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슈트라우스 왕조

요한 슈트라우스의 첫번째 부인 예티

정준극 2013. 2. 5. 08:45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첫번째 부인 예티

Henrietta 'Jetty' Treffz Chalupetzky

 

악보를 들고 있는 젊은 시절의 예티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첫번째 부인인 예티는 1818년 당시 비엔나 교외의 알저그룬트(현재는 비엔나 9구)에서 태어났고 1878년 역시 비엔나 근교인 히칭에서 세상을 떠난 유명 메조소프라노였다. 요한 슈트라우스가 히칭에 살고 있을 때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예티의 묘소는 히칭 공동묘지에 있다. 그의 이름인 예티는 애칭이며 원래의 풀 네임은 헨리에타 트레프즈(Henritetta Treffz)이다. 트레프즈라는 이름은 예티의 어머니의 결혼전 성이며 예티(Jetty)는 헨리에타의 애칭이다. 예티의 결혼전 이름은 샬루페츠키(Chalupetzky)이다. 샬루페츠키라는 이름에서 볼수 있듯이 예티는 폴란드 계통이었다. 예티의 어릴 때 이름은 헨리에타 샬루페츠키였다. 예티의 아버지는 비엔나에서 비교적 성공한 금세공가였다. 그래서 생활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더구나 예티는 무남독녀였다. 비엔나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예티는 샬루페츠키라는 폴란드 이름보다는 트레프즈라는 오스트리아식 이름을 사용하여 친근미를 주고자 했다.

 

캐른트너슈트라쎄 31번지의 팔레 토데스코.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이곳에서 모임에서 예티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예티는 19세 때인 1837년에 캐른트너극장에서 소프라노로서 데뷔하였다. 캐른트너극장은 비엔나 구시가지의 캐른트너 성문 부근에 있었던 큰 극장이었으나 19세기에 도시계획으로 철거되어 지금은 자취조차 볼수 없는 건물이다. 예티는 1839년부터 1841년까지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의 궁정극장에 전속되었다. 주로 오페레타의 노래를 불렀다. 1844년부터 1848년까지는 비엔나의 요제프슈타프극장과 빈강변극장(테아터 안 데어 빈)의 고정멤버로서 출연하였다. 그러면서 프랑스에 가서 연주를 하기도 했다. 예티가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1849년 런던 콘서트에서였다. 이때 예티는 별도로 런던의 초청을 받은 요한 슈트라우스(아버지)와 처음으로 함께 연주회를 가졌다. 당시 런던의 음악잡지인 Musica World는 예티에 대하여 '놀랄만큼 아름답고 신선한 음성이다. 폭넓은 음역을 가진 메조소프라이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예티는 그만큼 인기를 끌었다. 

 

결혼후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헨리에타(예티). 얄상하던 예티도 50대에 들어서서는 둔둔해졌다.

 

예티는 예쁘장한 얼굴에 재능도 있고 성격도 활달하여서 인기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좋게 말해서 로맨스이며 나쁘게 말해서 스캔들이 많았다. 예티가 오페라 성악가로서 데뷔하자 수많은 남자들이 너도나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41년부터 1852년까지 10년 이라는 기간동안 무려 7명의 사생아를 생산하였다. 예티는 1843년에 돈많은 은행가인 모리츠 토데스코(Moritz Todesco)의 정부로 지냈다. 그렇게 지내기를 18년 동안이나 했다. 유태계 은행가인 모리츠 토데스코는 비엔나 시내의 슈타츠오퍼 뒤편 캐른트너슈트라쎄 31번지에 있는 팔레 토데스코에 살면서 비엔나의 내노라하는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살롱을 운영했다. 예티는 모리츠 토데스코의 정부로서 주로  이 저택에서 지내며 사교모임을 주관했다. 사족이지만, 팔레 토데스코는 전쟁이 끝난후 1947년부터 1995년까지 오스트리아인민당의 본부로 사용되었다. 예티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처음 만난 것도 팔레 토데스코에서였다. 아마 1861년이나 1862년 겨울이었다고 한다. 모리츠 토데스코는 음악애호가여서 그의 저택에서 저녁 음악회(수아레)를 자주 주선하였고 따라서 비엔나의 여러 저명인사들이 이 저택의 살롱에 출입하였으며 요한 슈트라우스(아들)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실은 예티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토데스코의 저택에서 만나기 몇 년 전에 비엔나의 요제프슈타트에 있는 슈토이셀 젤레라는 장소의 무도회에서 만나서 서로 은근히 호감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그때 요한 슈트라우스는 30대 말의 한창 젊은이였으나 예티는 40대를 훨씬 넘은 연상의 중년 여인이었다. 예티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의 나이 차이는 일곱 살이었다.

