테에 와서 노동했기 때문이다. 마우트하우젠은 오베레외스터라이히주의 린츠에서 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나치는 그해 8월에 뮌헨 부근 다하우(Dachau) 강제수용소의 죄수들을 마트하우젠으로 이송하였다. 말하자면 오스트리아도 이제 독일과 한 나라가 되었으니 강제수용소도 함께 운영해야 한다는 의도에서였다. 마트하우젠은 채석장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이곳을 심지어 '비엔나의 묘지'(Wiener Graben)라고 불렀다. 나치는 다하우의 죄수들을 동원하여 마트하우젠의 화강암 석재를 캐내어 요새와 같은 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이렇게하여 마트하우젠의 강제수용소는 죄수들의 피와 땀과 해진 손과 굽은 등으로 완성되었다. 마트하우젠 캠프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모든 강제수용소의 총본산이나 마찬가지였다. 마트하우젠을 중심으로 하여 오스트리아 전국에 48개의 강제수용소가 마치 지점처럼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전국에 흩어져 있는 나치의 강제수용소는 1938년 8월 8일부터 운영되었다. 이들 수용소에는 1945년 5월 5일 해방이 되기까지 약 20만명의 죄수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나치의 '보호연금법'에 의해 끌려와서 수용되었다. '보호연금'(Protective custody)이라는 것은 독일 제3제국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위험한 사람들은 두 나라가 연합하여서 일반 사람들로부터 격리해야 하기 때문에 한 군데에 모아 연금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인종적, 정치적으로 위험한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나치의 그런 정책에 오스트리아는 독일보다 더 열심이었다. 나치의 SS에는 독일 출신보다 오스트리아 출신이 훨씬 많았던 것이 좋은 예이다.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오른쪽의 하얀 조형물은 희생자 기념비이다. 마치 요새와 같다.

                           

마트하우젠 수용소는 나치의 인간파괴 행위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곳 중의 하나였다. 죄수들의 대부분은 아무런 죄도 없이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채석장에서 인간으로서는 할수 없는 힘든 노역을 하여 결국 매일같이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마투하우젠-구센 터널을 만들 때에도 죄수들이 동원되어 그 중에서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죄수들은 터널을 팔 때에 대부분 맨손으로 흙을 파고 돌을 치워야 했다. 그러니 그 고역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SS의 하인리히 히믈러가 이 모든 사업을 총괄했다. 히믈러는 죄수들에게 연장이나 도구를 지급하지 말고 노동을 하도록 했다. 이를 '원초적건설공사'(Primitivbauweise)라고 불렀다. 그로 인하여 이곳의 죄수들은 생존하기 위해 인간성을 상실하고 마치 동물처럼 살았다. 오늘날 이곳은 아름다운 환경의 평화스런 시골풍경이지만 2차 대전 중에는 지옥이 바로 이곳이었을 정도였다.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는 2차 대전의 막바지에 미군이 해방했다. 미군을 환영하는 수용소 수감자들

 

