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슈트라우스 왕조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연표

정준극 2013. 2. 2. 00:33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연표

(Biography of Johann Strauss Jr.)

 

프라터슈트라쎄 54번지의 요한 슈트라우스 보눙에 전시되어 있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초상화

 

연도(나이)

주요 사항

1825

현재의 비엔나 7구 노이바우의 레르헨펠더슈트라쎄 15번지에서 요한 밥티스트 슈트라우스로서 태어남. 당시에는 비엔나 교외인 장크트 울리히였음.  

1832 (7)

잘만스도르프 여름집에서 첫번째 왈츠인 '첫번째 생각'(Erster Gedanke)를 즉흥적으로 작곡함. 현재는 19구 되블링의 드라이마르크슈타인가쎄 13번지임. (세번째 부인인 아델레가 그의 사후에 자선목적으로 출판하였음.) 

1836 (11)

1구 프라이융에 있는 쇼텐슈티프트 김나지움에 다니기 시작함. 

1841 (16)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요망에 따라 폴리테흐닉 인스티투트(Politechnik Institute)의 상업연구부에 입학함.  

1843 (18) 

수업시간에 공부는 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거나 작곡을 하는 바람에 폴리테흐닉을 나가야 했음. 

1844 (19)

키르헤 암 호프에서 처음으로 '층계송'(Graduale)을 연주함. 자체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13구에 있는 페르디난트 돔마이어 카지노(오늘날의 파르크호텔 쇤브룬)에서 지휘자 및 연주자로 데뷔함. 

1848 (23)

비엔나 혁명이 일어남. 프랑스에서 시작한 혁명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로 확산됨. 

1849 (24)

9월 25일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성홍열로서 세상을 떠남.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가장 큰 성공은 그 전해에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와의 전투에서 승전한 것을 기념하여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한 것임.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되블링 공동묘지의 요셉 란너의 묘지 옆에 안장됨.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의 오케스트라를 자기의 오케스트라와 합병함.

1856 (31)

비엔나 호프부르크에서 모차르트 기념 콘서트를 감독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남. 리스트가 슈페를(Sperl) 무도회장의 슈트라우스 콘서트에 참석함. 러시아 생페터스부르크 인근의 파블로브스크에서 러시아에서의 첫 여름을 지냄. 그후의 러시아 순회 연주회는 대성공을 거두었음.

1861 (36) 

팔레 토데스코(Palais Todesco)에서 헨리에타 '예티' 트레프즈를 만남. 

1862 (37)

8월 27일 슈테판성당에서 예티 트레프즈와 결혼식을 올림. 결혼후 두 사람은 1870년부터 1878년 예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현재의 13구 막싱거슈트랄쎄 18번지(당시에는 헤첸도르퍼 슈트라세)에 살았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예티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는 그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얼마후 매각하였다. 이 집에서 오페레타 '박쥐'를 작곡. 

1867 (42)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도나우 발처)를 작곡함. 

1868 (43)

'비엔나 숲 속의 이야기'(Geshichten aus dem Wienerwald)를 작곡함. 

1871 (46)

첫 오페레타인 '인디고와 40인의 도적'(Indigo und die vierzig Räuber)이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됨. 

1874 (49)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박쥐'(Der Fledermaus)의 초연이 있었음. 

1878 (53)

4월 7일 예티가 세상을 떠남. 5월 28일 브레슬라우(현재의 폴란드의 도시) 출신의 소프라노로서 릴리라는 애칭의 안젤리카 디트리히와 4구의 칼스키르헤에서 결혼함. 

1882 (57)

릴리와 헤어짐. 4구 뷔덴의 이겔가쎄 4번지(현재의 요한 수트라우스 가쎄 4번지) 자택의 모임에서 아델레를 만남. 아델레는 나중에 그의 세번째 부인이 됨.

1883 (58)

'베니스의 하룻 밤'(Einer Nacht in Venedig)이 베를린에서 초연됨. 대본이 진부하여서 성공하지 못함. 그후 수정본을 만들어 비엔나에서 공연하여 세계적인 인정을 받음. 

1885 (60)

'집시남작'(Der Zigeunerbaron)이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됨. 그는 개신교도인 아델레와 결혼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포기하고 코부르크의 작손 시민권을 얻음.

1886 (61)

개신교로 개종하고 아델레와 결혼함. 

1899 (74)

이겔가쎄 4번지(현재의 요한 슈트라우스 가쎄 4번지)의 저택에서 세상을 떠남. 3일후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예술가 묘역에 슈베르트, 베토벤, 브람스의 옆 자리에 안장됨.

1907 

바로 아래 동생인 에두아르드가 형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악보 등 모든 자료를 불태워 없앴다고 함. 

1930 

아델레가 세상을 떠남. 중앙공동묘지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묘지에 합장됨. 


 

세번째 부인인 아델레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