 

콘서트 메조소프라노로서 인기를 끌던 당시의 예티

 

토데스코 남작의 살롱에서 예티를 만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예티에게 흠뻑 빠져서 청혼을 하였고 곧 이어 1862년 8월 27일에 슈테판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로서는 예티가 음악적으로도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만 비즈니스에서도 센스가 있어서 여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예티로 인하여 점점 사회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예티와 결혼하고 나서 만들어낸 음악들은 그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들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전성기였다. 예티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신작에 대한 사보를 맡았고 개인 비서로도 활약했다. 말하자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매니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매혹적인 왈츠에 취해 있었던 비엔나의 시민들은 두 사람의 결혼 발표가 있자 충격을 받았다. 그때 예티는 44세의 중년이었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37세였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어머니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예티가 낳은 아이들 중에는 요한 슈트라우스(아버지)의 아들도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런던에서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로 지냈다는 증거가 있다는 얘기였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동생인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처음에는 적극 반대하였으나 나중에는 예티의 사업수단과 발이 넓고 사교적인 성격 때문에 집안에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라면서 인정을 했다. 예티는 비즈니스도 잘했지만 살림도 잘했다. 부엌의 일들을 자상하게 보살폈기 때문에 식구들이 좋아했다.

 

제니 린드의 모습으로 분장하고 노래를 부르는 예티.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

                    

예티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요한 슈트라우스에게 창의적인 작곡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었다. 예티는 남편 요한 슈트라우스에게 왈츠나 폴카만 작곡하지 말고 오페레타를 작곡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저 유명한 '박쥐'(Die Fledermaus)였다. 예티는 요한 슈트라우스를 설득하여 황실무도회 음악감독(KK Hofballmusik-direktor)이 되도록 했다. 그것도 큰 업적이었다. 예티는 1878년 4월 8일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예티가 59세 때였다.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은 사생아 아들 중의 하나가 보낸 편지에 너무 충격적인 얘기가 써 있어서 견디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아들이 실은 요한 슈트라우스(아버지)의 아들이어서 그런 사실을 사람들에게 밝히겠다고 협박조로 나왔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티는 히칭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어쩐 일인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모든 절차는 동생인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가 맡아서 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예티가 세상을 떠난지 7주 후인 1878년 5월 28일에 평소에 좋아 지내던 여배우 안젤리카 디트리히와 재혼하였다.

 

비엔나 히칭공동며지에 있는 헨리에타(예티) 슈트라우스의 묘지(오른쪽)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는 수없이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그레이트 왈츠'라는 제목의 영화이다. 이 제목만으로도 여러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예티를 만나 결혼하게 되는 이야기, 얼마후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릴리라는 애칭의 여배우를 좋아하게 되어 가정에 약간의 불화가 생기게 된 이야기가 기둥 줄거리이다. 에르네스티네 디트리히라는 이름의 릴리는 오페레타 '박쥐'의 초연에서 하녀 아델레를 맡아 인기를 얻게 되었다는 얘기도 곁들여 있다.

 

MGM이 제작한 영화 '그레이트 왈츠'(Great Waltz). 토데스코 남작과 예티, 그리고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또 다른 '그레이트 월츠'의 한 장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릴리