힌터브륄에는 1943년 8월에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의 위성 캠프가 설치되었다. 새로 생긴 캠프로 이송된 죄수들은 제그로테에 마련된 대규모 지하 벙커에서 He(하인켈) 162 전투기에 사용하는 BMW 003 터보엔진과 기타 부품들을 만들고 전투기를 조립하는 노동에 투입되었다. He 162 제작 작전은 암호로 살라만더라고 불렀다. 불이나 포격에도 끄떡없다는 불도마뱀을 비유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 전투기는 나치의 극비병기였기 때문에 제그로테는 그야말로 나치의 엄중한 경계를 받았다. 노르웨이의 중수공장보다 더 엄격한 경비가 이루어졌다. 제그로토 비밀공장은 1945년 봄까지 운영되었다. He 162 라는 전투기는 '비상전투기'(Emergency Fighter) 또는 '국민전투기'(Volksjäger: 폭스얘거: 얘거라는 단어는 사냥꾼이라는 뜻)라고 불렸으며 금속 대신에 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극도로 가볍고 빠르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참새'(Spatz)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편, He 162 전투기는 제작비가 극히 저렴했다. 그래서 전투 중에 만일 손상을 입으면 굳이 구조하려고 애쓰지 않고 그대로 버려도 상관이 없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여러 공장에서 이 전투기의 부품들이 만들어지면 힌터브륄의 제그로테로 가져와서 조립하였다. 그런 후에 전투기 테스트 센터로 보내던지 그렇지 않으면 직접 공군기지로 보내 전투에 투입하였다. 제그로테 안에서는 최대 2천명의 죄수들이 작업을 했다. 1945년, 전쟁의 막바지에는 더 많은 전투기 제조를 위해 더 많은 죄수들이 필요하므로 심지어는 멀리 200 km가 넘는 곳에서부터 죄수들을 도보로 힌터브륄로 데려왔다. 그렇게 걸어서 먼 길을 걸어온 죄수들은 실제로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런 중에도 51명의 죄수는 힌터브륄로 떠나기도 전에 나치의 작업을 거부하였다. SS 장교들이 마치 게임이나 하듯 이들에게 휘발유를 강제로 먹여 죽이거나 목을 졸라 죽였다. 이들 51명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1988년에 제그로테 언덕 위에 설치되었다.

 

제그로테 내에서 하인켈 162 전투기를 제조하는 장면. 동체의 상당부분을 금속 대신에 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자 제그로테는 내부를 정리하여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오늘날 제그로테는 비엔나 근교의 관광명소로서 1년에 약 25만명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다. 비엔나에서 자동차로 간다면 남쪽 뫼들링으로 E60번 도로를 타고 가면 된다. 뫼들링의 서쪽에 있다. 비엔나에서는 매일 떠나는 관광버스가 있으므로 미리 예약하면 편하게 갈수 있다. 4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개방하며 1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 그리고 오후 1시부터 오후 3시까지 공개한다. 토요일과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30분까지 공개한다. 입장료는 어른이 9 유로이며 4세부터 14세까지의 어린이는 6 유로이다. 어른 단체는 20명까지 1인당 6 유로이다. 주소는 그루츄가쎄(Grutschgasse) 2a, A-2371 힌터브륄이다. 제그로테에 들어가면 내부 온도가 9도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서늘하다. 그래서 들어갈 때에 담뇨 한장씩을 빌려 준다. 안에 들어가면 호수에서 배를 타고 관람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약 45분 걸린다. 전문 가이드가 자세하게 안내해 준다. 동굴 안의 어떤 넓은 곳에는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모신 제단이 있다. 죄수들이 기도를 하던 장소라고 한다. 전투기의 잔해들도 전시되어 있어서 2차 대전을 회상케 해준다. 한편, 1883년 뫼들링과 힌터브륄을 연결하는 전차가 설치되었다. 유럽 최초의 전차였다. 이 전차는 1932년 3월 31일 운행을 중단하였다. 현재에는 이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류장의 자취가 남아 있다.

 

제그로테 내부의 성모제단

 

[힌터브륄의 횔드리히스뮐레 호텔]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힌터브륄에 있는 횔드리히스뮐레 여관(Höldrichsmühle Gasthof)은 슈베르트에게 가곡 '보리수'(린덴바움)를 작곡하는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성문 앞 우물 가에 서 있는 보리수...'는 횔드리히스뮐레 여관 앞에 있는 우물과 보리수를 말한다는 것이다. 한번쯤 그 여관에 묵어도 감회가 깊을 것이다. 주소는 가아드너슈트라세(Gaadnerstrasse) 34번지이다. 호텔에 기념명판이 있다.

 

슈베르트가 '보리수'를 작곡하는 영감을 얻었다는 힌터브륄의 횔드리히스뮐레 호텔 기념엽서


횔드리히스뮐레 호텔 안내판


횔드리히스뮐레 호텔에 설치되어 있는 슈베르트 기념 명판과 보리수 첫 소절

힌터브륄에 있는 베토벤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